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날짜 : 2015-08-23
본문 : 출애굽기 34:28~35, 고린도후서 3:13~18

서론

레위지파의 모세는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들은 그 우상을 섬기며 먹고 마시고, 벌거벗고 춤을 추는 모습을 산중턱에서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손가락으로 쓰신 두 돌비를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를 내지 않으셨고 한마디도 야단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였고,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돌비가 깨져버렸으니 하나님이 모세를 다시 산꼭대기로 부르셔서 다시 두 돌비를 깎아 만들어 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40주야를 떡과 물도 마시기 않고 기도하면서 두 돌비의 십계명을 다시 받아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40주야를 물도 마시지 않고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모세를 특별히 보호해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가 두 돌비를 손에 들고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모세는 깨닫지 못했지만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에 무서워 모세의 근처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백성들을 불러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전하며 하나님은 백성을 괴롭히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 우상을 만들지 말고 우상을 섬기지도 말며 일 년에 세 차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얼굴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3대 절기인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 가르친 후에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 수건을 덮습니다. 사람들의 두려움 때문에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기도를 하러 갈 때에는 수건을 벗었고 나올 때에는 다시 수건을 씁니다. 오늘은 모세의 얼굴에 있던 광채와 그 영광은 어떤 것이고 그 수건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34장의 사건을 본문으로 사도 바울이 설교한 내용이 고린도후서 3장입니다. 이 본문의 내용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설교를 중심으로 출애굽기 34장에 나오는 사건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Ⅰ. 먼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어떤 것인가?

모세의 얼굴에는 영광의 광채가 났습니다. 제가 신학교 교수를 할 때 어떤 부흥강사가 아주 많은 은혜를 끼친다고 하여 학생들을 위해 모셨습니다. 그분은 검은 안경을 쓰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설교하시는 분이 왜 검은 안경을 쓰셨습니까?”하고 물으니 자신의 눈에서 광채가 나기 때문에 학생들이 바라보면 눈이 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살던 시대에 하나님을 알던 백성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이방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능력이 어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방의 백성들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오직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만 알았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압니다. 여호와 이외의 다른 이름의 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또한 여호와의 능력도 경험했습니다. 그 당시 전 세계 최고의 왕인 애굽의 바로 왕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였고, 홍해가 가로막아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 200만이 마른 땅을 건너는 것처럼 건넜습니다. 엄청난 능력인 것입니다. 또한 200만 백성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 때에 반석에서 생수를 먹게 하셨습니다. 배고파 죽게 되었을 때에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 먹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의 말씀을 받을 때에 하늘에서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 죄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어떤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제사장이 되어야 하고, 어떤 종류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과 기도를 할 때에 친구와 대화하듯이 기도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누리는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인 것입니다. 사람의 영광도 대단하기는 합니다. 봉황이 수놓아져 있는 자리에 대통령이 앉는 모습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사람의 영광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더 대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를 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고린도후서 3장 7절과 11절을 보니 모세에게도 영광이 있지만 그 영광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3장 9절에 나오는 정죄 직분도 영광이 있다고 합니다. 영광이 있기는 하지만 모세의 영광은 없어질 영광입니다. 즉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고후 3:7),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후 3:11). 모세의 영광은 ‘사라질 영광’(Fading of Glory)입니다. 빛이 환하게 켜져 있다가 점점 어두워지다 완전히 꺼져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라질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광스러운 백성이요 사람이지만 그 영광은 사라질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고후 3:10). 어두울 때에는 촛불 하나도 영광스럽습니다. 빛이 환합니다. 그러나 낮에 태양이 떠 있는 곳에 촛불을 켜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양이 뜨면 촛불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랜턴은 밤에 필요한 것이지 낮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빛이라고 해도 더 큰 영광이 오게 되면 작은 영광은 아무 의미가 없고 쓸데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직분은 의문의 직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은 영의 직분이고, 모세의 직분은 정죄의 직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은 죄인들에게 의를 주는 의의 직분이기 때문에 모세의 영광은 사라질 영광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영원한 영광인 것입니다. 구원의 방법도 모세의 방법은 짐승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리는 죄 사함의 방법으로 의식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는 예수를 믿음으로 사람이 죄의 모든 책임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는 큰 광명인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영광과 그 광채는 흐릿한 것이고 점점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은 영원한 영광인 것입니다.
도덕법, 즉 십계명이 쓸데없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십계명을 어긴 죄를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용서를 받는 의식법이 쓸데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의식을 통해 받는 죄 사함의 영광도 영광스럽지만 그 영광은 사라질 것이고, 약한 것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영광은 영원한 영광이고, 없어지지 않는 큰 영광이며 참된 영광입니다. 모세의 광채는 영광스럽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영광과 광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없어질 영광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영광을 받은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가졌습니다. 여호와만 경외하며 살면 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경외하면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광은 영원한 영광입니다. 영원한 영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광은 모세의 영광보다 더 높은 것입니다.

