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창세기 1~11장은 이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하늘과 땅, 인간을 포함해서 이 세상은 어디에서 기원되었는지, 인간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죄는 어디에서 왔는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종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국가는 어떻게 형성 되었는지, 복음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모든 것의 기원을 말해주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에, 마귀는 이 부분을 신화나 가설이라며 집중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는 참으로 귀한 내용이 담겨있고,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할 확실한 진리인 것입니다.
12~50장까지는 네 명의 족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그리고 50장에 기록된 요셉의 사망으로 창세기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것으로 시작되어, 50장의 사망에 대한 내용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요셉 인생의 후반부는 매우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창세기 50장 22~23절에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자식을 낳고 손자와 증손자, 고손자, 현손자를 보았고, 그들을 자기 슬하에서 양육하였습니다. 생각 만해도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손자를 보는 것이 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복의 개념이 좀 바뀌었습니다마는 구약성경에서 복의 상징은 손자입니다. 잠언 17장 6절에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잘 되는 것이 영화가 되고,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 됩니다. 그래서 손자가 많이 있으면 여러 면류관을 쓰고 다니는 격입니다. 저는 이제 손녀가 하나 생겼는데, 지금도 손주만 생각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요셉은 110세에 죽었습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110세를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수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10세 이전에 죽으면 좀 아쉽고, 110세를 넘기면 오래 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상적인 인간의 수명을 110세로 보았는데 요셉도 110세에 죽었고, 여호수아도 110세에 죽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면 그는 17세에 노예가 되어 13년 동안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노예 생활뿐만 아니라 감옥 생활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의 시간을 지나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10세에 죽을 때까지 애굽의 총리노릇을 했으니, 80년의 세월을 총리로 봉직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총리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총리가 되어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애굽 총리는 바로가 임명하고 신임하는 이상 죽을 때까지 총리를 하였습니다. 13년을 고생하고 80년을 총리로 일하게 되었다면 이 일은 할 만한 일인 것입니다. 요셉은 80년 동안 총리로 일하면서 권력과 부요를 누리고 바로 왕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두려워할 사람이 없는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13년 동안 고생하게 하셨지만 80년 동안 애굽의 총리로 살도록 보상해 주셨으니, 하나님이 요셉의 고난에 대해 엄청난 보상을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고생한 사람에 대해서는 넘치도록 보상해 주시는 ‘보상의 하나님’(God of Compensation)이십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욥이 젊은 시절에 잠깐 동안 고생을 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재산, 자식, 건강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러나 욥이 그 모든 고난의 시간동안 입술을 지키고 믿음을 지켰더니, 후에 하나님이 그를 칭찬하시고 보상해 주셨습니다. 욥기 42장 10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0명의 자식을 잃었기에 10명의 자식을 주셨는데 세 명의 딸과 일곱 명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 딸들은 전국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만일 그곳에서도 미스코리아대회가 열렸다면 언니가 진, 둘째가 선, 막내가 미였을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보상입니다. 그리고 욥은 140세까지 사는 장수의 복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잠깐 고생을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고생에 대해서 엄청난 보상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때로는 고생과 슬픔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생도 하고 슬퍼보기도 하고 괴로워 울면서 기도도 해 봐야 인생과 하나님을 배우는 시간이 되는 것이고, 또 그 고생 중에도 믿음을 지켜 나가게 되면 하나님의 보상도 만 배, 억 배로 돌려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모든 고생과 슬픔을 다 보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요셉의 사망에 대한 본문을 살펴보며 세 부분(요셉의 현실, 요셉의 소망, 요셉의 믿음)으로 나누어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50장 24절에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이제 죽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당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에게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에 그는 자기 해골을 애굽에 묻지 말고 출애굽을 하게 되는 그 날 반드시 나의 해골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갈 것을 맹세시켰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믿음입니다.
Ⅰ. 요셉이 당한 현실
요셉은 24절에 “나는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다 똑같은 말을 해야 할 때가 오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꼭 말하지 않을 지라도 결국은 현실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애굽에서 입관되는 것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창세기는 모두 5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처음 1장과 2장은 생명력이 넘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생명체로 가득 채우시고,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이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만 합격하면 영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온통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계속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50장은 요셉이 애굽에서 관에 들어갔더라(He was put in a coffin in Egypt.)는 내용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으로 시작해서 사망으로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시작과 끝의 분위기가 왜 이렇게 다를까요? 왜 영생할 수 있었고, 소망이 있었던 존재인 인간이 관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인간은 왜 죽어야만 하는 걸까요? 왜 인간은 늙어야만 하는 걸까요? 30대의 나이로 계속 영생을 누리면 안 되는 건가요? 왜 인간은 늙고 병들고 고생하고 재난을 당해야 하며, 태풍과 토네이도는 왜 부는 것이며, 쓰나미와 에볼라는 또 무엇입니까? 왜 결국 인간의 인생은 이러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수많은 철학자와 종교인들이 이것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보았지만 이렇다 할 대답을 내 놓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창세기 3장에만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위반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한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대답입니다.
