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빌립보서 4:10~19
제목 : 선교 지향적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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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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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코카콜라는 지난 수 십 년 동안 전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상표입니다. 이 코카콜라가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 덧 127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 인구 중 97퍼센트가 코카콜라를 알고 있고, 60퍼센트가 맛을 보았으며, 이제는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코카콜라를 사서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세계 어떤 나라를 가도 맥도날드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빅맥 가격을 보면 세계 각 나라별 물가를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복음전파를 이 두 회사에 맡기셨다면 전 세계는 이미 복음화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코카콜라나 맥도날드보다 더 큰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 교회에 주신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요, 이 명령에 순종하는 성도만이 참된 성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코카콜라나 맥도날드보다 더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않으면 믿을 수 없고, 복음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전파의 사명과 책임을 중대하게 생각하고 수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신약 교회들 가운데 가장 선교 지향적인 교회는 두 교회입니다.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안디옥 교회와 바울의 선교를 물질로 후원한 빌립보 교회입니다. 오늘은 빌립보 교회를 모델로 삼아 선교 지향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선교 지향적인 교회는 “복음”이 그 중심에 있는 교회이다.
복음적인 교회는 선교 지향적인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빌 1:5).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빌 1:7).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변명한 교회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빌 1:27). 빌립보 교회는 복음 안에서 교제하며 복음을 변명했고,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수고했고, 복음을 따라서 생활했고, 복음을 위해서 협력하는 교회였습니다. 단순히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와 삶의 중심부에 놓여 있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교회였느냐?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세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여전도회의 분열이 있었고 둘째로 율법주의를 가르치는 이단자들이 들어왔습니다. 셋째로 땅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세속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분열성, 이단성, 세속성 이 세 가지가 빌립보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이런 모든 문제들도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면 모두 다 해결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적용했고, 그 삶의 중심에 복음을 놓았던 교회였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모두 다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죄를 사해주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복음을 뒤집어 보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나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또 의를 얻지 못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중심에 둔 교회는 사람의 멸망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선교 지향적인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복음을 삶의 중심에 둔 성도 역시 선교 지향적인 성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선교사가 아니고 선교사로 나갈 의향도 없기 때문에 선교 지향적인 성도가 될 수 없다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해 내야 할 때 밧줄을 가지고 우물 속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밖에서 밧줄을 붙잡아주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안심하고 들어가서 빠진 사람을 건져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밖에서 어린아이가 밧줄을 붙들고 있다면 우물 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결코 안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선교사는 아니라 할지라도 밖에서 붙들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붙들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물 안에 들어간 사람을 구원하러 들어간 선교사님들은 많은 사람을 건져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로 나가지 못할지라도 선교를 후원하는 것 역시 선교활동입니다. 우리는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이 되거나 선교활동을 지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복음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Ⅱ. 선교 지향적인 교회는 “섬김의 태도”를 가진 교회이다.
교회는 교만하면 안 됩니다. 교회가 교만해서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기가 죽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어마어마한 시설과 큰 오르간 소리에 겁을 먹고 예배당 자체와 분위기에 기가 죽으면 되겠습니까? 교회는 섬김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섬기는 종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5~7). 예수님은 종으로 섬기러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35~45절에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요청에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그랬더니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왕이 되시면 우의정, 좌의정을 시켜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모의 아들들입니다. 이모가 살로메이고, 이모부가 세베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야고보와 요한은 사촌 형님이신 예수님께 와서 인사 청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두고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3~44).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면서 얻게 될 특권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자세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특권을 누리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자세, 종의 자세를 가지고 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구약성경을 볼 때 안타까운 사람이 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야곱의 외삼촌 라반입니다. 라반은 원래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야곱이 와서 일을 해줘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이 부자가 된 것이 자기의 공력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창 30:30). 외삼촌이 부자 된 것은 나의 공력 때문이고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니 외삼촌도 더불어 부자가 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삼촌 라반이 야곱을 가만히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사람이고, 내가 외삼촌으로서 우리 조카 야곱을 잘 키우고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섬겼으면 야곱도 부자가 되고, 외삼촌 라반도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자기 아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창 31:7).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창 31:9). 야곱은 큰 부자가 되었고, 라반은 가난해졌습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야곱을 핍박하고 야곱의 것을 다 빼앗으려 하고, 야곱을 죽이려 하니까 하나님이 라반의 것을 다 빼앗아 다시 가난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야곱은 라반이 괴롭히든 안 괴롭히든 부자가 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작정하고 복을 주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섬기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부자가 되고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을 섬기지 않음으로 인해서 망했습니다.
