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빛을 거부하지 말라

날짜 : 2014-04-27
본문 : 누가복음 20:1~8

서론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명칭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떡, 양의 문, 부활과 생명, 선한 목자와 같은 표현들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여러 가지 타이틀 가운데 제가 가장 사랑하는 명칭은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 영적인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어두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9장 5절에도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빛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모두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태어나서 어두움 가운데 살다가 끝내 빛을 찾지 못하면 영원한 어두움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이 너희 중에 있으며,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도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잘 알지 못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왜 사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으면 그냥 웃고 맙니다. 그들이 왜 웃습니까? 모르니까 웃는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입니다. 또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인생의 향방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두움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태어나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빛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영적인 빛을 거부하면 미래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심각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미래의 최후 심판 날에 하나님이 주신 빛을 거절한 사람은 영원한 어두움에 떨어져 영원히 그 가운데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을 거부하면 우리의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인 빛을 거부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심각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어두움 가운데 처해있기 때문에 인생을 허비하며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빛을 거절한 사람은 더욱 더 큰 어두움에 처하게 되고, 진리에서 더욱 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태어나 어두움 가운데 살다가 빛을 발견하지 못하면 영원한 어두움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빛 가운데 살게 하시고 이 땅을 떠나면 영원한 빛 가운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로 옮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18절에도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앞에 환히 비추시는 하늘로서 오신 빛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빛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빛을 거절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도전적인 질문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참으로 도전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1절에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예수님은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복된 소리’라는 의미이고, 영어로 ‘Good News’(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좋은 소식입니까? 복음이란 어두움에 처한 인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 39권이 오실 메시아로 예언하고 있는 바로 그 분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메시아는 사람을 죄와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주시고 지옥으로부터 건져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성전에서 설교하시는 예수님은 “내가 세상의 빛이며, 구약성경 39권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대단히 파워풀하고 능력 있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다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미워했지만 워낙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밀어낼 수 없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8절에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인기가 많으셨는지 누가복음 21장 37~38절을 보면 백성들이 아침마다 몰려와서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눅 21:37~38). 예수님은 파워풀한 설교로 인기가 많은 설교자였습니다. 영적인 빛이 사람들 앞에 환하게 비취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빛이 비취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두움을 싫어하는 사람은 어두움을 벗어나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어두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빛이 어두움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기 때문에 더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숨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의 빛을 비추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더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 빛을 소멸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도전적인 질문을 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의 책임자요, 서기관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신학자들이요, 장로들은 산헤드린 공의회를 맡고 있는 유대교의 최고 행정 책임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정치적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인기 때문에 그의 허물을 잡아 송사하여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강력한 빛을 비추시니 그 빛을 꺼버리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7절에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예수님의 빛을 꺼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악한 의도로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눅 20:2). 우리가 성전의 책임자들인데 허가도 받지 않고 성전에서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이 대제사장의 것입니까? 성전이 대제사장의 집입니까? 성전은 그들의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집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6절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가리켜 ‘내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예수님의 집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의 정치적인 특권을 움켜쥐고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환전상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습니다. 가령 1달러가 천원이면, 성전 내에서는 2천원을 받게 하고 그 이익금을 나누어 뇌물로 챙겼습니다. 그리고 비둘기 장사, 양 장사들로 동물을 팔게 하였습니다. 밖에서 한 마리에 10만원이면 살 것을, 성전 내에서는 20만원에 팔아서 차액의 일부는 장사꾼이 갖고, 나머지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가지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강도로 보셨습니다. 대한민국 형법에 칼을 들면 강도범이고, 들지 않았으면 절도범으로 분류됩니다. 그런데 이 자들은 칼을 들지 않고도 강도짓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독사라고 불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34). 예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라 생각지 않으시고, 예수님 집에 들어온 강도나 절도범, 독사로 생각한 것입니다.
집 주인이 들어와서 보니까 강도들이 다 자기 집을 차지하고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강도에게 “들어가도 됩니까?”라고 물어보는 경우는 없습니다. 집 주인이 자기 집에 들어가 보니 강도들이 다 차지해서는 장사를 하고 있고 일부는 이익을 챙기고 뇌물을 먹고 있는 모습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도다!”라고 소리치며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환전상을 엎어버리시고 비둘기를 파는 상도 뒤집어 엎으시고 모두 다 쫓아내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강도들이 다시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강도인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주인이 허락을 받고 집에 들어갈 이유는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질문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청해진 해운의 실소유주는 ‘기독교복음침례회’에 소속된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침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바람에 혼동이 될까 심히 염려가 됩니다마는 그들은 우리 교회가 소속된 ‘기독교한국침례회’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전혀 다른 집단입니다. ‘예수교침례회’도 있습니다. 줄여서 ‘복침’, ‘예침’이라고 하는데, 우리 교단인 ‘기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체입니다. 분파되어 나간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침례교회라는 이름을 강도처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기독교한국침례회는 복침, 예침과 전혀 무관한 건강한 교단임을 밝혀두겠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업을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그런 식으로 해서 국가와 민족에 큰 손해를 입힐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어두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시니 강도들이 빛을 꺼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대해서 다시 대항하는 질문을 던지시며 그들의 대답을 이끌어내셨습니다.

