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사람의 인생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요셉이 17세에 노예로 팔려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셉이 총리가 될 것을 알았다면 형들이 그를 노예로 팔아먹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을 알았다면 어려서부터 요셉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요셉의 생애 가운데 일어난 것입니다.
창세기 37장에 요셉의 형들이 도단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심부름을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들이 양을 잘 치고 있는지 보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도단에 나타나니까 형들이 요셉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채색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들이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창 37:19~20). 요셉의 형들은 그를 잡아 죽이려고 했는데, 그 이유가 그가 꾼 꿈이 어떻게 될 것인지 한 번 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두 번이나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첫째는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을 향해서 절을 하는 꿈이었고, 둘째는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을 향해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두 번이나 꿈을 겹쳐 꾸게 하셨고, 요셉은 그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니 형들이 요셉의 꿈을 시기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요셉에게만 이런 꿈을 꾸게 하시는가?”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께 반항한 것입니다. 창세기 37장에 기록된 형들이 서로 나눈 대화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리라!”, “우리가 요셉을 죽이면 하나님이 과연 그 꿈을 이루실 수 있는가 한 번 보자!”
그러나 창세기 37장의 때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흐르고 어느덧 요셉은 57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40년 세월이 흐른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요셉의 형들에게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 꿈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희가 똑바로 보았느냐?”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뜻과 목적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잠언 21장 30절에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른 사람은 결코 형통할 수 없습니다. 욥기 9장 4절에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형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장자들까지 모두 다 죽고 군사들도 홍해에 빠져 몰살당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에 극심한 피해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거스른 요나 역시, 하나님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원수의 나라인 앗수르에는 갈 수 없다며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배 밑창에 들어갔지만 풍랑을 만나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는 그 누구도 형통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먹는 일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얼핏 보면 시기심이 가득한 형들의 분노를 견제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셉의 꿈이 그대로 실현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습니다.
시편 76편 10절에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분노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시편 76편의 시대적 배경은 앗수르 왕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했을 때입니다. 산헤립과 그의 군대장관 랍사게가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고 모독하였을 때, 히스기야 왕은 그저 주만 바라본다는 심정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하룻밤에 앗수르 군사 185,000명을 죽이시며 대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사람이 분을 품고 하나님을 대적해도 결국은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악함 가운데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그 어떤 악한 짓을 해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 덕택에 기근 중에도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아우 베냐민도 요셉 덕분에 17년 동안 굶어죽지 않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으로 이주한지 17년이 되던 해 아버지 야곱이 죽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셉의 형들에게 큰 근심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는 우리를 보살펴주었지만 이제 돌아가셨으니 못 다한 복수를 하지 않겠는가?”라는 근심이었습니다.
창세기 27장 41절에는 야곱의 형 에서가 했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창 27:41).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다 되었으니 아우 야곱을 죽일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는 아우를 죽일 수 없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우를 죽일 것이라는 에서의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가 그 말을 듣고 야곱을 그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례로 볼 때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자기들을 죽이지나 않을까하며 근심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의 형들이 해석한 인생의 원리와 요셉이 해석한 인생의 원리가 대립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Ⅰ. 요셉의 형들의 사건 해석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세 가지 행동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함께 모여서 의논을 하였습니다. 창세기 50장 15절에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들이 모여서 “혹시나 요셉이 우리에게 복수를 하지나 않을까?”하고 의논을 하였습니다. 이 논의는 분명한 사실(Fact)을 가지고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혹시’는 마귀에게 속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혹시나’ 하면서 대화를 나누면 그 자리는 마귀가 역사하는 현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에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해서 “혹시나 밖에 나가서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계속되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의부증이 됩니다. 반대로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해서 “혹시나 아내가 등산을 다녀온다고 했는데, 불륜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면 혹시나 하는 것이 의처증이 되어 큰 다툼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나’와 같은 정확하지 않은 의심을 품은 단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귀에게 속한 언어인 것입니다. 성도들도 모여서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혹시’는 하나님께 속한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혹시’하면서 염려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이미 용서했고, 지난 17년 동안 그들에게 최선의 사랑을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의 형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야, 돼지 한 마리 잘 키워서 잡아먹듯이 17년 동안 우리를 잘 키웠으니 이제는 잡아먹으려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의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이 아무 대가없이 자기들을 용서해주고 그동안 베풀어준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요셉의 진심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죄를 용서해 주시는 엄청난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왜 믿어야 합니까? 죄를 용서받기 위해 믿어야 하고 하나님과 원수처럼 지내던 사람이 하나님과 화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 가지,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복음이 너무 큰 사랑이기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너무 좋은 것이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It is to good to be true).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 이처럼 엄청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저 받아들이시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형들의 이런 반응에 눈물을 보였습니다. 참된 용서와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들의 영혼이 불쌍해서 울었던 것입니다. 첫째로 형들은 모여서 상상적인 가설을 가지고 헛된 의논을 하였습니다.
