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47세가 된 야곱은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첫째는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살아갈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창세기 48장 1절에 “이 일 후에 혹이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병이 들었고, 육신이 쇠하여졌습니다.
둘째로 야곱은 자신의 영혼이 떠날 때가 되었음을 감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7장 29절에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이라는 말이 영어성경에는 정관사 ‘The’가 붙어 ‘The time to die’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 각 사람에게 죽을 때를 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때가 되기 전까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를 넘길 수 없는 것입니다.
130세에 애굽으로 이주한 때부터 147세로 죽기 직전까지 17년의 세월이 야곱의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기근으로 굶어 죽어가며 고생했어도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고센 땅에서 산업을 얻었으며, 생육하고 번성하였습니다. 아주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야곱의 인생 후반부 17년 인생은 대단히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주석가는 이삭의 인생 후반부와 야곱의 인생 후반부를 비교하면서 이삭의 인생 후반부는 그의 인생 전반부에 비해 쓸쓸한 후반부였고, 야곱은 전반부가 괴로웠어도 인생의 후반부는 행복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까? 물론 다 행복해야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어차피 지나간 인생의 전반부가 행복했든 쓸쓸했든 관계없이, 이제부터 시작되는 인생의 후반부가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이제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두 가지 일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열 두 아들을 불러 놓고 개별적으로 축복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단순히 아버지로서 자식을 향한 소원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을 받은 예언자로서 예언의 메시지를 선포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축복을 한다고 했지만, 때로는 저주와 같은 말도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예언자로서 각각의 아들을 불러 놓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둘째로 야곱은 열 두 아들을 전부 다 모아 놓고 집단적으로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창세기 49장 29절에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자신의 아들 열두 명에게 전체적인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제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창 49:2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곱이 죽는다는 것을 ‘죽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야곱은 이제 내가 죽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는 내 백성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내 백성,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에 내가 함께 하려고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신을 묻을 장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창세기 23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은 400세겔을 주고 헷 사람으로부터 밭과 함께 동굴을 샀습니다. 그 밭이 마므레 앞에 있는 막벨라 밭이고 거기 있는 동굴이 막벨라 동굴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자신을 장사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운영하는 묘지 이름이 마므레 동산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야곱은 147세에 죽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정확성을 가지고 막벨라 동굴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치매가 없었고 정신이 또렷했습니다. 야곱은 평소에 자기가 돌아가서 묻힐 땅이 어디인가를 항상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막벨라 동굴에는 할아버지 아브라함, 할머니 사라, 아버지 이삭, 어머니 리브가가 묻혔고, 네 명의 아내 중 레아가 묻힌 곳입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은 막벨라 동굴에 묻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라헬은 베들레헴 근처 묘실에 묻혔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자신을 막벨라 동굴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였던 라헬이 묻힌 베들레헴 묘실에 묻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라헬과 그녀의 자식들만 아끼고 사랑했었는데, 죽을 때는 레아가 묻힌 열조의 묘실에 장사해 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인간적인 감정이나 애정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더욱 귀중히 여긴 참된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야곱이 “이제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했던 말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죽음을 대하는 야곱의 세 가지 자세를 살펴보며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Ⅰ. 야곱은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Assurance)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는 죽어봐야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 열조가 있는 천국에 분명히 들어갈 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일말의 여지를 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천국에 대한 매우 큰 확신입니다. 사람이 죽어봐야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전부 지옥에 갈 사람들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갈 줄로 확신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줄로 확신하고 계십니까?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가봐야 알지”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삼분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 이천 년 동안 훌륭한 학자 가운데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의 육신에서 영혼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 끊어지는 것이 사망인 것입니다.