Ⅱ. 예수님의 대항하는 질문

예수님은 이렇게 응수하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눅 20:3~4). 침례요한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침례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였습니다. 침례요한의 사명은 스스로 자신을 메시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가 오는 길을 미리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6~27절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침례요한이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을 메시아라고 증거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나는 그 분의 신발 끈도 매줄 사람이 못 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예수님이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1:29). 그리고 요한복음 1장 34절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침례요한은 뒤에 오시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시며, 나는 메시아의 오실 길을 준비하러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고 밝혔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침례요한과 예수님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침례요한을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로 믿으면 예수님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믿어야 마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침례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침례요한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침례요한을 거부하면 예수님도 거부해야 합니다. 침례요한과 예수님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침례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냐? 그렇지 않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지도자들을 아주 곤경에 처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라고 대답하면 “너는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아니라고 대답하면 백성들은 그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고 믿고 있고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을 돌로 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20장 5절에 의하면 곤경에 처해 서로 의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거 곤란한데 어떻게 하지?” “믿는다고 해도 곤란하고 믿지 않는다고 해도 곤란하다.” “그냥 모른다고 하자!” 그들이 의논한 내용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눅 20:5~6). 그래서 그들의 결론은 비겁한 대답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7절에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We don't know where it was from.)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질문을 회피하는 아주 비겁한 대답입니다. 그들은 모두 지도자들로 정치적인 권력과 물질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진리를 찾아서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모르겠다!”는 대답으로 일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지옥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물어보면 그 대답은 “믿겠습니다!” 또는 “믿지 않겠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중간의 회색지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믿지 않으면 자기 죄를 지고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옥에 떳떳이 가겠다는 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처럼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면 자기 죄를 지고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타협될 수 없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구걸하거나 부탁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향해 “한 번만 믿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부탁하지 않으십니다. “믿지 못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한 번만 믿어주세요. 네?” 이렇게 구걸하는 것 아닙니다.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죄짐을 지고 살다가 지옥에 떨어질 것인데, 어찌하여 너의 죄짐을 스스로 지고 가려느냐? 죄짐을 내게 맡기고 죄 용서를 받고 너는 이제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으라고 하시면 믿겠다고 대답하든지 믿지 않겠다고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모른다는 대답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어떤 대답을 하셨습니까?

Ⅲ. 지도자들을 정죄하시는 예수님의 답변

20장 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물어도 너희가 모른다고 대답하니 나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도 모른다.” 내가 이미 너희에게 영적인 빛을 주었건만 너희는 빛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빛을 소멸시키려고 하니 내가 더 이상 빛을 줄 이유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침례요한을 통해서 이미 빛을 비추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셨습니다. 침례요한은 두 가지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먼저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회개의 침례’를 베푼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침례요한을 통해서 이미 빛을 비추어 주셨고, 예수님이 오셔서 침례요한이 증거한 그 빛이 바로 나라고 확실하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빛을 거절하는 사람, 멸시하는 사람, 거부하는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점점 더 어두움 가운데로 빠져 가다가 영원한 어두움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영원한 어두움인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려고 하십니까? 빛 가운데 사시다가 영원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결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존재양식이 다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 제2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God with us)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아저씨, 청년, 선지자가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인성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죄성이 없으십니다. 죄를 짓지 않으시고 100% 의로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대신해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의 대속제물로 내어 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자리, 수치의 자리, 저주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내가 받아야 할 고통과 수치와 저주를 대신 당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저주에서 해방되고, 수치를 당하지 않는 인생이 되는 것이고,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으로 옮겨 영원한 빛 가운데 거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이시기에 영원히 죽어계실 수 없는 것입니다.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40일 동안 부활의 몸을 사람들에게 다 보여주셨습니다. 500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보았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40일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옛날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은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일을 끝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속죄사역을 다 끝내셨기 때문에 앉아계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부어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중보자의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때는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받을 때입니다. 구원받을 기회가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언젠가 재림하실 것입니다. 재림하시면 인류의 역사는 끝나고 구원의 문은 닫히게 됩니다. 구원받고 영생을 받은 사람들만 천국에 살게 되는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영벌을 받고 영원한 어두움 가운데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인간의 영혼을 비추는 빛입니다. 인간을 죄와 지옥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구세주는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석가모니, 공자, 마호메트를 인간적으로 존경합니다. 놀라운 일들을 많이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죄를 갚아준 구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나의 죗값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습니다. 나의 죗값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도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소망을 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영혼의 빛이십니다. 어두움은 마귀와 지옥의 권세요, 빛은 하나님과 천국의 영광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만이 빛이십니다. 이 구원의 때에 여러분 한 분도 빠짐없이 다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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