두 번째로 사무엘상에 나오는 사울 왕도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사울 왕은 키가 일반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인물은 멀쩡한데, 지능이 상당히 떨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부족함 가운데 하나님이 왕으로 세워주셨으면 스스로 ‘나 같이 부족한 것을 왕으로 세워주셨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고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와서 골리앗을 물맷돌로 물리쳤다면 비록 지금은 내가 왕이지만 내 후임은 다윗이라 생각하고 다윗을 키워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을 축복해주고 갖가지 필요한 교육을 시키고 자기보다 더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도록 키워주고 섬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다윗을 사위로 삼고 난 이후에도 시기질투하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노래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가 결국 무당을 찾는 광인이 되어 자기와 자기 집안의 멸망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섬기는 것은 우리가 모자라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섬기는 사람일수록 훌륭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게 되면 선교사님들도 복을 받고 섬기는 우리 교회도 복을 받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선교 지향적인 교회는 “열심”을 가지고 선교를 지속하는 교회이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3~14). 바울은 잊어야 할 것도 있고, 좇아가야 할 것도 있다고 했습니다. 잊어야 할 것은 뒤에 있는 것 즉, 이미 흘러간 시간은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과거에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형편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좇아가야 할 것을 좇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좇아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했습니다. 위에서 내게 주신 사명,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귀중히 여기고 순종하며 따라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열심이 없이 선교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헌신되지 않는 천명보다 헌신된 한명이 더 강한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100명의 선교사를 돕고, 한국의 100개의 개척교회를 돕자는 “100 and 100”이라는 비전을 세우고 불과 2년 만에 다 달성하였습니다. 현재는 해외선교 110곳과 국내선교 122곳을 도우며 매달 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선교위원들은 이 일을 내 일처럼 돌보고 있습니다. 작년까지는 1,000명이 안 되던 선교후원자들이 올해는 1,800명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2,000명의 선교 후원자를 세우자는 “Operation 2000”의 목표도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2014년은 한 가족이 한 구좌를 하지 말고 가족이 다섯 명이면 다섯 구좌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 교회가 선교사 개인을 돕는 일 뿐만이 아니라 선교지의 큰 프로젝트도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선교는 주님 오실 때까지 중지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선교는 미지근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선교의 뜨거운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Ⅳ. 선교 지향적인 교회는 “올바른 정신”(Spirit)을 가진 교회이다.
정신은 영어로 ‘Spirit’입니다. 어떤 정신을 가진 교회인가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세 가지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돌봄의 정신(Spirit of Care)입니다. 선교사를 잘 돌보았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빌 4:10). 생각한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돌봐준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잘 돌봐주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다가 로마 감옥에 1차로 투옥되었을 때 다른 교회에서는 그 소식을 들어도 바울에게 선교헌금 한 푼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에는 선교헌금을 모아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보낸 것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 4:18). 하나님이 받으신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선교사님들께 보내는 선물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왔습니다. 선교사님들이 그것을 받아보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라면 하나라도 그것을 끓여 먹을 때마다 한국의 교회가 우리를 생각하고 기도해 주고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얼마나 위로를 받겠습니까?
둘째, 빌립보 교회는 기부의 정신(Spirit of Giving)이 아주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빌 4:15).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선교여행에 헌금으로 지원한 교회는 빌립보 교회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교회는 가난하고 빌립보 교회는 부자라서 헌금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 8:1~2). 빌립보 교회는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도 가난하면서 선교사들에게 베풀려고 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니까 돈이 많다고 많이 베푸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그 돈이 없어지면 자기는 죽는다고 생각해서 많이 베풀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 본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이 베풉니다. 저는 선교하다가 굶어 죽었다는 사람은 여태껏 본적이 없습니다. 베풀려는 정신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만큼 더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정신(Spirit of Confidence)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극한 가난 속에서 선교헌금을 드린다고 굶어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풍성한 보고로부터 모든 쓸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열한 번째 경제대국입니다. 지금은 유럽여행을 가도 미국에 가도 우리나라가 훨씬 낫습니다. 제가 1986년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 처음 맥도날드에 가서 치킨너겟을 먹고선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있나 하며 큰 감탄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그렇게 부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자원이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풍성한 보고에서 우리 대한민국에 복을 부어주신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선교사들을 많이 보내고 선교사들이 외국에 나가서 죽기로 고생하니까 그 고생한 대가로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교사가 있는 한 우리 대한민국은 건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보고에서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고에서 복이 오는 것입니다.
저는 빌립보서 4장 17절 말씀이 참 어려웠습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빌 4:17). NIV성경을 보면 “Not that I am looking for a gift, but I am looking for what may be credited to your account” 너희 계좌에 드린 헌금이 계속해서 축적되기를 구한다는 뜻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보낸 헌금을 바울이 다 쓰면 없어지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의 천국 계좌에 다 쌓인다는 것입니다. 현세의 재물은 천국에 1원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교에 드리고 하나님의 일에 드리면 천국 계좌에 쌓이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상급으로 돌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20).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자기 재물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는 목사님이 돈이 없어서 저런 소리 하나 하는 분도 있겠지만, 드려도 제가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는 돈만 뜯어낸다고 해서도 안됩니다. 바울이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대들에게 선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의 천국 계좌에 쌓여가는 것을 내가 구하고 바라는 것이다.”
결론
지금도 하루에 오만 오천 명이 그리스도를 모른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루에 오만 오천 명이 지옥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선교에 헌신할 것을 명령합니다. “오만 오천 명이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데, 너는 아무것도 안하느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열심을 가지고 선교하는 선교사들을 우리 교회가 섬길 수 있기 바랍니다. 선교를 계속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현세에도 복 주시고, 내세에도 복 주시리라는 것을 신뢰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빌립보 교회처럼 기쁨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선교에 헌신하여 복 받으시고,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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