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 비유

날짜 : 2015-04-26
본문 : 누가복음 16:19~31

서론

‘비유’는 영어로 ‘Parable’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παραβολη’(파라볼레)라고 합니다. 영어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옆에’라는 의미의 ‘παρα’(파라)와 ‘던져 놓다’는 의미의 ‘βολη’(볼레)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비유라는 것은 어떤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일상적인 예를 옆에 던져놓고 어려운 영적인 진리를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기 위해 밭의 비유와 씨 뿌리는 비유가 있고, 또 사람들 중에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어부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을 때 좋은 고기나 나쁜 고기가 잡힌다는 일상적인 예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영적 진리 옆에 쉬운 일상사를 놓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관한 말씀을 전하실 때는 비유가 아니면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믿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유를 사용하셨고, 그것을 듣고 비판하고 트집을 잡으려는 사람에게는 비유를 사용해서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헛갈리게 하고, 믿으려는 사람은 쉽게 이해하도록 비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비유이냐? 역사적인 사실이냐?”는 주제를 가지고 논쟁이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실존인물이었고, 그들이 죽어 천국과 지옥에 간 것, 그리고 아브라함과 부자 사이에 있었던 대화도 모두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인 사실임에도 왜 설교제목을 ‘부자와 나사로 비유’라고 정했는지 의아해 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역사적인 사실을 옆에 놓고 설명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도 이 이야기 전체는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나사로 전체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비유를 쓰게 되면 영적인 진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Ⅰ. 이 비유에서 찾을 수 있는 영적인 진리는 무엇인가?

첫째, 인간의 삶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도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단자들은 ‘영혼멸절설’(Annihilationism), ‘영혼수면설’(Soul Sleep Theory) 등의 이론을 취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 의식도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 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22절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가 죽었을 때는 천사가 오지 않았는데 거지가 죽었을 때는 천사가 와서 그 영혼을 천국으로 받들어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중 한 분이 지금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그 집사님이 얼마 전에 돌아가실 뻔 했었는데, 그 때 있었던 일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사 둘이 와서 네 영혼을 데리러 왔다고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집사님이 교회 선교헌금 약정해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 다 내고 가면 안 되겠느냐고 했더니 천사들이 잠시 회의를 하고 헌금을 하는지 안 하는지 보겠다고 하며 이번에는 데려가지 않겠다고 해서 깨어났다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었을 때 천사가 그 영혼을 받들어 아브라함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음부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죽은 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도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둘째, 인간이 죽음 이후에 가는 세상은 둘로 구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두 세상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이 그 영혼을 받들어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품’이라고 하는 것은 안식이 있고, 평안이 있고, 사랑이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아브라함의 품’을 천국을 대신해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현세에서 쾌락과 만족을 누리고 살다가 죽은 후에는 음부에서 고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4절 후반에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음부에 떨어져 고민하고 고통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음부는 지옥을 가리킵니다. 지옥의 특징은 고민과 고통입니다. 정신적으로 고민하게 되고, 육신적으로 고통 받게 되는 곳입니다. 부자는 고민과 고통의 지옥에 빠지게 되었는데 거기서 벗어나올 소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빠져나올 소망이 있다면 그나마 견딜 만할 텐데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고, 위로해 줄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48~49절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더기가 불에 타는데 죽지 않고 거기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 바로 지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이상은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지옥 간 사람이 그 곳을 빠져나와 천국으로 가고, 지옥 간 사람의 영혼이 돌아다니며 산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간 영혼은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과 대화할 수 없습니다. 무당이 굿하는 것은 모두 귀신의 장난입니다. 모두 헛소리인 것입니다. 한 번 죽어 사람의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변경할 수도, 취소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최종적인(final) 것입니다. 나사로는 이 땅에서 거지였지만 죽어서 천국을 갔고 부자는 이 땅에서 부자였지만 죽어 고민과 고통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셋째, 천국에 있는 사람들과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멀리서 서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국과 지옥은 내세이기 때문에 서로 대화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넘어갈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볼 수도 있고 대화도 가능한데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26절에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이생에 있을 때는 매일 같이 밥도 먹고 함께 생활하던 가족들이 죽고 난 후에 어떤 사람은 천국에 있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있을 수 있습니다. 내 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가 천국에 가 있는데, 나는 지옥에 와서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천국에 가 계신 아버지에게 “아버지! 나 좀 살려주세요. 내가 아버지 아들 아닙니까?”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너와 나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건너갈 수 없다”는 대답만 들릴 뿐입니다.