Ⅱ. 모세 얼굴의 광채를 수건으로 덮은 것은 무슨 의미인가?

둘째로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로 인해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출애굽기 34장의 사건과 고린도후서 3장의 바울의 해석은 약간의 모순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이유는 모세의 얼굴 광채로 인해 백성들이 모세에게 다가오기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없애고자 수건으로 가린 것으로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3장의 바울의 해석은 그와 다릅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후 3:13). 바울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율법의 영광은 일시적인 영광이고 사라질 영광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일시적인 영광에 주목하지 말고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영광, 복음시대에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라는 목적으로 수건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모순된 것으로 보이지만 모순이라고 생각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호 보완적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모세가 백성들로 하여금 가까이 오지 못하는 두려움을 막기 위하여 수건을 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여호와 앞에 들어가 하나님과 말씀을 나눈 후에 다시 나와서도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야 너의 얼굴에 광채가 난다고 하여 자랑하고 좋아하지 말라. 너의 얼굴에 난 광채를 띄고 돌아다니며 잘난 척 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의 얼굴에 있는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기 때문이다. 너의 얼굴에 있는 영광은 다른 사람이 부러워해서는 안 되는 영광이다. 너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하도록 수건을 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고린도후서 3장의 내용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그림자요 예표일 뿐이고 참 영광은 장차 올 영광이라는 것을 깨닫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참 영광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를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건을 벗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있던 수건이 이제는 유대인들의 마음속으로 이사를 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벗겨지지 않는 수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 3:14-15). 모세의 얼굴에 있던 수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덮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잘 압니다. 자신의 역사와 문화, 지리, 왕들도 잘 압니다.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십 번 수백 번 읽어도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구절구절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수건으로 덮여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고, 랍비들이 많은 주석들을 적어도 성경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없어질 영광에 주목하지 말고 참된 영광을 바라보라는 목적으로 쓴 수건이 도리어 없어질 영광을 자랑하고 참된 영광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선한 목적으로 모세가 수건을 섰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니 이것을 바라보지 말고 앞으로 올 영광을 주목하라고 섰으나 도리어 그림자와 같은 영광을 바라보고 도리어 선한 목적이 왜곡되어 악한 목적으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탄의 역사입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이 세상의 신은 마귀입니다. 마귀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 불신자들의 마음을 가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리고 복음의 광채와 영광이 비쳐도 짙은 커튼으로 가리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영광의 복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앱 4:18). 마음의 수건이 가려지기 때문에 마음이 굳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며 그리스도의 영광의 본체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수건이 가려 있으면 복음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광과 복음의 광채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왜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도 모르며 죽고 난 후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사후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악령의 역사이고 무엇이 성령의 역사인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한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수건이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눈을 가리고 영적인 어두움에 있는 사람입니다. 불신자들은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어둡기 때문에 삶도 어두운 것을 좋아합니다. 술집도 어두운 곳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낮보다는 밤에 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안정을 느끼고 어두움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마음의 눈이 가려져 영적인 어두움에 사는 것은 괜찮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영원한 어둠인 지옥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은 결국 영원한 어둠인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세의 무궁한 시간은 영원한 지옥에서 이를 갈며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의 수건을 제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지옥은 거짓이 아닙니다. 이것을 거짓이라 하는 사람은 어둠에 있는 자요, 수건이 가려진 사람입니다. 성경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읽어도 깨닫지 못하며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는 것은 마음의 수건이 가려져 여전히 어둡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수건을 제거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마음의 수건이 제거되어야 그 다음부터 영적인 광명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Ⅲ. 불신자들이 마음의 수건을 제거하면 무엇을 얻게 되는가?

