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장례

날짜 : 2014-07-27
본문 : 창세기 50:1~13

서론

창세기 1장과 50장을 비교해보면 1장은 시작이고, 50장은 마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늘과 땅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고, 창세기 50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으로 야곱이 죽음을 거쳐 들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은 ‘창조’를 의미하고, 창세기 50장은 ‘새 창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과 50장 사이에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고, 천국에 들어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이 구원의 스토리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지,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믿음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과정들이 모두 ‘씨앗’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창세기를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창세기는 역사가 아니라 신화에 불과하고, 전설과 같은 것이라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씨앗으로부터 잘라버리려는 마귀의 시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는 우리의 구원에 관한 모든 진리가 씨앗 형태로 존재하는 대단히 중요한 책입니다.
특별히 창세기 50장 1~13절은 야곱의 장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야곱의 장례식은 다른 어떤 사람의 장례식보다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장례식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대하는 요셉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요셉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이 일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했는지, 야곱의 장례식이 예표하고 있는 진리는 무엇인지에 대해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야곱의 장례를 대하는 요셉의 태도

야곱이 기운이 진하여 열조에게로 돌아간 이후 요셉이 두 가지 일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창세기 46장 4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고 하신 말씀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눈을 감기었습니다.
창세기 50장 1절에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돌아가신 아버지 시신의 얼굴에 울며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향한 마지막 사랑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지막까지 아버지에 대해서 자식이 존경과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부자지간에 이렇지 못한 가정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지금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최선의 경의와 존경과 사랑을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기는 했지만 절망적으로 몸부림을 치거나 처절하게 통곡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장례식에 슬픔이 없을 수는 없으나 처절하게 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죽음이란 영광으로 가는 관문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빈자리가 슬프기는 하지만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다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처절하게 슬퍼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 야곱의 영혼이 천국으로 갔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천국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고 믿어질 때, 후손들은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누가복음 16장 22절에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영혼이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 갔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죽으면 그 때에 육신은 흙으로 가지만 영혼은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을 가보셨습니까? 천국에 가는 길을 아십니까? 천국을 가려면 위로 가야 합니까? 아래로 가야 합니까?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와서 우리 성도의 영혼을 받들어 천국으로 길을 인도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하는 일 가운데 중요한 일은 성도가 죽었을 때 그 영혼을 받들어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영혼은 슬퍼할 일도 없고, 애곡할 일도 없고, 아픈 것도 없고, 절망할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는 복된 곳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요셉이 슬프기는 하지만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모셔온 이후 17년 동안 그를 극진히 섬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기 17년 전부터 요셉으로 인해 매우 호강하였습니다. 남들은 다 굶어죽는 위기였지만 그는 아들 덕에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야곱도 죽을 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을 마감했고, 요셉도 아버지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조금도 후회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 배운 시조가운데 정철의 시조가 있습니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를 다 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닯다 어찌하리 평생의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요셉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해서 섬겼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그렇게 큰 후회나 유감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40일 동안 향 재료를 넣게 하였습니다. 시신에 향 재료를 넣은 이유는 오랫동안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에 대해서도 최선의 존경심을 보인 것입니다. 향 재료를 넣은 후 삼베로 싸면 그것이 미라가 되는 것입니다. 미라가 되면 5,000년 전에 죽은 사람도 그 윤곽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썩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신에 대한 존경심을 의미합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시신이 이런 어려운 절차를 거치고 나면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신에 향 재료를 넣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아버지의 시신에 향 재료를 넣은 것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일단 시신이 오랫동안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70일 동안 애곡하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죽으면 72일을 애곡하게 되어 있었는데, 요셉의 아버지가 죽자 70일을 애곡하였습니다. 이것은 왕의 죽음을 애곡하는 기간보다 이틀이 모자란 애곡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명예스러운 장례식을 치른 것입니까? 야곱은 자식 하나 잘 둬서 애굽 백성들이 70일을 애곡하며 장례를 치러주고, 왕의 장례에 버금가는 국장으로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호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요셉의 태도는 존경과 사랑과 최선을 다하는 애정의 태도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모님의 장례를 대할 때에 아버지의 장례를 대했던 요셉의 태도를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는데 자식들이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것은 부모에 대한 예절이 아닙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장례에 대해서 최선의 태도를 가지고 최고의 존경을 보여주었습니다.