죄는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마귀를 통해서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 창세기 3장의 대답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과 사망의 원인은 죄에 있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창세기 3장만 잘 읽어도 세상 모든 철학자의 지혜를 합친 것보다 더욱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셉의 죽음을 통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의롭고 훌륭하게 산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 위대한 족장들도 많은 실수를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치사한 짓을 했고, 야곱도 남을 속이고 사기를 쳤던 사람입니다. 또한 다윗과 같은 인물도 많은 허물이 있었고, 당대의 의인이라고 불린 노아도 술을 마시고 나체로 잠들었다가 자기 아들인 함을 저주받은 인생이 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허물이나 실수, 죄가 단 한 가지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행위로 천국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라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가 죽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셉도 결국 애굽에서 입관되는 것으로 생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혹 “나는 죄인 아닙니다!”라고 주장하는 분이 계시다면, 돌아가시지 않고, 늙지 않으시면 그 주장을 믿어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도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요셉도 이 피할 수 없는 위대한 진리를 현실로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물론 불신자도 죽음이 끝이 아니지만 죽어봐야 더욱 좋지 않은 것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비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죽음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성경은 창세기로 끝나고 그 다음 출애굽기 이상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책의 분량이 줄어 얇아서 좋고, 읽기 편해서 좋겠지만 그러나 구원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이어 출애굽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소망스러운 일입니까? 출애굽을 통해서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신약성경에는 성도의 죽음을 ‘별세’라고 말합니다. 일찍이 이중표 목사님이 ‘별세의 신학’을 강조하신 바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31절을 보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 (눅 9:31). 여기서 ‘별세’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가 ‘ἔξοδος’(엑소더스)입니다. 그러므로 별세가 출애굽인데, 출애굽이 절망스러운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은 소망스러운 일입니다. 애굽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출애굽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15절에도 베드로가 자신의 죽음을 출애굽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벧후 1:15). 베드로는 ‘나의 죽은 후에라도’라고 말하지 않고 ‘나의 떠난 후에라도’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떠난다’는 의미의 헬라어 단어로 ‘ἔξοδος’가 사용되었습니다. ‘ἔξοδος’(엑소더스)는 두 단어의 합성어인데, 접두사 ‘εκ’는 영어의 ‘out’을 의미하고, 뒤에 ‘ὁδος’는 영어의 ‘way’라는 의미로, ‘ἔξοδος’는 ‘Way out’, 즉 ‘나가는 길’, ‘벗어나는 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셉은 죽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벗어나는 길이 있음을 말해주는 책이 출애굽기(Exodus)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죽음을 벗어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출애굽기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다음에 나오는 출애굽기 이후부터의 중요한 주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더 좋은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늙거나 병들거나 아프거나 죽음이 다가오는 현실이 있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마시고 더 큰 소망을 갖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Ⅱ. 요셉의 소망
24절에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죽을 때가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우리를 애굽 땅에서 건져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셔서 반드시 너희에게 방문하실 날이 온다. 그 날이 오면 너희들을 애굽에서 건져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다”
시편 102편 26~27절에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는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신명기 33장 27절에도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의 피난처가 될 것이다(Eternal God will be your refuge). 사람은 죽고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계속 바뀔지라도 하나님은 영원토록 죽지 아니하시고, 바뀌지도 아니하시며,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요셉은 이 영원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문하실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리라’는 부분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God will surely visit you.”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이 방문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방문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서 출애굽(Exodus)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요셉의 소망이 헛된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맹세로 약속하신 내용에 근거한 소망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3~14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자손은 400년 간 애굽에서 종이 될 것이지만 내가 그 애굽을 징치하고 그 백성을 다시 애굽에서 이끌어 낼 것이라는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약속하신 것을 요셉이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46장 3~4절에도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에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는데, 요셉은 그것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창 46:3~4).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방문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을 확실히 소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출애굽은 BC 1446년에 일어났습니다. 야곱이 70명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온 것은 그로부터 430년 전이기 때문에 BC 1876년입니다. 야곱이 내려올 당시 요셉의 나이는 39세였고, 요셉이 110세에 죽었으니 하나님이 방문하실 것이라고 말한 때는 아직 354년이 남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확신하는 것입니다. 354년이 지나면 하나님이 너희를 방문하시고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요셉은 말씀에 근거를 둔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소망대로 요셉이 죽은 뒤 354년 후에 그들을 방문해 주셨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모세를 통한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3장 16~17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출 3:16~17).
4장 29~31절에도 하나님이 방문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출 4:29~31). 여기 기록된 ‘권고하셨다’, ‘돌아보셨다’는 의미의 동사는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파카드’라는 동사인데, ‘방문하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문하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소망은 정확히 354년 후에 모세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소망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산 소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의 육신이 죽었더라도 생명의 부활을 통해 영생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방문하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Ⅲ. 요셉의 믿음
25절에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자손들에게 맹세를 시켰습니다.