둘째로 형들은 요셉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16~17절에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사람(Messenger)을 보내며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라고 하면 될 것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하고, ‘우리의 죄’라고 하면 될 것을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라는 매우 복잡한 단어를 썼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복잡한 말을 쓴 이유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말이 간결하지 못하고 복잡한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거짓말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용서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할 말이 있었다면 직접 해도 될텐데 왜 굳이 이렇게 돌려서 이야기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들은 야곱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나 하는 가상의 일이 거짓말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이제 사람을 보낸 것만으로도 안 되니까 요셉을 직접 찾아와서 엎드려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18절에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이지만 말아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때 당신을 죽이지 않고 노예로 팔았으니, 죽이지는 말고 종으로 써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죗값으로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무릎을 꿇고 엎드린 것입니다.
요셉이 꾼 꿈이 무엇이었습니까? 형들에게 절을 받게 되리라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창세기 50장까지 요셉 앞에 도합 네 번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 42장 6절에 기록되어 있는 첫 번째 애굽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였고, 두 번째는 창세기 43장 26절에 두 번째 애굽을 방문하였을 때였으며, 세 번째는 창세기 44장 14절에 두 번째 양곡 얻어 돌아가는 길에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고 난 후 다시 애굽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창세기 50장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요셉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은 실현되었고, 또 실현되었으며, 계속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네 차례나 무릎을 꿇고 절하지 않았습니까? 요셉의 형들은 이런 사건들을 볼 때에 “하나님이 어린 시절 요셉에게 주신 꿈은 과연 진실로 실현되었구나!”하며 인정하고 마땅히 여겨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목적하신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로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렸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우 요셉에게 이렇게 큰 복을 주시고 높여주시니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졌어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의 사상과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고려해야 할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땅엣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것, 위엣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탁월한 사람들인 줄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위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땅엣 것을 대단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비중 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항상 위엣 것에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땅엣 것만 생각하면 수준이 그렇게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위엣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생각은 신령한 것으로 채워지는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저차원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인생을 해석하는 원리가 그들과 달랐습니다.
Ⅱ. 요셉의 인생 해석
형들의 태도에 대한 요셉의 반응 속에는 인생을 해석하는 그만의 원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먼저 두려워 말라고 그들을 안심을 시킵니다. 그리고 형들과 그의 가족들과 자식들을 책임지겠다고 말합니다. 요셉의 첫 번째 반응은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창 50:19). 요셉은 사람의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요셉 자신이 형들의 죄를 심판하는 심판관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관이시지, 내가 심판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심판의 하나님’(God of Judgement)이심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너무 높게 생각하였습니다. 요셉을 인간의 죄를 심판할 수 있는 심판권을 가진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너무 높이면 언제나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높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요셉은 항상 하나님을 높이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높이지도 않습니다. 요셉의 의식은 하나님을 높이는 의식입니다.
요셉은 사람의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고로 사람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국가적인 범죄나 시민적인 범죄에 관하여 국가라는 조직을 세워 그것으로 하여금 심판하게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판사나 검사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서 심판을 행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심판관이 된 것이 아닙니다. 판사도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판사나 검사가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심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인간의 심판과 비교할 수 없이 무거운 것입니다.