Ⅱ. 야곱의 장례를 치르는 요셉의 지혜

우리는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르는 요셉의 태도를 통해서 그의 놀라운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50장 2절에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일반적으로 장례식을 치를 때에 향 재료를 넣는 사람은 장의사입니다. 그 일은 의사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자로도 장의사의 ‘사’자는 ‘社’(모일 사)자를 쓰고, 의사는 ‘師’(스승 사)자를 씁니다. 이 둘은 우리말 발음이 거의 같지만 하는 일은 전혀 같지 않습니다. 장례식을 치를 때 향 재료를 넣는 일은 의사의 일이 아니라 장의사(Mortician)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수종 의사(His servant physician)로 하여금 향 재료를 넣게 하였습니다. 왜 요셉은 수종 의사에게 시켜서 향 재료를 아비의 시신에 넣게 하였을까요? 이것이 요셉의 지혜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시신을 미라로 만들 때, 반드시 시신에 넣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자의 서’(The Book of the Dead)라는 책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부적과 같은 것인데, 온갖 주문과 마술의 내용을 기록해서 죽은 사람이 사후 세계의 여러 가지 심판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책입니다. 애굽의 장의사들은 시신 안에 반드시 이것을 넣었습니다.
‘사자의 서’의 내용을 보면 사람이 죽은 이후 심판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심판은 사람의 심장 무게를 달아보는 심판입니다.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신의 깃털과 무게를 비교해서 그 무게가 신의 깃털보다 무거운 사람은 죄가 많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자의 서는 대단히 종교적인 부적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원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의사를 부르지 않고 수종 의사에게 향 재료를 넣게 하였던 것입니다. 의사는 의학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시신이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 향 재료를 넣는 것이지 어떤 종교적이고 이교신앙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향 재료를 넣되 불필요하게 애굽 사람들과 종교적인 문제로 마찰을 빚지 않도록 지혜롭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치룰 때, 많은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중요한 예배가 입관, 발인, 하관예배입니다. 그 중 하관예배는 시신을 땅에 묻으며 드리는 예배인데, 땅 속에 관을 두고 예배를 드린 후 취토를 하고 흙으로 덮습니다. 그런데 하관예배를 드릴 때, 일반적으로 관 뚜껑을 조금 열어둡니다. 그러면 가족들 가운데 불신자가 부적을 손에 쥐고 있다가 목사가 기도를 할 때, 급하게 내려가 그 구멍 사이로 부적을 넣고 올라오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 누군가는 부적을 넣지 못하도록 관을 지켜보고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기에 사자의 서와 같은 부적을 넣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야곱의 이름은 죽은 자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자의 책인 ‘생명책’(The Book of Life)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시신에 향 재료를 넣어도 불필요하게 마찰을 빚지 않으려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창세기 50장 4~5절에도 요셉의 지혜는 매우 돋보입니다.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청컨대 바로의 귀에 고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창 50:4~5). 여기에 요셉이 바로의 궁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아버지 부탁을 받고 가나안 땅에 올라가 장례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바로의 궁에서 이를 허락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요셉은 애굽의 총리입니다. 바로 왕을 뵙기 원하면 언제든 일대일로 독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폐하,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스스로 애굽의 총리라는 자기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간다는 것은 타국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외국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외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사항을 체크해야 하는 법적인 절차가 있는 것입니다. 여권도 필요하고, 도장도 찍어야 합니다. 요셉은 지금 총리의 신분으로,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공무원들을 무시하고 바로에게 직접 말하겠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일반 국민들이 외국으로 나갈 때 거쳐야 하는 것과 똑같은 절차를 공식적으로 밟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정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이고, 아버지의 특별한 부탁을 받아서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꼭 허락을 해 주셔야 합니다. 저는 가나안 땅에 갔다가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5절 후반에 “내가 다시 오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8절에 “어린 아이들과 양떼와 소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고센 땅에 남기고 가나안 땅에 갔던 것입니다.
제가 1986년도에 도미한 후 5년간 공부를 했는데, 당시만 해도 목사들은 미국 비자를 받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대사관에서 목사들의 말을 잘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돌아온다고 해 놓고 미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이후 미국 유학을 가야할 후배들이 비자 문제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저도 세 번이나 비자 발급이 거절되었는데, 두 번째 거절될 때 미국 영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 아내와 아이들을 한국에 두고 가면 비자를 발급해 주겠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당신네 국가에서는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서 공부합니까?” 그랬더니 세 번째는 비자를 발급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를 남겨놓고 간다는 것은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확실한 보장인 것입니다.
요셉은 정상적이고 공식적인 절차를 다 밟았을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돌아온다고 하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에 바로 왕 측에서 어떤 불필요한 오해나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참으로 지혜롭게 아랫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정상적인 절차를 밟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바로가 가로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비를 장사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의 말은 아주 명백합니다.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애매모호한 말이 아닙니다. 요셉은 지금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데 바로 왕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염려나 의심을 받지 않도록 일을 지혜롭게 처리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듯 큰일을 치르면서도 지혜롭게 일을 잘 처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 성도들은 뱀 같은 면도 있어야 하고 뱀 같지 않은 면도 있어야 합니다. 뱀 같은 면이라고 하면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고, 뱀 같지 않은 면이라는 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순결하고 온유한 비둘기 같은 성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했습니다.
사람이 성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꼭 대단한 학식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유학을 갔다 왔다고 해서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잘 생겼다고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성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Wisdom)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학벌이 좋지 못해도 성공합니다. 장사를 하면 매출이 크게 늘어납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엄청나게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의 성패는 지혜에 달려 있습니다. 지혜는 가지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17세에 노예가 되어 4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요셉도 이제 나이가 57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인생 중 가장 낮은 노예가 되었었고, 최고 높은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산전수전 공중전, 해상전, 지상전을 다 겪어 보면서 인생의 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꿈을 해석할 줄 아는 지혜가 산전수전을 겪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꾸짖지 않으시고 지혜를 넉넉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지혜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흑암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밝은 지혜입니다. 전자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남을 잘 속이고 거짓말을 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야 인생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소위 ‘정치 9단’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는 캄캄하고 더러운 지혜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지혜는 야고보서 3장 17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깨끗하고 화평하고 온순한 지혜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약 3:17). 우리는 날마다 기도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로 채워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요셉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Ⅲ. 야곱의 장례식이 예표하는 진리

