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구원의 문이시다(요한복음 10:9)

날짜 : 2011-10-23
본문 : 요한복음 10:9

본문 : 요한복음 10:9 
제목 : 그리스도는 구원의 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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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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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예수님은 어려운 진리를 항상 쉬운 말로 설명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이 목자시고 성도는 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목축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목자와 양의 관계는 얼마든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버려진 양 같은 존재가 아니고 우리에게 목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라고 해서 다 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양 없이 그냥 혼자 돌아다니는 목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러 우리에 양들이 많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양들을 어디서 얻으셨느냐?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9). 이 양들은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양들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예수님에게 주신 이 사람들을 가리켜 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을 보면 예수님은 양들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4).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 25절에서도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있는지 아니면 반역이 있는지를 다 아십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 마음속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속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에는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들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행하시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양들을 대표해서 양들의 죗값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주신 목자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5).  
 예수님의 양들은 유대인 중에도 있고 이방인 중에도 있다고 했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16). 유대인 중에도 양이 있고 이방인 중에도 양이 있는데 이들이 한 무리가 되어서 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피부, 성별, 학벌, 국적, 직업도 다 다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목자가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자이신 것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7). 예수님의 양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요 10:24). 수없이 말했는데 또 와서 밝히 말하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 10:25-26). 예수님의 양이 아닌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들어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 염소라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을 보면 목자 되신 예수님이 양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 목자 되신 예수님이 양된 성도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진시황은 이것을 얻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지만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모신 양들은 영원히 망하지 않습니다. 잠깐 망하는 것 같아 보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죽었다가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껍데기, 거푸집, 장막집이기 때문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몸을 가지고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몸, 썩지 않는 몸, 영화로운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37). 예수님에게 주신 양들은 다 예수님에게 올 것이고 그들을 내어 쫓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0).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양들은 예수님에게 오게 되고, 오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듣게 되면 의심 없이 믿게 되고, 영생과 부활의 축복을 얻게 된다는 진리를 다시 확증시켜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목자로 삼고 양의 우리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은 인류가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9절에 명확히 대답해주십니다. 

Ⅰ.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길은 무엇인가?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요 10:1). 양의 우리에 문이 있는데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우리는 반드시 문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러면 문이 어디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요 10:9). 예수님 자신이 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양의 우리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밖에 있는 사람은 길을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 양들을 목자가 우리 안에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내 양들아,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양들이니 내가 너희를 찾으러 왔다.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내 음성을 듣고 우리 안으로 들어와라.” 이렇게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문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이 목자가 되어서 돌봐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의 때가 덕지덕지 끼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피로 씻어 죄사함을 주시고 죄를 지어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는 사람은 그 옷을 벗기고 흰옷을 입혀 의인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지금까지 등지고 원수가 되어 살던 사람은 이제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어서 둘 사이를 화목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사죄가 있고 칭의가 있고 하나님과의 화친이 있다는 것입니다. 슬픔에 젖은 사람은 기쁨을 찾게 되고 영육이 병든 사람은 목자의 치료를 받게 되고 마귀의 종노릇하던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양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이 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문은 은혜의 문이고 구원의 문입니다. 
 예수님이 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많은 문 중 하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하나 예수님 외에는 다른 문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다른 문이 있다고 말하는 자는 사탄이며 마귀의 종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도 예수님이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문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이슬람과 무슬림을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슬람은 종교 이름이고 무슬림은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무슬림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85세에 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오늘날 이슬람 국가인 아랍 족속이 되어 기독교의 최고 원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독교와 가장 비슷하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양이 되지 못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9). 귀신도 하나님을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귀신을 구원받았다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죗값을 갚아주신 나의 구주로 확실하게 믿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부모님이 목사, 장로, 권사라고 해서 저절로 양의 무리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 장로, 권사 자녀 중에서도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혈통으로 천국가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받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녀들은 저절로 구원받는 것은 순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옳은 신학이 아닙니다. 성경은 혈통으로나 육적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가자고 그러면 아내가 교회에서 기도도 많이 하고 잘 다니니까 자기는 아내 치맛자락 잡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롯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비의 심판을 받을 때 구원받았지만 롯의 아내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도망치다 뒤를 돌아보았고 소금 기둥이 되어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믿음이 좋다고 해서 자신도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침례나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런 교회 의식은 구원받은 믿는 자가 참여하는 것이지 불신자가 여기 참여했다고 해서 저절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은 영세를 받으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교회 의식에 참여한다고 해서 죄사함 받고 구원받습니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는 것이지 교회 의식이 구원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입술로만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자리는 입술이 아닙니다. 입술은 온갖 거짓말을 다 합니다. 믿음의 자리는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내 죗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나의 구주시며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각자가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의 문을 통과해야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18세기 중반에 영국의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과 미국의 1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주역은 요한 웨슬리인데 이보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더 훌륭한 목사가 있습니다. 바로 조지 휫필드인데 이 사람은 영국과 미국을 열세 번이나 오가면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하루에 다섯 번씩 설교했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가장 많이 한 설교는 “You must be born again!(당신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입니다. 매번 이 설교를 하니까 따라다니던 성도들이 물어봤다고 합니다. “왜 매번 그 설교만 하십니까?” 그러자 조지 휫필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거듭나야하기 때문입니다.” 
 문은 그리스도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분은 영원히 실패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문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Ⅱ. 문으로 들어오는 자가 받는 축복은 무엇인가? 