지옥에서 서로 고통 받는 것만 보고 있다면 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 혹은 가족들이 저 멀리 천국에서 행복을 누리고 안식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더군다나 건너갈 수 없는 수렁이 있어서 영원히 분리된다고 한다면 얼마나 후회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교회 가라고 말해 주는 사람도 없고 예수 믿으라고 권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지옥에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아무리 외쳐본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옥 간 부자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천국과 지옥에 가서 수면을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재침례교도와 루터교도 일부가 ‘영혼수면설’(Soul Sleep Theory)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인간의 영혼은 내세에서도 의식이 있고 감각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다 부활하게 됩니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하여 천국에서 육신과 영혼이 결합되어 영생하는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사망의 부활을 하여 지옥에서 육신과 영혼이 결합되어 영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벌을 받으며 울며 이를 가는 것입니다. “아, 내가 왜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라고 후회하며 가까운 가족들이 멀리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 그 안타까움, 후회감, 슬픔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생의 호흡이 있을 때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지옥에 간 불신자들은 지옥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영혼구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구합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 16:27~28).
부자는 살아 있을 때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교회 다니는 사람을 핍박하고, 교회가라는 소리할 거면 차라리 이혼을 하자며 입에 담지 못할 나쁜 말들을 다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그렇게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더니 죽은 후에 지옥에 떨어지고 나서야 “아, 그 때 그 복음이 진실이로구나! 지옥이 있구나! 천국이 있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가는구나!”하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돌이킬 수 없지만 이생에 남아 있는 자기 다섯 형제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지옥에 가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옥에 가면 불신자가 아무도 없다.” 지옥에 가면 복음을 다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어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미 지옥에 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목적은 생명과 호흡이 있는 이 순간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좋은 말로 하실 때 믿으라”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목사와 전도자들이 좋은 말로 이야기할 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서 그 때 그 말이 진실이었다고 후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Ⅱ. 현세에서 내세로 바뀌면서 인간의 삶이 역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역전, 즉 뒤집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부자라는 이유로 지옥 간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으나 천국에 갔고 요셉도 큰 부자였으나 천국에 갔습니다. 현세에서 부를 누리다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최고이겠죠. 이 부자는 왜 지옥에 갔을까요?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선지자, 사도들이 증거한 말씀을 모두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어야 천국에 갈 수 있는데,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자기 죄를 그대로 지고 있고 지옥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나사로도 가난한 거지였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 이름의 뜻은 ‘Help of God’(하나님이 도우시는 자)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나사로를 보며 비아냥거렸을 것입니다. “네 이름이 어찌하여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냐? 하나님이 도와주시는데 그 모양 그 꼴을 하고 사냐? 나는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데, 차라리 네 이름을 바꿔라!” 그러나 나사로는 비록 육신이 병들고 가난해서 구걸을 하여 먹고 살아도 “나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천국에 들어갈 의를 얻었습니다”라는 고백과 믿음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와 나사로가 시간이 되어 죽음이라는 관문을 거치게 되었고, 현세에서 내세로 장면이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생의 모든 것이 역전되었습니다. 부자의 현세는 다섯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 19절 전반에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명품의류를 즐겨 입던 자였습니다. “이것 얼마짜린 줄 아세요?”하며 뻗대고 다녔던 것입니다.
