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 계시된 부활사상

날짜 : 2015-04-05
본문 : 욥기 14:13~15

서론

부활이 신약시대에 나타난 전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구약시대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욥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이 질문은 욥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했던 질문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다시 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욥기 14장 1~12절은 인간의 연약함과 짧은 인생의 덧없음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욥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10명의 자식을 잃었고, 재산과 건강도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 14장 1~2절에 욥은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욥은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다”고도 말했습니다(욥 5:7). 불티는 밑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불티가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인생의 고난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런 와중에도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욥 14:7). 겨울이 되면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가지를 다 잘라내도 나무는 봄이 되면 다시 파릇파릇하게 움이 나고 꽃이 핍니다. 지난 주간에 거리에는 벚꽃, 진달래, 철쭉, 개나리 등 각종 꽃들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다 죽은 것처럼 보였던 나무와 식물들이 다시 소생하였습니다.
나무는 겨울에 죽은 것 같아도 소망이 있습니다. 봄이 되면 다시 움이 나고 꽃이 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기 14장 10절에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은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잘라도 다시 살아나는데,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단지 여기서 탄식하고 있는 이유는 인간 세계 그 어디에서도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던 사람 가운데 유명한 중국의 진시황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절대 권력을 소유한 황제였지만 그는 죽었고 아직까지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누구에게서도 죽음의 한계를 극복할만한 도움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자연 세계에서도 죽음의 한계를 극복할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떤 약을 먹고 다시 살아난다면 아마 대박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자연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도움을 자연 세계나 인간 세계 아무데서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눈을 들어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연 세계, 인간 세계에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어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이 있지 않겠느냐는 희미한 소망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기 14장 13절에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이 새번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나를 스올에 감추어 두실 수는 없으십니까? 주님의 진노가 가실 때까지만이라도 나를 숨겨 주시고, 기한을 정해 두셨다가 뒷날에 다시 기억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욥은 지금 주님께 “내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내 영혼을 스올이라는 곳에 잠깐 받아두셨다가 훗날에 나를 좀 기억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스올은 구약시대 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 들어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욥은 지금 하나님께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주실 계획이 없으십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14절에 “아무리 대장부라 하더라도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 좋은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이 고난의 때가 지나가기까지 기다리겠습니다”(새 번역)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대장부로 태어나 한 세상을 호령하고 살았다고 해도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음 이후 더 좋은 때를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 이후에 더 좋은 때를 예비해 두지 않으셨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더 좋은 때를 바라보며 지금 고난의 때가 다 지나갈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겠다는 의미입니다.
욥은 죽은 자의 부활이 인간적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혹시나 부활의 더 좋은 때를 계획하고 계시다면 짧은 인생의 고난과 슬픔을 겪는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기다리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5절에 “그 때에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시면,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손수 지으신 나를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은 그 때 주님이 불러주시면 대답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스올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불러주시면 내가 부활에 참여하겠다는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지금 희미하게 부활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희미한 부활에 대한 소망은 신약시대에 와서 명백해 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그가 재림하실 때에 모두 생명의 부활을 하여 영생불멸하는 존재로 살게 될 것이라고 신약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현재도 좋은 때이지만 죽은 후가 더 좋은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고 살뿐만 아니라 영생불멸하는 존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고 또 다시 죽고 사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 영원히 사는 것이 부활입니다.
우리는 영생불멸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세의 삶이 조금 힘들고 어려워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신약의 뿌리가 되는 구약 성경 속에 나타난 부활사상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구약 성경에 부활사상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대립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성전을 장악한 제사장들로, 성전에서 물건을 팔아 돈을 갈취한 자들이었고, 모세 오경과 역사서에서 부활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주로 랍비들이었고,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 부활사상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향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며, 부활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바리새인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부활사상이 있다고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옳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옛날 헬라의 철학자들 가운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영혼의 불멸’(Immortality of the Soul)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육신의 불멸’은 도무지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가서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 그들은 육신의 부활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상이라고 말하며 내일 다시 오라고 했지만 바울은 고린도로 이동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약 시대에는 구약에 부활사상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부활사상이 있다고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편을 들어주시고 그들을 옳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Ⅰ. 사후세계에 관한 히브리인들의 일반적인 사상