그렇다면 불신자들의 마음의 수건을 제거하면 무엇을 얻게 될까요? 바울은 세 가지를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모두 L자로 시작합니다. 첫째로 마음에 빛(Light)을 얻게 됩니다. 둘째로 마음에 참된 자유(Liberty)를 얻게 되고,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Likeness)을 얻게 되어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먼저 마음의 수건이 제거되면 마음이 빛을 얻게 됩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마음의 수건이 제거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큰 빛이십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9~10).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이시며 큰 빛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빛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마음속에 빛을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고로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빛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알게 되고 영적인 이해력을 얻게 되며 복음을 깨닫게 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사후세계에는 어떤 영광이 있는지를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에 빛을 비추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아무리 권력이 많고 돈이 많아도 마음의 수건이 가려지면 영적인 면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읽어도 졸리기만 하며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글만 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3).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입니다. 그러나 어둠에 처한 죄인들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비취게 된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사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건을 제거하게 되면 먼저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은 빛을 보셨습니까? 아직 빛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들은 아직 보지 못한 것입니다. 내 영혼에 빛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분은 아직 받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의 수건을 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복음의 빛이 들어와 영원히 빛을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 성경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합니다. 빛이 없을 때에는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빛을 받게 되면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게 됩니다.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예배를 드리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빛을 받은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을 가지게 되고 아무리 언어에 뛰어나고 문법의 도사일지라도 마음의 빛을 받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의 수건을 제거하면 사람은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정치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방종적인 자유도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자유입니다. 마음의 수건이 제거되면 지옥으로부터의 자유, 멸망으로부터의 자유, 심판으로부터의 자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어둠으로부터의 자유, 정죄로부터의 자유, 마귀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유를 참 자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영적으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마귀에 묶여있습니다. 속에 귀신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에 귀신이 시키는 대로 살게 됩니다. 귀신이 죄를 범하게 하는 것입니다. 숯불을 가슴에 안고 데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음녀를 가슴에 품고 멸망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죄악이 즐겁다고 합니다. 어둡기 때문에, 마귀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마귀가 우리에게 명하여도 순종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무엇이기에 나에게 명령을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죄에 끌려다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사탄을 쫓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참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수건이 제거되면 자유를 얻게 됩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여 영생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점점 영광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이를 성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천국으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죽지 않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추하지 않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의 수건이 있구나. 복음을 들어도 믿어지지 않고 거부감이 드는 것을 보니 내 마음에 수건이 있구나. 이것이 나를 죽이게 하는 것이구나.”하고 깨닫는 사람은 그 수건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건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요?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6). 유대인들도 주 예수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어지게 됩니다. 사람이 자신의 영혼에 스스로 빛을 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가 마귀의 올무에게서 자유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천국에 가서 영광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나는 내 힘으로 영광을 얻을 수 없으니 내가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 예수께로 갑니다.”하고 주 예수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고 영원의 빛과 자유와 영광스러운 영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34장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수건이 가렸다면 버리시고 예수께로 오셔서 영원한 빛을 받으시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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