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이 위대한 질문은 빌립보교회에서 나오게 된 질문입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의 첫 성으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첫 번째 도시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기도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3~14절에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빌립보교회 성도이며 자주장사였던 루디아가 기도처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6장 16절에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 귀신을 내쫓고 구원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점치는 여종을 부리며 먹고 살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옷이 벗겨지고 매를 맞았을 뿐만 아니라 착고에 매여 빌립보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그 감옥을 일반적인 옥이 아니라 ‘깊은 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하여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행 16:25). 이 짧은 한 장에 기도와 관련된 구절이 세 번씩이나 나오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빌립보교회는 기도로 세워진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밤 12시에 빌립보감옥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한 내용은 우리를 살려주시거나 옥에서 나가게 해 주시도록 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영혼이 나오게 해 주시도록 간구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실라의 기도를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자 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모두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수들에게 매였던 착고가 모두 풀리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간수가 자다 말고 잠자리가 흔들리니까 웬일인가 싶어 일어나 보니 옥문이 다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 내가 맡고 있던 죄수들이 모두 도망갔구나!”, “나는 책임을 다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검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는데, 감옥에 그대로 앉아 있던 바울이 크게 소리쳤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행 16:28).
바울과 실라는 묶였던 것들이 다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그대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간수가 그 소리를 듣고 등불을 가지고 감옥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죄수들이 그대로 다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빌립보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으며, 인류를 대표해서 이 위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0). “What must I do to be saved?”(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중요한 질문이 여기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빌립보 간수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에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기록되어 있고, 사도행전 2장 37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What shall we do?”(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도행전 22장 10절에 다메섹 도상에서 다소의 사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What shall I do, Lord?”(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위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빌립보 간수는 왜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일까요?
Ⅰ. 이 질문이 나오게 된 이유
성경에는 이 질문을 했던 간수에 대한 정보가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이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빌립보 간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빌립보는 로마의 직할시였기에 로마제국에 소속된 공무원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사람은 정직하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옥문이 열려서 자기가 맡은 죄인들이 도망가 버리는 상황이라면 나도 같이 도망가자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검을 빼서 자결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도 자기 혼자 믿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을 데려다가 예수님을 믿게 한 것을 볼 때, 그는 매우 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악한 사람도 아니었고, 세상에서 멸시받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부정직하고 무책임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모두 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죄수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여기에서 역사하고 계시는구나!”하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이 현장에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 나는 구원받지 못한 존재다! 저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지만, 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로다! 나는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로구나!”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첫째로 죄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죄 용서받는 것 자체가 스스로 자기 죄를 용서하고 말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죄인이 스스로 자기 죄를 용서합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5장 20절에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침상에 실려온 중풍병자를 보시고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는 오직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만 소유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무슨 노력을 한다 해도 자기 죄를 스스로 사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둘째로 구원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는 것입니다. 천국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100%의 완전한 의를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0.0001%의 죄를 가지고 있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죄가 호리만큼만 있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빌립보 간수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갈만한 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천국에 들어갈 만한 완전한 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로마서 3장 26절에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누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의를 전가시켜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인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아무리 노력해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셋째로 구원은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듭남’, 또는 ‘중생’(Regeneration)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스스로 살아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스스로 살아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명령이 있어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죽은 지 사흘이 지났어도 염을 한 베를 입고 있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역사하시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거듭났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코 스스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화친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력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6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 속에도 그 증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엘리야라고도 하고 침례 요한이라고도 하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기 전에는 누구도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시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자연 상태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간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가장 위대한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Ⅱ. 이 질문의 의미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이 질문은 “내가 이 지진에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정도의 질문이 아닙니다. 지진은 이미 끝났습니다.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빌립보 간수라는 이 직업을 잃지 않겠습니까?”라고 사회적인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실라는 감옥 속에 그대로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영적인 구원과 관련된 질문임이 확실합니다. 내 영혼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묻고 있는 대단히 영적인 질문입니다.
빌립보 간수는 자기 영혼의 가치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영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목숨’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원래 ‘영혼’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어 재산이 수천 조에 이른다 해도 자기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수의에 여비를 넣어 가지고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천국에는 용돈이 필요 없습니다. 수천 조를 가지고, 천하를 얻었어도 영혼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영영한 고통을 당할 것이기에 그 인생은 불쌍하고 가련한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육신은 영혼이 살고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료가 흙이라 흙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경은 이를 ‘장막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영혼이 육신 속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본체는 육신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이 육신은 집에 불과하기에 아무리 뜯어 고치고 페인트칠을 해봐야 때가 되면 다 썩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육신은 무너질 장막집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4장 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떡만 먹고 육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먹고 영혼이 건강해야 합니다. 영혼이 생명의 본체이고 영혼이 중요한 것입니다.