먼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을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5장 8절에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죽는 것을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조상들의 뼈를 한 곳에 모아 두었습니다. 사람이 죽고 시신이 썩으면 뼈를 가져다가 조상들의 뼈를 모아 둔 곳으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은 그렇다고 치고 영혼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어떤 분은 영과 혼이 다르다고 합니다만 성경에서 영과 혼은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는’(Interchangeable)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비물질적인 부분을 통칭해서 ‘영혼’이라고 합니다. 영과 혼은 구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은 것을 영이 떠났다고도 하고, 혼이 떠났다고도 하며, 영혼이 떠났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시편 6편 5절에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음부’라는 곳으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음부’는 히브리어로 ‘스올’입니다. 그런데 이 ‘스올’을 번역할 때 KJV(흠정역)은 ‘Hell’ 즉, 지옥이라고 했고, NIV(새국제역)에서는 ‘Grave’(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또 NRSV(새개역표준역)은 ‘Sheol’(스올)이라고 음역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대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스올이라는 곳은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음부’라고 번역한 것은 ‘Hades’(하데스)입니다.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의 ‘음부’가 각각 개념이 다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음부는 ‘불신자들의 악한 영혼이 들어가는 지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스올은 악한 사람들만 가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들어가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음부를 어둡고 그늘진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움과 만족이 없는 곳이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없는 침묵의 장소이자 고통과 흑암과 절망이 있는 곳이며 더 이상 인간이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산 사람의 영혼이 음부에 있는 영혼들과 교통하는 것은 절대로 금지되었습니다. 무당들은 자기들이 죽은 사람의 영혼과 교통한다고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산 사람의 영혼은 절대로 죽은 사람의 영혼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귀신들이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성격을 알고 장난을 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은 상황이 다급해지자 죽은 사무엘의 영혼과 교통하려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사울은 바로 그 사건 때문에 왕위에서 완전히 폐위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가 있는 음부의 영혼들과 산 사람의 영혼은 소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간혹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꿈속에 나오신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일 수 있고, 때로는 귀신의 장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결코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사후세계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희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생이 진짜이고 죽은 후의 세상은 있는지 없는지 알게 뭐냐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은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을 보내는 것이 일생이고, 이 세상에서 호흡하는 동안을 이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네 길입니다. 잠깐 왔다가 가는 것이지 이 땅에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삶의 참 실체는 사후세계입니다. “사후세계를 복되게 보낼 것이냐?” 아니면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냐?”가 진짜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사상 가운데 분명한 한 가지는 “사후세계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영혼이 사후세계에서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하나님이 점진적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원리를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한꺼번에 다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보여주시다가 신약 성경에 와서 완전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네 가지로 나뉩니다. 첫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고 하고 ‘율법서’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를 ‘역사서’라고 하고, 욥기부터 아가서까지 ‘시가서’, 나머지 책은 ‘예언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크게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로 분류가 되는데, 순서대로 그 속에 담긴 부활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Ⅱ. 모세오경에 나타난 부활사상

사두개인은 모세오경에 부활사상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조롱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눅 20:37~38).
모세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이적을 보이시며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이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들이 지금도 살아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고 영광스러운 육신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예수님이 인용하신 구절이 바로 출애굽기 3장 6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의인들이 죽어도 그 영혼을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하실 뿐만 아니라, 그 영혼이 실제로 살아서 육신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17장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 아론이 대제사장이 되어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있었을 때, 레위지파의 고라, 다단, 아비람과 같은 자들이 모세에게 반역하였습니다. 왜 모세만 우리의 지도자인지, 또 아론만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250명의 족장들이 고라의 편을 들었고, 14,700명의 백성도 고라를 따랐습니다. 큰 반역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그만 땅이 갈라져서 산채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족장 250명은 분향하다가 불에 타 죽었고, 백성 14,700명은 염병을 앓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어서 하나님은 열 두 지파 사람들의 대표를 불러 그들의 지팡이를 한 데 모았습니다.
지팡이는 이미 나무로서 완전히 생명을 잃은 죽은 나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12개의 지팡이 가운데 싹이 나고 움이 돋고 열매가 맺히는 지팡이의 지파는 제사장으로 택한 종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 두 지파의 대표가 모두 지팡이를 가져왔는데 레위지파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나고 움이 돋고 꽃이 피고 살구가 열렸습니다. 아론의 죽은 지팡이에서 열매가 맺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기상천외한 기적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나무 지팡이에도 싹이 나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모세오경에도 두 번이나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Ⅲ. 역사서에 나타난 부활사상