국가는 용서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국가는 심판하는 기관입니다. 국가가 범죄를 저지르도록 방임하고 죄인을 풀어주고 용서하면 그것은 대단한 월권입니다. 국가가 죄인을 다 풀어주면 간첩이나 강도가 판을 치고 돌아다닐 텐데 그러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억울한 일을 당해서 가해자를 고소했는데, 그 사람을 풀어주면 “국가가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고 피해자는 스스로 복수의 기회를 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힘없는 피해자는 돈을 주고 조폭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정의를 실현하지 아니하면 조직폭력배들이 활기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국가는 범죄자들을 용서하고 풀어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4절에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인은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의 물건을 도적질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그 사람을 용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징역을 받게 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라도 국가를 향해서 범죄자를 아무 근거 없이 용서하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시건방진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국가로 하여금 행하라고 하신 권한에 도전하고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심판이 미치지 않는 죄들도 있습니다.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죄, 신앙적인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35절에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수는 내 것이라”(Avenge is mine.)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국가가 심판하는 것은 몇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 되지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은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0:31).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사람은 속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당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당해야 할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당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심판이 두려운 사람은 속히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한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면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해를 받으면 복수심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수할 권한이 없습니다. 복수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시고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모든 것을 용서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효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해자를 심판하고자 한다면 자신만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시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원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수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용서하면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얹어 놓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롬 12:19~20). 이글거리는 연탄을 머리 위에 얹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얹어 놓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원수에 대한 심판 역시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형들이 지은 죄가 많지만 나는 형들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형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심판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요셉은 하나님을 ‘섭리의 하나님’(God of Providence)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섭리 신앙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인간의 생명을 보존해 주고, 인간의 삶을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존’(Preservation)과 ‘통치’(Government)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치면 ‘섭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섭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석할 수 있는 황금열쇠를 ‘섭리사관’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이 열쇠를 가지고 자기 인생의 사건을 해석하였습니다. 요셉은 이미 창세기 45장 7~8절에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섭리사관으로 인생을 해석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후손들을 세상에 두시려고 하나님께서 나를 미리 이곳에 보내셨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창세기 45장에서 섭리사관을 말했고, 50장에 다시 섭리사관을 말했습니다. 중요한 진리는 반복해서 고백하고, 반복해서 듣고, 반복해서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그 가족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행하시고자 하시는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존과 통치를 합하여 섭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극악무도한 짓을 해도 그것을 다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50장 20절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You thought of evil but God meant good”(당신들이 악을 생각했어도 하나님은 선을 생각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이 악한 짓을 도모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지만 그는 결국 돈에 눈이 멀어 은 삼십 개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먹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가룟 유다의 죄악 가운데서도 그로 인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심으로 속죄 사역을 완성시키는 선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악을 행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변화시켜 선이 되게 하신다는 위대한 섭리를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손해를 입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중상모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거나 복수심을 갖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그 모든 악을 바꾸어 내게 유익이 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섭리를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 섭리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God of Love)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21절에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 위에 사랑을 더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을 덧붙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용서 위에 사랑의 보너스를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남을 용서하고 그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3~14절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사랑을 더함으로써 요셉과 형들 사이의 틈이 메워지고, 형들 사이에도 서로 연합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
요셉은 형제들에게 위에 계신 하나님, 인간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아랫것만 바라보고 있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땅엣 것만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 요셉의 인생 해석의 원리였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신앙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손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왜 고난이 오고 슬픔이 오는지 우리는 그 원인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고난과 슬픔과 억울함을 바꾸어 선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보존해 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인생이 어려우나 하나님은 여전히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Life is hard, but God is good.” 인생은 어려우나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다. 우리는 인생이 어려워도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우리 삶에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으로 인도하시는 섭리의 하나님, 그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분을 보이는 것처럼 붙들고 살아가겠다는 신앙으로 전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