빌립보 간수는 지금 자기 육신을 위험에서 구원하고자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영혼을 영원한 멸망의 위험으로부터 구원하고자 질문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영혼의 위험을 느꼈습니다. 이 영혼의 위험이 얼마나 긴박하고 현실적이었던지 지금이라도 죽으면 자기 영혼이 곧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져 고통 받을 것처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등불을 달라고 해서 감옥 속으로 뛰어 들어가 죄수로 감금한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를 감옥 밖으로 모시고 나와서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빌립보 간수는 체면을 버렸습니다. 간수가 죄수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내가 간수인데, 어찌 죄수들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만함도 버렸습니다. 당면한 현실적인 위험 앞에서 더 이상 체면을 지키거나 사회적 지위를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이 까짓 체면 정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의 형벌이라는 엄청난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긴박한 영혼의 위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빌립보 간수에게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너는 나와 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 “네 영혼은 구원받지 못했다!”, “너는 이 지금 이 상태로 죽으면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다!”, “그래도 네가 체면과 교만심을 지키고 있겠느냐?” 하나님은 빌립보 간수에게 이런 질문과 각성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바울과 실라는 명명백백한 대답을 주었습니다.
Ⅲ. 이 질문에 대한 대답
그들의 대답은 사도행전 16장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얼마나 명쾌한 대답입니까? 가장 위대한 질문에 가장 위대하고 명백한 대답이 나온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각자 대답했지만, 내용이 같았습니다.
죄인들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구원해 주실 구세주가 누구신지를 똑바로 알아야 됩니다. 죄인을 구원할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이외에는 죄인을 구원할 구세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죗값을 대신 갚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는 우리 모든 죄인들은 구원자를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구원자를 바르게 찾아가야 합니다.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사람은 세 가지를 잘 해야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첫째, 자신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에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만하면 됐다. 나는 괜찮은 의인이다. 나는 그래도 지금까지 남들 열 번 도둑질할 때, 한 번 밖에 안 했다. 남은 백보를 도망갔어도 나는 오십 보밖에 도망가지 않았다”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일평생 교회를 다녀도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14절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의로운 존재라고 자랑만 늘어놓은 반면, 세리는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남의 것을 착취하고 괴롭힌 사실을 회개한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은 구원받지 못했지만 세리는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구원받은 기쁨을 가지고 성전을 내려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간수가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은 이유 역시 스스로 “나는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2절에도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좌우편에 강도가 있었습니다. 한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비난했지만, 또 다른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한 것을 예수님이 들으시고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확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는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더니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께 자기 영혼을 부탁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주 수지맞았습니다. 그는 천국에 들어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 한마디가 그를 천국으로 가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서에는 예수님께 구해서 받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구했을 때, 눈을 떠 보게 되었습니다. 한센병자도 깨끗케 되기를 구했을 때,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은 죄와 지옥과 마귀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간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빌립보 간수의 질문은 “나를 구원해 주소서!”(Lord, Save me!)라는 간구와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을 맡기고 의지하겠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의 영혼을 멸망에서 구원할 권세가 있음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리 죄가 커도 모든 죄를 다 용서받습니다. 현재, 과거,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지옥에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죗값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용서받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함입니다. 죄로 인해 인생이 망가지고 비참해졌다면 꼭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천국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의로 옷 입혀 주십니다. 천국에 합당한 의의 예복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친한 관계가 되어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시고 영영토록 우리 인생 가운데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장막집이 무너져도 영혼은 살아서 새로운 육신을 입고 부활하여 영원토록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복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시고, 하나님께 구원해 주시도록 간구하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겠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빌립보 간수는 온 가족을 불러다가 그 날 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의 상처를 닦아주고, 함께 음식을 나누며 온 집안에 임한 큰 기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간수와 그 온 가족은 빌립보교회의 큰 일꾼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새생명초청잔치를 맞이하여 초대를 받아 나온 모든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고 모두 빌립보 간수처럼 예수님을 믿으시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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