역사서에는 부활사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려낸 두 가지 기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기록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선지자 엘리야의 기적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들었을 때 엘리야 선지자는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서 과부에게 음식을 공궤 받아 연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올라가서 자기 몸을 세 번 펴고 아이의 혼을 몸으로 돌아오도록 간구하는 기도를 통해 아이의 생명을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4장에 엘리사 선지자도 수넴 여인의 공궤를 받습니다. 엘리사가 지나갈 때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서 자기 집에 방도 만들어 놓고 책상도 만들어 놓고 유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그 아이 위에 올라가서 자기의 입을 아이의 입에 대고, 자기 눈을 아이 눈에 대고, 자기 손을 아이 손에 대자 아들이 일곱 번 재채기 하더니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사건은 부활과 성격이 같지 않습니다. 다시 살아나게 되었지만 이 두 아들은 끝내 수명이 다해 다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생명회복’(Resuscitation)이지 ‘부활’(Resurrection)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불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서에는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없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죽은 자의 생명을 회복시킬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면 다시 죽지 않게 하실 능력 또한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려내셨는데 다시 죽지 않도록 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역사서에서도 여전히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Ⅳ. 시가서에 나타난 부활사상

욥기 14장 14절에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은 희미한 부활의 소망으로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 19장 25~27에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은 14장의 고백 이후 19장에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눈으로 보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욥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26절에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육체 밖에서’라는 번역은 ‘썩을 육체를 벗어나서 새로운 육체를 입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 사용된 전치사구가 ‘in my flesh’입니다. ‘내 육체를 입고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번역본에 따라서 약간 상이하지만 ‘새로운 육체를 입고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는 번역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러므로 27절에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죽이 한 번 썩어 죽어도 새로운 육체를 입고 내가 새로운 육체의 새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게 되리라는 욥의 믿음입니다. 희미한 소망이 확신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6편 10~11절에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여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한다”는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성도의 부활을 예언한 것입니다. 부활의 때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영생하게 되는데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쁨이 충만하십니까? 현세에서는 즐거움이 있다가 없다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해서 주님을 뵈옵고 영생불멸하게 되면 그 때는 기쁨이 충만하고 영원한 즐거움이 우리와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상황이 조금 괴롭고 어려워도 참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쁨이 충만하고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때가 반드시 우리에게 나타날 줄 믿습니다.

Ⅴ. 예언서에 나타난 부활 사상

예언서에서는 부활사상이 좀 더 명확해 집니다. 이사야 26장 19절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주의 음성을 들으면 땅이 죽은 자를 내어주고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시체들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나는데 어떤 사람은 영광스럽게 살아나고 어떤 사람은 치욕스럽게 살아납니다. 다니엘 12장 2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해서 영원한 즐거움과 복을 누리는 사람도 있고, 영원한 치욕을 당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우리 성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합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 생명의 부활을 하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것이지만, 사망의 부활을 하는 사람은 부활해서 지옥에 들어가 영영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부활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부활을 하겠습니까? 사망의 부활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이 생명의 부활을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이유는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영생과 부활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 믿으시라고 아무리 권면하고 전도해도 믿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자리에서 100억을 준다고 하면 안 가져가실 분이 계시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가져가려고 안간 힘을 쓸 것입니다. 그런데 100억과 비교할 수 없는 영생불멸의 선물을 주신다는 대도 믿지 않겠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옥 믿지 않아!”라고 대답한다고 해서 지옥이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곳에 들어갈 사람을 정하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안 믿으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호세아 13장 14절에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구절은 성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이 우리를 잡아 가둬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것이지만 다시 살아 영생불멸하게 될 것을 믿으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결론

욥이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더 좋은 때를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그 때 저를 불러주소서”하는 욥의 간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응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그를 구주로 믿는 모든 성도들을 모두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활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부활을 해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사람도 있고 사망의 부활을 해서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 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여러분 중에 단 한 사람도 사망의 부활을 해서 무궁한 치욕을 당하는 사람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죄가 많아서 어떻게 천국을 가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죄가 많은 사람을 부르셔서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을 받고 영생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주신다는 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어 생명의 부활을 할 때 다 함께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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