육신은 흙집입니다. 이것은 흙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매장을 하든, 화장을 하든 흙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은 흙이 되어 먼지가 되지만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 두 곳으로 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죄 용서를 받고 영생을 받은 사람은 그 영혼이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지 못하고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 영혼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영혼은 육신을 떠나는 순간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육신에서 떠나는 순간 여러분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불행의 기준이 되십니다. 영원히 행복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고, 영원히 비참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2장 34절에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표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흥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거절하는 사람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순간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확신(Assurance)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된 근거는 무엇입니까? 믿음이라고 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근거 없는 확신은 맹신이고 미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도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자신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맹신이요, 미신입니다.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이 세상에 천국에 들어갈 만큼 착하게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처럼 착하지도 않은 사기꾼이 어떻게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확신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창세기 48장 16절 전반부에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건지신’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합니다. 신약에는 이 단어가 ‘구속’(Redeem)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구속’은 ‘속전을 내고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자’는 영어 알파벳 대문자로 시작되는 ‘Angel’입니다. 고로 피조물로 존재하는 천사가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Angel of the Lord), 즉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야곱은 자신의 영혼을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여호와의 사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야곱을 만나주시고 구속해 주셨기 때문에 죽어도 자기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언제 어디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분인데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살았던 야곱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그는 어디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야곱이 요셉에게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창 48:3~4). 가나안 땅의 ‘루스’는 ‘벧엘’의 원래 지명입니다. 야곱은 지금 요셉에게 벧엘에서 만났던 하나님을 회고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 쫓겨 도망자 신세가 되어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잘 때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창세기 28장 12~13절에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꿈을 꾼 내용인데, 이 꿈은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영적인 꿈이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닥다리였습니다. 사닥다리 아래쪽은 땅에 닿았고, 위쪽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하늘 문이 열리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야곱아, 내가 너에게 자손의 복을 주겠고, 땅의 복을 주겠고, 네가 어디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며 너를 보호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였습니다. 그러나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호세아 12장 4절에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다는 것은 죄인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소망없고, 공허하며, 허무하고, 쓸모없는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아 영생을 얻고, 소망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야곱이 본 사닥다리는 아래쪽이 땅에 닿았고, 위쪽이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였습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의 중보자로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본 사닥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 51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8장의 상황은 사닥다리가 있고 하나님의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고 하늘이 열리는 것이었고, 요한복음 1장에는 인자, 즉 “예수님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8장의 사닥다리는 ‘예표’이고, 요한복음 1장의 인자, 즉 예수 그리스도는 사닥다리의 ‘실체’인 것입니다. 사닥다리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예표가 확실합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사닥다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거룩하신 하나님과 땅의 죄악된 인간 사이에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야곱에게 하늘이 열리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닥다리로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닥다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닥다리는 짧은 사닥다리이며, 고장난 사닥다리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존재를 의존하고 있다면 죽을 때 영혼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제가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편협한 사고를 가지고 있을 수 있나?”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이지 결코 둘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존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사닥다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4:6).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경험이 있으십니까? 주일에 열심히 예배를 드리는 것은 천국에 갈 수 있는 보장이 될 수 없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이라야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경험이 있으시다면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영혼이 육신을 떠나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영혼이 새로운 육신을 입어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병들지 않는 육신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확신한 진리입니다.
