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타종교는 윤회를 말하지만 기독교는 부활을 말합니다. 윤회는 사람이 죽으면 개나 말로 환생을 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나 영원히 동질성을 갖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윤회와 부활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토록 자세하게 부활이라는 주제를 다룰 필요가 있었습니까? 12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하던 가운데 1년 6개월 동안 사역을 하면서 세웠던 교회였습니다. 바울의 1,2차 선교여행 기간을 통틀어 가장 오래 머물며 사역을 한 교회였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유대인, 헬라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다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영도 없고, 귀신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헬라인들은 어려서부터 들어온 헬라 철학의 사상이 몸에 배여 있었습니다. 헬라 철학은 사람의 육신이란 영혼의 감옥과도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도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다. 헬라철학은 영혼 불멸설을 믿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2절에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영혼의 불멸사상은 늘 들어오던 익숙한 이야기였지만 육신의 부활, 육신의 불멸이라는 사상은 대단히 생소한 사상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두개인들의 배경을 가진 유대인들과 헬라 철학을 배웠던 헬라인들은 죽은 사람들의 육신이 다시 부활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공통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부활의 진리에 굳게 서 있지 못한 일부를 위해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장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Historical fact)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상상, 신화, 소설, 허구가 아니라 500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을 직접 보고 체험한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5장 3~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가는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13절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며 첫 열매가 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나중 열매로서 모두 다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그를 믿는 우리도 모두 다 부활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말도 안 되는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완전히 무너지고 마는 엄청난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14~19절은 그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고 우리의 전하는 복음도 헛것이고 성도들은 망한 존재이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헛것을 믿고 헛것을 전파하고 헛것을 소망하여 인생을 낭비하는 헛된 존재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원수인 사단은 부활의 진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교리를 무너뜨리면 기독교는 무너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점점 더 확산되었고, 더욱 멀리 전파되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공격하는 자가 무너지면 무너지지 절대로 기독교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벌써 무너졌을 것입니다. 성도가 부활할 것도 진리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무너지지 아니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21세기에도 사두개인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고 헬라 철학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영원불멸이라는 이야기를 해도 육신불멸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사단에게 속고 있습니다. 사단의 미혹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장은 대단히 중요한 장입니다. 부활의 진리는 기독교의 존망이 걸린 아주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15장 35절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질문입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 15:35). 이 질문은 사실을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빈정거리는 경멸조의 질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사는 일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오겠느냐?”며 건들거리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답변하고 있습니다. 첫째, 죽은 자들이 사는 것이 가능한가? 둘째, 죽은 자들이 다시 산다면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이 두 가지 질문입니다.
Ⅰ. 첫째 질문: 부활은 가능한 일인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사느냐? 부활이라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이냐? 그리스도인들은 불가능한 일을 믿고 있는 것 아니냐? 전에도 없었고, 본 적도 없고 어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주장을 하느냐? 사람은 육신만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영혼이 있고 육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진 삼분설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정통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란 영혼이 육신을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마도 임종의 순간을 가장 많이 지켜본 사람들은 의사나 목사들일 것입니다. 목사들은 임종예배를 드리며 숨이 넘어가는 순간을 자주 목격합니다. 그렇게 사람의 숨이 넘어가는 순간이 바로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순간입니다. 영혼이 떠나면 그 사람의 얼굴이 바뀝니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영혼이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이 육신을 떠나게 되면 신자의 영혼은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의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천국에 들어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고 용서받지 못한 불신자의 영혼은 지옥에 떨어져 끊임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영혼만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신자의 영혼은 육신과 다시 결합해서 부활한 후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리고 천국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불신자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육신과 다시 결합하여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부활과 사망의 부활로 나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부활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가 모두 부활합니다. 그리고 육신과 재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은 사람은 생명의 부활을 하여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되지만, 불신자들은 사망의 부활을 하여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부활을 하시겠습니까? 사망의 부활을 하시겠습니까?