둘째, 19절 후반에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일 같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춤추며 주색잡기를 즐기는 것이 그의 하루일과였습니다. 거기다가 형제가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형제 여섯 명이 뭉쳐서 돌아다니면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문의 힘이 막강합니다. 한 사람이 다치면 벌떼같이 달려들어서 상대를 두들겨 팼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가난하고 병든 나사로를 단 한 번도 병원에 데려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따뜻한 음식 한 번 준 적 없이 매일 음식 쓰레기만 주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을 위해 조금의 희생이나 헌신도 없었습니다. 내세를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철저히 현세적이고 세속적이며 쾌락적이고 이기적입니다. 부자의 삶은 이런 삶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가 섬기는 신은 자기 ‘배’(腹)였고,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내세의 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2장 21절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는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았지만 그도 역시 죽었습니다. 사람은 7~80세 넘어 살 수 있지만, 100세를 넘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리 오래 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부자는 내세에 물 한 방울 마실 수 없는 극도의 가난을 겪게 됩니다. 불꽃 가운데서 영원히 고민하고 고통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합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6:25). 인생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순간을 겪고 나서 부자는 물 한 방울도 마실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사로 현세의 삶은 얼마나 괴로웠습니까? 그는 피부병이 있어 늘 긁곤 했는데,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집도 없었습니다. 부자의 대문 앞이 그의 집이었습니다. 그의 음식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물 쓰레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자’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고통스러운 현세의 삶을 살았지만, 그의 내세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천국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역전된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살아가는 시대를 정확하게 둘로 나누어 말씀합니다. 하나는 ‘현세’(This Age)이고, 또 하나는 ‘내세’(Age to Come)입니다. 현세에서 복 받고 내세에서도 복을 받는 것은 1등이겠죠. 그리고 현세에서 나사로처럼 고생하며 살지만 내세에 복을 받는 것이 2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3등부터는 비참합니다. 현세에서 복을 받지만 내세에 지옥 가는 것이 3등이고, 현세에서 복을 받지 못하고 내세에서도 복을 받지 못하는 4등은 매우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3등은 4등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이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세는 짧고 내세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짧은 현세 속에 잠깐 복을 누리다가 영원한 내세에서 무한한 고통을 받으며 고민가운데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세에 조금 고생스러워도 영원한 내세를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하며 복을 누리며 살겠습니까? 오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당신은 죽음 이후의 세상에서 복을 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오늘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주는 분명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Ⅲ. 아브라함과 부자의 대화는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브라함과 부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대화의 목적은 “성경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사람이었지만 지옥에 와서야 비로소 살아 있는 다섯 형제의 영혼구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그들도 죽으면 자기처럼 지옥에 떨어질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죽은 나사로를 형제들에게 보내 복음을 증거해서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 주길 부탁합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복음을 증거하면 믿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16:29).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 즉 성경이 있으니까 성경을 들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또 31절에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 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한 복음을 다 믿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난 것을 본 사람도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불신앙의 마음은 그처럼 고약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마리아와 마르다의 남동생인 나사로가 등장합니다. 여기 누가복음 16장의 나사로와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죽었다가 4일 만에 살아났습니다. 베를 동인채로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요한복음 12장 10절에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나오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부자의 말이 모두 헛소리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66권 성경에 모두 말씀하셨는데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는 살아있을 때 성경을 읽고 믿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나 글은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66권으로 말씀하신 성경은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인생은 짧은 현세를 살다가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여 내세로 들어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현세는 짧고 내세는 영원하기 때문에 현세보다 내세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천국에서 복과 안식을 누릴 것이냐? 아니면 지옥에 떨어져서 고민과 고통을 받을 것이냐?”하는 문제는 현세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현세를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은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과 자기 노력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는데,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가 갚아야 할 모든 죗값을 대신 다 갚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사죄’(Forgiveness)와 ‘칭의’(Justification)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내세를 준비하려면 자신의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살았던 죄를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구주로 영접하여 사죄와 칭의를 받으시고 아브라함의 품에서 다 같이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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