이 몸은 고쳐도 흙집 이상일 수 없습니다. 흙집은 오래 쓰면 지붕(머리)도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게 되고, 창문(시력)도 시원찮아집니다. 또 맷돌(치아)은 많이 닳아서 잘 갈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가짜 맷돌을 끼우고 사는 것입니다. 기둥(다리)도 시원찮습니다. 전체적으로 흙집이 흔들흔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흙집을 고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흙집은 역시나 흙집입니다. 우리는 이 흙집에 영원히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부활의 그날이 되면 아름다운 육신을 입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죽는 그 순간에 육신을 떠나면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Ⅱ. 야곱은 천국에서 누리게 될 두 가지 ‘기대감’(Anticipation)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내 열조, 내 백성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은 절망의 순간이 아니라 소망과 기대감이 가득한 순간이 된 것입니다. 야곱이 죽음 이후에 만나게 될 내 열조라고 말한 사람들은 천국에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2절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모두 다 천국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 역시 모두 천국에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그 산 꼭대기에 잠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광경을 보고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같이 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가 예수님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모세와 엘리야가 천국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잠깐 보여준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그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순간 아버지 이삭도 만나게 되고,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만나게 되고, 아내 레아도 만나게 되고, 그리워하던 아내 라헬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야곱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만날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눈으로 뵌 적이 없었습니다. 사닥다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말씀을 들었을지라도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뵙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뵐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안으로 뵐 수 없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봤다고 하는데, 모두 거짓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갔을 때, 한 성당 내부의 천장에 그려져 있는 할아버지를 가리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하나님은 동네 할아버지가 아니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눈으로 뵐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제 죽으면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죽기 직전 침상에서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창 49:33).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죽어서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나님을 경배할 리가 있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경배하다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를 구원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곳이요,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영영토록 감사를 드리는 사은의 장소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가인 존 칼빈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훌륭한 학자였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칼빈을 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을 욕하는 사람은 이단이거나 성경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칼빈이 쓴 ‘기독교 강요’라는 책은 성경 다음으로 위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성경을 가장 탁월하게 연구한 사람이었고, 저는 칼빈의 가르침을 배우고 믿는 칼빈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존 칼빈이 1564년 55세의 나이로 죽을 때 자기의 시신을 공동묘지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묘비도 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칼빈의 장례를 맡은 위원회 서기가 칼빈의 임종에 대해 기록하기를 “그는 하나님께로 갔습니다”(He went to God)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만날 기대감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혈연이라고 해서 모두 야곱의 열조는 아닙니다. 그곳에서 이삭의 이복형인 이스마엘은 만날 수 없습니다. 야곱의 형인 에서도 만날 수 없습니다. 에서는 망령된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예배하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천국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Ⅲ.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Acceptance)
창세기 49장 33절에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발을 침상에 거두었다’는 말은 침대 밖으로 발을 내 놓고 있다가 발을 침대 안으로 들이고 가지런히 뻗었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지팡이에 의지해서 힘을 모아 말을 했지만, 이제는 더 할 말도 없고 할 일도 없기에 다리를 가지런히 뻗고 침상에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죽음을 담담하게 맞겠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을 많이 봅니다. 그 가운데 불신자들은 “돈, 명예, 권력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나는 속았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미국을 다녀오셨는지, “Why me?”(왜 나여야 합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시죠. “Why not you?”(왜 너는 안 된다고 하느냐?)
야곱은 이 땅에서 모든 고생과 수고를 마치고 영존하신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천국을 안식이라고 하고, 이 세상은 안식이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피곤하고 어렵고 고통이 있고 환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오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야곱은 우리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죄인입니다. 야곱은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더 나쁜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나 형을 상대로 사기 치거나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지는 않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죄인이 무엇을 가지고 천국을 가겠다고 확신을 하겠습니까? 그런 죄인이 어떻게 해서 인생의 후반부를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순간에 이처럼 천국 갈 확신을 가지고, 기대감을 가지고,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야곱이 사기꾼인 것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기꾼도 이렇게 큰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되었는데,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야곱이 아주 착한 사람이라 천국에 들어갈 갈 확신을 가지고 살았다면 우리는 자신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야곱이나 우리나 죄의 점수로 따지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나도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어떻게 해서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었나요? 그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야곱이 사기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여 주셨고, 그를 만나 주셨고, 사닥다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이 되게 해 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 주셨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고,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께 돌아가 경배할 수 있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해 주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Grace of God)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똑같은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은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인간이 가지고 있던 계급장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돈, 명예, 학위 이런 것들은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닥다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하늘 문이 열린 사람이 되었는가? 그렇지 못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분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사람이 없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족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행복한 노년기가 보내시다가 죽음의 때가 오면 확신(Assurance)과 기대감(Anticipation)으로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는(Acceptance)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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