생명의 부활을 해야 합니다. 지옥에 떨어져 영영한 고통을 받으면 되겠습니까? 성경에서 지옥은 불과 유황불이 타는 곳이라 하였고, 구더기를 소금치듯 하는 곳이라 했으며,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가능한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육신은 죽으면 시간이 지나 모두 먼지가 되어서 날아가 버릴 텐데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화장을 해서 가루만 남아 공중에 흩어졌거나 물에 들어가 흙먼지가 되어버린 육신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입니다. 한국 전쟁 때 폭발물이 터지는 바람에 온 몸이 산산조각이 나서 썩어 없어지게 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전 15:36). 바울은 36절에 대단히 간단한 예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식물 세계를 보면 씨앗이 땅에 뿌려져서 죽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싹이 나고 줄기가 생기고 잎이 나오고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식물 세계의 자연법칙에도 얼마든지 부활의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씨앗이 죽지 않으면 어떻게 싹이 나고 줄기가 생기겠습니까? 식물 세계에도 부활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곤충이나 동물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애벌레 속에서 호랑나비가 나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애벌레가 깨지면서 잠자리가 나옵니다.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또한 올챙이 알이 깨지고 그 속에서 올챙이가 나오고 개구리가 되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죽어서 다시 사는 이 부활의 현상은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동물과 식물의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을 어찌 없다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도 이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우리는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듭니다. 잠자는 시간 동안에는 무슨 일이 어떻게 되는지 인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과 부활은 매일같이 예행 연습하는 것입니다. 밤에 잠을 자는 것은 죽음 연습을 하는 것이고, 아침에 깨는 것은 부활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연습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왜 부활이 없겠습니까? 부활은 가능한 것입니다.
Ⅱ. 둘째질문: 죽은 자들은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굉장히 경멸적인 어투입니다. “지금보다 더 잘생긴 얼굴이 되는 것입니까?”, “남자로 태어났는데 혹시 여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 살아 있는 내가 혹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까?”, “그 때 알아볼 수는 있는 겁니까?”, “똑 같은 몸입니까? 아니면 다른 형태의 몸입니까?”라는 식의 어감이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사도 바울은 두 가지로 대답하였습니다. 첫째, 부활의 몸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몸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니까 옥수수나 밀의 씨앗을 심으면 나오는 것은 전혀 다른 형체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0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이 천사들과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집을 가거나 장가를 가는 일도 없습니다. 그 때에는 인구 증가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누리는 사람은 더 이상 인구가 증가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재미있으십니까? 그것 없이도 천국은 엄청나게 재미난 일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재미난 일일수도 있지만 천국에서는 계산에 넣을 가치도 없는 좋고 행복한 일들이 더욱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몸은 육신의 능력도 약하고 정신의 능력도 약하고 공간의 이동도 제한되어 있지만 부활의 몸은 천사들처럼 되어서 육신적, 정신적, 공간적 이동의 능력도 천사들처럼 되는 몸이 라는 것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 20:26).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도마를 찾아가신 장면입니다. 부활의 몸은 닫혀진 문을 통과하였습니다. 벽이나 담과 같은 장애물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지금은 목적지를 가기 위해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가야 하지만 그 때에는 여행이나 관광도 범주가 달라질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의 몸은 천사의 몸처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낮은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할 때에 천사처럼 되고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처럼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 3:2)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은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이 어떻게 다른 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2~44). 현재의 몸은 썩을 몸이고, 욕된 몸이고, 약한 몸이고, 육의 몸이고, 낮은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몸이고, 영광스러운 몸이고, 강한 몸이고, 신령한 몸입니다. 신령한 몸이라는 것은 비물질적인 몸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영적인 세계에 합당한 몸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이 주일인데, 교회에 나오지 않고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면 갈 데가 또 어디가 있느냐며 종일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역기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하며 자기 몸을 가꾸느라 온 에너지를 쏟습니다. 그러나 평일에는 피트니스 센터를 가시되 주일이 되면 반드시 교회를 오셔야 합니다. 주일은 교회 나오는 날입니다. 주일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밥을 먹어도 교회에 와서 먹고, 책을 읽어도 교회에서 읽어야 합니다. 