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신 7:17-26)

날짜 : 2018-04-22
본문 : 신명기 7:17-26

지난 시간 신명기 7장이 교차대구법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차대구법이란 앞뒤 내용이 똑같고 중간 내용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7장의 맨 앞과 맨 뒤에는 같은 주제인 거룩한 전쟁을 다루고 있고 중간 부분에는 하나님의 선택과 인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구조는 헬라어 알파벳 X(키)의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교차대구법(Chiastic structure)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7장은 ABBA라는 구조로 되어 있고 그 강조점은 중간 부분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인애(헤세드)를 주신 이유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이방 신을 섬기는 가나안 7족을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명기 7장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말씀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전쟁을 할 때 “두려움을 갖지 말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7족을 정복하려면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두려움부터 정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가나안 7족 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일어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모세는 38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명기 1장 28절에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무기도 강하고 힘도 세고 우리는 그들에 비교하면 메뚜기와 같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 1장 29절에서“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아니함으로 가나안 땅 정복을 실패하고 결국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40년 광야 방황의 근본 원인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도 아니고 가나안 7족 때문도 아니고 바로 그들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100번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믿음의 반대말을 불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앙이라기 보다는 두려움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 36절에서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을 병에 걸렸다고 하자 살려 주시기 위해서 함께 가셨습니다. 가는 중간에 어떤 사람이 와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하자 야이로는 낙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교훈한 말씀이나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교훈하신 말씀은 이러한 사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I. 두려움의 원인과 문제점 

  첫째로 두려움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7장 17절에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중에 이르기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이 일어나는 장소가 외부가 아니고 사람의 마음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두려운 생각이 일어나서 추론하게 되는데 이러한 추론들이 바로 두려움의 기원이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일어나는 과정은 사람의 마음속으로 추론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와 능력을 가지고 가나안 7족의 숫자와 능력을 수평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추론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도움을 내려 주신다는 진리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수평적인 추론의 결론은 뻔합니다.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라는 부정적인 결론이 나오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모세는 두려움의 문제를 가나안 정복의 가장 큰 문제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가나안 땅에 못 들어 갔다는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두려움을 그대로 놓아두면  또다시 가나안 땅 정복에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모세는 이 두려움의 문제를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두려워 하지 말라고 강조하며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두려움은 하나님의 능력을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그 추론 과정에서 배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0살짜리와 20살짜리가 싸울 때 수평적으로 보면 10살짜리가 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10살짜리 아버지가 세계 헤비급 권투 챔피언이고 지금 그 아이와 함께 있다고 한다면 그 결론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아무리 10살짜리 아이라고 할지라도 손잡고 있는 아버지가 헤비급 챔피언이라고 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 가운데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이것을 계산에서 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도들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성경 전체에 100번 이상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자식이 없고 또한 사래가 생리적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얼마나 두려워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상급을 주면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너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테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의 후손들이 지금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미국을 뒤에서 흔드는 엄청난 영향력이 있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 7족은 지금 어디에서 사는지 명함도 못 내미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끝까지 약속을 책임져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7절에도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뵙고 두려워하자 주님은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대한 해답은 처음이요 나중 되신 예수님 자신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사도 요한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넷째로 두려움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것을 두려워하고 핍박당할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질병이나 사고로 죽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모든 원인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계산에 넣지 않고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두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두려움은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복음 전도를 하지 않는 것도 복음을 전했다가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복음과 교회로 마음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로 두려움을 가질 때 가장 큰 문제점은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 가나안 7족을 물리칠 수도 없고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를 방황하다가 죽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수영하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혼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랜 시간 공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글 쓰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학위 취득의 승리를 맛볼 수 없고 복음 전도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영혼 구원의 열매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결혼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녀 양육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두려움이든지 두려움을 갖는 사람은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20장 8절에서 “유사들은 오히려 또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찌니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떨어질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남에게도 전염시켜서 전쟁에서 승리를 얻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한 것입니다.  

II. 모세가 두려움을 금지시킴 

  첫째, 모세는 두려운 생각이 아예 일어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신명기 7장 18절에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절대 두려움이라는 것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이유도 생각할 것이 없이 두려움이 마음속에 일어나도록 허용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모세는 가나안 7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7족이 아무리 숫자가 많고 아무리 키가 크고 아낙 자손들이고 그들의 성읍이 크고 높을지라도 그들을 조금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셋째, 신구약 성경은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먼저 잠언 29장 25절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5절에도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해도 사람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도 멸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내세까지도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56편 11절에서 다윗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도 복음을 전할 때에 공회의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잡아다가 협박을 했었습니다(행 4:18). 그러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사도행전 4장 19절에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하고 그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두려움이 일어나려고 한다면 조금도 빈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의 두려움을 이해한다가 아니라 그 두려움을 금지한 것입니다. 

III. 모세가 내린 두려움에 대한 처방(18~26절) 

  모세는 두려움에 대해서 과거, 현재, 미래 세 가지 관점에서 처방을 내리고 있습니다. 첫째, 과거적인 면입니다. 모세는 과거에 행하신 능력 있는 역사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18절 후반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라고 했습니다. 그냥 보통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잘 기억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19절 중반에도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7족이 아무리 수가 많고 그 군대가 강하다 할지라도 그보다 더 강한 애굽의 바로 왕을 하나님이 굴복시켰는데 너희는 그런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가나안 7족과 전쟁할 때 그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 적용한다면 아무리 큰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피 흘리시고 죽으신 사건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이기에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신 그 사랑을 늘 기억하고 적용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둘째, 미래적인 면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의 약속을 신뢰하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7장 20절, 22절, 23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7절에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라고 부정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마치 자기들의 힘으로 가나안 7족을 쫓아내야 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처방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신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일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그들에게 왕벌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20절). 왕벌을 어떤 사람은 은유적으로 해석을 해서 질병이나 정신적 고통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왕벌일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왕벌이 덤비면 견뎌낼 자가 없습니다. 한 대만 쏘여도 죽을 수 있는데 왕벌이 수백 마리나 덤비면 그것은 칼이나 활이나 어떤 무기로도 대항할 수 없는 무서운 무기가 될 것입니다. 
  2) 가나안 7족을 점점 쫓아내시겠다는 것입니다(22절). 하나님은 가나안 7족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점점 쫓아내신다고 했습니다. 왜 급히 멸하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멸하신다고 하신 것입니까?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갑자기 차지하게 되면 그곳에 빈 공간이 생기고 그 빈 공간에 들짐승들이 들어오면 더 위험해지기 때문에 가나안 7족을 점진적으로 쫓아낸다고 하신 것입니다. 
  3) 가나안 7족을 크게 요란케 하시고 진멸하시겠다고 했습니다(23절). 하나님께서 가나안 7족에게 큰 혼란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7장 24절에 보면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붙이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왕들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일을 모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장래 일어날 거룩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이길 자가 없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위대한 약속을 주셨는데도 두려움에 떠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현재적인 면입니다. 현재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땅의 타락한 종교와 관련된 것은 심히 미워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조각한 신상을 불사르고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도 탐내지 말고 취하지 말고, 집에 들이지도 말고, 그런 것들을 극히 꺼리고 심히 미워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우상들을 가증이 여기시고 우상들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있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계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결국 두려움과 실패만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모세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선지자들도 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1장 13절에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마가복음 5장 36절에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믿음과 용기로 우리 마음에 충만히 채우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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