장례식의 중요한 절차가운데 입관, 발인, 하관이 있습니다. 입관은 시신을 관 속에 넣는 것이고, 발인은 하관하는 장소로 떠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관은 관을 땅 속에 묻는 것입니다. 하관을 하면 인간의 시신은 썩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몸에다 향재료를 넣고 자신의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이것은 입관만 하고 하관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반드시 나의 해골을 가지고 올라가서 가나안 땅에 하관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지금 300여년이 지나면 하나님이 방문하실 테니 그 때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서 하관을 하라고 자손들에게 맹세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셉은 자기 아버지처럼 가나안 땅 헤브론 막벨라 굴에 하관을 하라고 요청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요셉이 애굽 사람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애굽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인이고 국가적인 영웅입니다. 그런 영웅이 가나안 땅에 가서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면 국민들이 이를 허용할 리가 없습니다. 반드시 국장으로 치러야 하고, 70일 동안 애곡을 해야 하는 애굽 사람들의 정서를 잘 알고 있다 보니 애굽에서 입관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큰 권력과 부요를 누렸고, 애굽에 마음을 두고 살아도 아무도 책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마음은 애굽에 있지 않았습니다. 애굽은 자신이 묻힐 땅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영웅들에 대해 기록된 히브리서 11장에는 요셉의 믿음이 최고조로 올라갔던 순간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히 11:22). 후일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출애굽이 있을 것이며 그 때에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고 했던 것이 요셉 생애의 최고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요셉이 꿈을 해석한 일이라든지, 형들을 용서한 일이 아니라 내 해골을 메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당부한 것이 요셉의 최고 믿음이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요셉의 해골은 과연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까요?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요셉의 해골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로부터 354년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을 할 때에 그가 맹세시킨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9절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요셉의 시신이 들은 관을 가지고 나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한 이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두 개의 박스를 가지고 다녔는데, 첫째는 율법의 두 돌비가 들어 있는 법궤였고, 둘째는 요셉의 해골이 들은 박스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법궤라는 단어와 관이라는 단어가 ‘아론’이라는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셉은 그 믿음대로 자신의 해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사망 사건은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망은 애굽을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애굽은 언제나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권력과 부요를 누려도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두고 살 곳이 못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애굽과 같은 세상을 벗어나면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은 ‘낙원’(Paradise)입니다.
결론
우리는 죽으면 낙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낙원은 원래 이 땅 에덴동산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영생할 수 있었지만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낙원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서사 시인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 창세기 3장을 중심으로 『실낙원(Paradise Lost)』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러나 낙원은 사라지거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장소가 옮겨진 것뿐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낙원이 하늘로 올라가 버린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에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은 강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으로 옮겨갔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4절에도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영혼이 낙원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낙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애굽과 같은 이 세상을 벗어나 하늘의 낙원으로 들어가는 출애굽(Exodus)인 것입니다.
저는 미국 남부 뉴올리언즈에서 5년 동안 공부를 했고, 또 1년은 버밍햄 알라바마에서 티칭을 해서 도합 6년을 미국 남부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들은 신분 때문에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신발을 신고 있는지 벗고 있는지만 보면 그의 신분을 금방 알 수 있었는데, 이 흑인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송가를 지었습니다. 이런 가사의 찬송이었습니다. “I got shoes, you got shoes, all of God's children got shoes to wear. When I get to Heaven gonna put on my shoes. I'm gonna walk all over God's Heaven. (나 신발 신었네! 너 신발 신었네! 우리 신발 신었네! 나는 천국에 가서 내 신을 신고 천국을 돌아다닐 것이네!)” 그들에게 천국은 신발을 신는 곳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신발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우리 성도들에게는 아름답고 기쁨이 있고 슬픔이 없고 고통이 없는 낙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하늘에 있던 낙원이 땅으로 내려옵니다. 하늘의 낙원이 땅으로 내려와서 이 땅이 낙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생하며 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늘 요셉의 관을 들고 다녔는데, 관이 계속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애굽은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방문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계속해서 요셉의 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관을 보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끝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사람은 죽지만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다!” “성도에게는 애굽과 같은 세상이 아니라 낙원과 같은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죽음(출애굽)을 통과하여 낙원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는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출애굽기 이후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이 대답하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예표로서, 신약성경은 실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만이 죄 사함을 받고 출애굽(Exodus) 이후에 낙원에 들어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낙원으로 들어갈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이 맹세하신 것이고 언약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이후로 요한계시록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데, 구약은 ‘오실 예수’, 신약은 ‘오신 예수’를 증거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한 사람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어 애굽 같은 이 세상을 살다가 출애굽하면 낙원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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