주일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몸을 만들고, 병원에 가서 보톡스 주사를 맞거나 성형 수술을 받아도 사람의 낮은 몸은 부활의 몸처럼 변화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그 몸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몸은 추한 몸이지만 부활의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입니다. 현재의 몸이 부활의 몸으로 변하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순식간에 홀연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15장 51~52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은 질적으로 다른 몸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은 동일성과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어떤 사람이 부활하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부활하면 베드로가 되고, 바울이 부활하면 바울이 됩니다. 그리고 제가 부활하면 제 자신이 됩니다. 동질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인격적인 특성들은 유지되면서 영화된 동일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하면 서로 알아볼 수가 있는 것이고, 현재의 몸과 연속성이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39~40절에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땅의 몸과 하늘의 몸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짐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짐승이 된다는 것을 믿습니까? 사람은 짐승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몸은 사람의 몸이 되고 물고기는 새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는 새가 되고 물고기는 물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남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남이 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현재의 몸이나 부활의 몸이나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의 날에 서로 알아볼 수 있는 동질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도 있지만 동일성도 있는 것입니다. 차이성과 동일성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 바울의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진리를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Ⅲ. 우리 삶에 적용
우리의 몸에는 아무리 가꾸고 투자를 해도 결국 약해져 모두 다 죽을 것입니다. 이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몸이 약하고 일시적이고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몸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는 이 몸을 한 번 벗어나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입니다.
시편 103편 14절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진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진흙으로 만들어져서 진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인생이 끝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시 현재의 몸에 장애가 있다 할지라도 부활의 몸은 완전히 아름다운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입니다. 영국의 1553년부터 1558년까지는 튜더 왕조의 메리라는 여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왕이 엄청나게 많은 개신교도를 죽이고 화형을 시켰기에 역사는 그녀를 ‘피의 메리’ (Bloody Mary)라고 부릅니다. 이 메리여왕이 나라를 통치할 때 장애가 있는 두 명의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지키다 화형을 당해 순교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시각장애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다리에 지체가 있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두 사람을 나무에 묶어 세워놓고 밑에 깔려 있는 장작에 불을 붙이니까 다리에 장애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목발을 집어 던지면서 옆에 묶인 시각 장애인을 향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보게! 우리가 이생에서는 장애를 고치지 못했지만, 이 불은 우리의 장애를 영원히 치료해줄 것일세!” 라고 말하곤 모두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얼굴색이 조금 검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비율이 조금 맞지 않거나 몸의 구조가 어긋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현재의 몸에는 우리의 생각에 만족스럽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그 날이 되면 영광스러운 몸을 갖게 될 줄로 믿습니다. 몇 살의 나이로 부활하게 될 것인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천국에서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살아갈 존재들입니다. 앞서 천국을 간 내 배우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천국에 간 우리 부모와 가족, 친지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헤어짐이 없고, 질병도 없고, 피곤과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결론
고린도전서 15장은 성도의 몸도 부활하지만 주님을 위해 충성했던 우리의 봉사와 헌신도 영원한 상급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가대 봉사, 주일학교 교사 봉사, 식당 봉사 등등 그 날이 되면 부활이 몸을 입고 전부 우리의 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눅 14:14).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섬김은 설령 목사님이 몰라주고, 다른 성도들이 몰라준다고 할지라도 부활이 때가 되면 모두 다 갚아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지금 연식이 오래된 중고차 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결국 롤스로이스나 벤틀리와 같은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내 인생은 어찌 맨날 중고차 같은 인생이냐며 원망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소망으로 즐거워하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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