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하는 것은 오직 너희니라

날짜 : 2014-11-23
본문 : 고린도후서 12:14~15

서론

우리교회 선교위원회에서 지원하고 있는 해외선교사는 108명이고, 국내선교사역으로 148개의 개척교회 목회자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1년에 한 번 있는 선교주일로 그들을 돕기 위해 선교헌금을 작정하는 날입니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은 헌금에 관해 설교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른 헌금생활은 목회자가 반드시 다뤄야 하는 중요한 영역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와 헌금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견해를 갖기도 하고, 심지어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고 싶지 않으면 내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구걸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고, 율법은 이미 오래전에 폐지되었는데, 왜 목사들은 계속해서 십일조에 대해 설교를 하느냐?”고 따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냈으면 됐지, 왜 선교헌금은 따로 내야 하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헌금을 내야하는 이유와 헌금 내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유”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찾아 십일조와 헌금의 원리를 살펴보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한 심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Ⅰ. 구약성경에 나타난 십일조의 원리
 
구약성경에 십일조에 관한 교훈이 여러 차례 나오지만,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창세기 14장 17~20절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소돔과 고모라 주변의 네 왕들이 연합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들은 재물을 빼앗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 가운데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평소 자기 집에서 군사훈련을 시킨 318명을 데리고 밤에 적진에 쳐들어가 빼앗긴 재물과 포로된 사람들을 모두 되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돌아올 때에 신비한 인물을 한 사람 만나게 되는데, 그는 살렘 왕 멜기세덱이었습니다. 여기서 ‘살렘’은 ‘평강’이라는 뜻이고,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의의 왕, 평강의 왕이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멜기세덱은 매우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평강의 왕이시면서 의의 왕이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하였습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함에 대해서 시비 거는 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제사장이 될 수 있느냐?”며 힐문하였습니다. 응당 제사장이 되려면 레위지파 출신의 사람이어야 하는데, 유다지파 출신인 예수가 어떻게 제사장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레위지파의 제사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레위지파보다 더 높은 멜기세덱의 반차(반열)를 좇은 제사장이 계신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논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멜기세덱은 구약성경에 나타나신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통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디에서 십일조를 배웠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이 승리와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보상의 의미나, 거래의 목적으로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이미 베풀어 주신 복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십일조가 기록된 것이 창세기 28장 22절입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이 형 에서를 속여 복을 가로채고, 형 에서의 진노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먼 길이라 하룻밤을 벧엘에서 노숙하게 되었는데, 길에서 돌 베게를 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하늘과 땅 사이에 사닥다리가 놓이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사닥다리 꼭대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세 가지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땅을 네게 주고,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할 것이며,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를 보호하겠다”는 땅의 복, 자손의 복,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의 복을 약속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잠에서 깨어 “두렵도다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 하며, 이곳을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베게 했던 돌에 기름을 부어 서원하였습니다. 이 돌로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며,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십일조에 대해 배웠을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베풀어 주신 복에 대해 감사하고 경배하며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말로 만이 아니라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를 통해서도 표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이고, 예배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기록된 것은 모세의 율법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제정되면서 십일조는 이스라엘 법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레위기 27장 30절은 십일조의 대원리입니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또 신명기 14장 22절에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제정된 십일조는 세 가지 용도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첫째,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을 ‘주의 십일조’(Lord’s Tithes)라고 합니다. 민수기 18장 21절에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낸 십일조를 가지고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면 왜 레위인들만 십일조를 받습니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파별로 땅을 분배할 때, 하나님께 헌신된 레위지파 사람들만 땅을 분배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절기 십일조’(Festival Tithes)입니다. 절기 십일조는 절기 예배를 위한 경비로 사용되었습니다. 신명기 14장 23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년에 세 번,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먹거리를 사기 위한 돈이 필요하고, 짐승을 사기 위해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그 때 내는 절기 십일조는 예배를 드리는 자신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사거나 집이 멀어 제물을 가지고 오기 힘든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먹고 마시며 제물을 구입하는데 사용된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절기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는 이유는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우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이유는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할 때도 십일조 드리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드리며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구제 십일조’(Poor Tithes)입니다. 신명기 14장 24~28절에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먹여 배부르게 하기 위해 드리는 헌금이 구제 십일조입니다. 매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삼년에 한 번씩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 모세의 율법으로 제정된 십일조는 따지고 보면 소득의 10%가 훨씬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십일조와 절기 십일조, 그리고 구제 십일조를 합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소득의 23% 이상의 헌금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기꺼이 드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성경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14장 29절 후반에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범사에 복을 받는데, 사업도 잘 되게 하시고, 자식도 잘 되고, 가정에도 좋은 일이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말라기 3장 10~12절에는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복이 구체적으로 확증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구약의 십일조는 율법 이전에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다 모세의 시대에 와서 율법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는 십일조 제도가 폐지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를 지지하시고, 십일조 드리는 자들을 칭찬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신정통치 국가였기 때문에 구약의 십일조가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국가에 내는 세금이 아니었습니다. 십일조는 철두철미하게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서 쓰였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레위인과 절기, 그리고 구제를 위해 쓰인 것입니다. 목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종교적인 것이었고,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일조는 국가 세금이므로 이제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어졌다는 주장은 허망한 논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너희가 왕을 세우면 왕이 너희에게 정치, 군사,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요구할 텐데 그래도 좋겠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그래도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와 왕을 위한 세금은 따로 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국가 세금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십일조는 어떤 사람이 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내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기 싫어하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복을 가지고 구걸하지 않으십니다. 십일조를 내기 싫으면 내지 않으면 됩니다. 어떻게 십일조를 억지로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배하기 싫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십일조를 내는 것은 이를 통해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후손들 역시 이 원리를 배우기 원한다는 예배행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예배가 더욱 발전되기 원하고, 주변의 약한 자들이 도움받기를 원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Ⅱ. 신약성경에 나타난 십일조와 헌금의 원리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서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없다든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십일조 제도를 인정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다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십일조를 드리되 그 근본 목적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책망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율법의 근본 정신인 의와 인과 신은 버리고, 하나님께 위선적인 자세로 보상을 바라며, 장사치의 모습으로 십일조를 내는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근본목적은 신약 시대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누가복음 18장 9~14절에는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자랑한 반면, 세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리새인의 기도는 물리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교만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드린 십일조 자체를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려도 그 마음속에 참된 믿음과 겸손함이 없는 바리새인의 위선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를 부인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율법 이전에 존재하다가 율법에 편입되었고,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가장 많은 지면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는 십일조나 헌금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기록해 놓았는데,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연보’입니다. 헬라어로 ‘율로기아’라고 하는데, ‘유’는 ‘좋다’는 의미요, ‘로기아’는 ‘복을 베푼다’는 의미입니다. 즉 ‘연보’는 ‘남에게 복을 베푸는 행위’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2절에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익을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었다가 매 주일 첫날, 즉 주일에 헌금을 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2~3절에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연보를 힘대로 하고, 힘에 지나도록 하고, 가난해도 하고, 환란이 와도 하고,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십일조보다 적은 액수일까요? 많은 액수일까요?
바울이 십일조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 뿐, 헌금생활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교육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헌금을 가르쳤습니다. 당장 입에 들어갈 빵 한 조각 없는 사람들에게도 헌금을 가르쳤습니다.
역사적으로 십일조와 헌금을 제대로 가르친 나라는 거의 모두 경제적인 부요를 누렸습니다. 유명한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훌륭한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요지는 “십일조를 내고 헌금을 낸 개신교 국가는 모두 부요하게 되었다”입니다. 경제 강대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글은 역사가 입증해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기독교가 들어오고 난 후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 헌금 생활을 하면서 학교와 병원,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어떤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잘 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을 세운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헌신된 백성들에게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9장 6~7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시면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색한 마음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되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것이 바로 헌금의 원리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10절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심을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해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다고 생각하지만 농사할 때 심을 씨를 누가 주십니까? 심을 씨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을 씨를 주셔서 심어 거두게 하시고, 그 거둔 복에서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중에는 때로 헌금을 하고 싶어도 정말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 나는 헌금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고린도후서 9장 10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심을 씨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은 구약에 비해 비교적 적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가르침이 십일조 원리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Ⅲ. 구약과 신약의 헌금 원리가 다른 이유