애굽에서부터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 행렬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을 따라갔습니다. 7~8절에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9절에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모든 장로들과 바로 왕의 신하가 다 따라갔고, 온 집안 사람이 다 따라갔으며, 병거와 기병이 호위하는 어마어마한 행렬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요단강 근처에 아닷마당이라는 곳에 도착했다고 밝혀줍니다. 아닷이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타작마당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곳에 7일간 머물며 애곡하였습니다. 7일간 애곡을 하는 것은 장례절차를 따라 애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이 그 장엄한 모습을 보고 ‘아닷마당’이라는 곳을 ‘아벨미스라임’이라고 지명을 바꾸었습니다. ‘아벨’은 ‘애통’(Mourning)이라는 뜻이고, ‘미스라임’은 ‘이집트 사람들’(Egyptians)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벨미스라임은 ‘애굽 사람들의 애통’(The mourning the Egyptians)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아벨미스라임의 위치를 요단강 근처라고 했는데, 학자들은 요단강 동쪽인지, 서쪽인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 동쪽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해와 여리고의 중간쯤일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 장소는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지나간 경유지가 됩니다. 요셉은 아닷마당에서 7일간 애곡하고 아버지의 명을 따라서 막벨라 굴에 시신을 장사하였습니다. 막벨라 굴은 마므레에 있었고, 마므레는 헤브론의 북부지역이었습니다. 
여러분, 헤브론은 17세의 요셉이 노예로 팔리기 전에 살던 곳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헤브론을 40년 만에 와 보게 된 것입니다. 어릴 때 뛰어놀던 옛 동산에 온 것입니다. 어릴 때 본 큰 길은 어느 새 골목길이 되어 있었고, 그렇게 커 보이던 집도 오두막집이 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의 감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은상씨가 작사하고 홍난파씨가 작곡한 ‘내 놀던 옛 동산’이라는 곡은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료”라는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엄정행씨가 부른 노래를 매우 감동적으로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40년 만에 내 놀던 옛 동산에 오게 된 것입니다. 
요셉을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큰 무리가 애굽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큰 무리가 요셉을 따라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무엇을 예표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가깝게는 출애굽을 예표하는 것이고, 멀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허다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죄와 마귀의 지배를 벗어나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큰 무리가 되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앉아 예배하고 있는 우리들 가운데 이 무리에서 빠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창세기 50장의 예표가 실현된 것이 요한계시록 7장 9~10절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각 나라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결론

야곱은 이 땅에서 147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세상에 큰 유익을 준 인생이었습니다. 시편 12편 1절에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건한 자가 죽고, 충실한 자가 없어지는 것을 시편기자가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왜 경건한 자가 죽으면 애통해야 합니까? 그것은 경건하고 충실한 사람의 삶이 그만큼 인간사회에 많은 유익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한 사람이지만 얼마나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까? 그 아들 요셉을 통하여 애굽의 온 백성을 기근에서 살려내었고, 그의 넷째 아들 유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게 되어 온 세상에 엄청난 유익을 끼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하나님’이라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은 짧은 인생 살면서 실수도 많이 했고, 죄도 많이 지었습니다. 형을 속였고, 장자권을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에서의 잘못도 있는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망령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 사기꾼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이 사기 친 것을 ‘1’이라고 한다면, 그가 이 세상에 끼친 공헌은 ‘10,000’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로 사람을 평가할 때 그가 저지른 실수 ‘1’만 가지고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끼친 공헌 ‘10,000’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이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온 세상에 유익을 끼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온 세상에 악영향만 미치고 가는 인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온 세상에 많은 유익을 주고, 떠날 때에도 자식들에게 사랑을 받고, 떠난 후에는 우리의 영혼이 영적인 가나안 땅, 천국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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