교회의 예표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교의 방법은 구약과 신약이 서로 같지 않습니다. 선교학자들이 구약의 선교는 ‘구심적 선교’(Centripetal Mission)라고 합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달라서 자기들끼리 모여 예배하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보존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만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주실 것을 받을 준비만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예배하면 되고, 굳이 이방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십일조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는 제사를 위해서만 사용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선교는 구약의 선교와 개념이 같지 않습니다. 신약의 선교는 ‘원심적 선교’(Centrifugal Mission)라고 합니다. 신약의 교회는 이방인들에게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내적으로 교회를 유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내적으로는 교회를 유지하고 부흥시켜야 함과 동시에 외적으로는 이방인들을 향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게 된 것입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맡기신 지상 명령은 “가서 내가 너희에게 명하고 분부한 그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반드시 선교를 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선교 1등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먹고 쓰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그것은 클럽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신약의 교회는 교회를 유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해외 선교를 힘써야 하기 때문에 십일조 이외에 선교헌금이 추가되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신약에서 십일조는 ‘이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최소한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나는 십일조를 드리기 때문에 의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십일조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신약 교회의 헌금생활은 사실상 십일조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눅 3:11).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눅 18:22).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행 4:34~35).

결론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12장 24절에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가 가진 돈이 아니다. 너희의 영혼 자체를 구한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였습니다.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고린도교회로 오려는 것은 성도들의 돈을 뜯어내려는 것이라고 아주 악한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 선생들로, 바울에게 악의를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 성도들을 향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너희가 가진 돈이 아니라 너희의 영혼 자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너희 영혼이 바르게 되는 일이라면 나는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후 12:15). 바울은 재물보다 영혼이 중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우리 각자의 영혼을 위해서도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또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도 유익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초창기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자비량으로 학교를 세우기도 했고, 병원을 세웠으며, 교회도 세웠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헌신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치료도 받을 수 있었으며,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을 받았으니 나 몰라라 한다면 그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마가복음 8장 3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지옥으로 향해가는 사람이 통계상 약 23만 명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23만 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내 재물은 내 것이니, 내 자식들과 나의 안락을 위해서만 쓰겠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드린 헌금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지옥 갈 영혼들이 구원을 얻어 천국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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