 문으로 들어오는 자가 받는 축복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구원을 받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요 10:9). 구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시대의 도피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도피성을 요단강 동편에 세 개, 서편에 세 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도피성은 살인죄를 저질렀으나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과실로 저지른 사람이 피하면 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모세의 법에는 살인죄를 저지르면 피해자의 가족이 그를 죽일 수 있는 복수의 권리를 갖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의가 아닌 경우에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피하게 되면 피해자의 가족이라도 그 사람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죽을 죄를 지었으나 구원을 기다리는 자의 도피처였습니다. 그리고 도피성에 있던 사람들은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으면 완전 사면을 받고 도피성에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은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양의 우리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이란 표지판을 보고도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피해자의 가족이 와서 복수해도 아무런 항변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고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죄인들은 도피성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리고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양의 우리 안으로 들어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양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죄에 대한 심판이 면죄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도피성에 가면 살 수 있듯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용서를 받고 심판이 면죄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심판이 면제되면 지옥에 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8). 도피성으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존재이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지옥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양의 우리로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심판을 받지 않고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자유롭게 꼴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9절 후반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니라"는 말씀을 가지고 저는 ‘들어오며 나오며’가 무슨 뜻인지 오랫동안 묵상했습니다. 이것은 양들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꼴을 먹고 배부르면 나가서 놀다가 배고프면 또 와서 꼴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들어가긴 들어가는데 나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감옥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교회 나오는 것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교회 나오면 감옥에 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28살 때 예수님을 믿기 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감옥과 같은 굴레를 쓰고 다닌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일날에 날도 좋은데 놀러 가지도 못하고 교회에 나가야 되니 감옥과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것이 굴레가 아니라 술집 다니던 것이 굴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술집에서 술을 먹고 몸 버리고 돈 뜯기고 술값 때문에 싸우다가 친구와 의 상하고 그런 것이 굴레지 교회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왜 굴레입니까? 양의 우리는 꼴을 먹고 싶은 양들은 마음껏 목자에게 오가며 꼴을 먹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하나님, 나를 간섭하지 마세요. 나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세요.” 이 자유는 지옥가는 자유인 것입니다. 기차가 레일을 달리다가 자유를 달라고 하면서 논두렁으로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논두렁에 박혀서 달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다가 육지로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종류에 따라 시간은 차이가 나겠지만 결국 죽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요구하면 지옥에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참된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된 자유는 마귀, 귀신, 지옥, 심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꼴을 마음껏 얻어먹을 수 있는 자유가 참된 자유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과 자유 두 가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달라면서 가는 곳이 술집입니다. 그런데 술 먹고 방탕하게 되는 것은 그 속에 귀신이 시켜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술을 사람이 자기 의지로 끊을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인다고 해도 못 끊습니다. 술과 담배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귀신의 종이 되어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가 제일 예쁜 것도 모르고 귀신이 시키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자유입니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그런 귀신들로부터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 아무리 유혹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하면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바람도 피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자유입니까? 귀신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자유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참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도 악령들이 자꾸 유혹하고 공격해서 한두 번 넘어가기도 하지만 우리는 참된 자유와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양의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있는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이거나 염소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염소에 있지 않습니다. 염소들은 복음을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길을 잃어버린 양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염소를 구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길을 잃어버린 양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택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겨주신 양 중 길을 잃고 방황하며 세상 속에 만족도 없고 영혼의 방황이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이 백 마리가 있으면 구십구 마리를 찾았다고 해서 이젠 됐다고 한 마리는 내버려두고 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지막 한 마리의 양을 끝까지 찾아서 어깨에 메고 오시는 우리의 참된 목자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복음은 좋은 소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죗값을 갚으시고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죄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한다는 소식이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은 소식이자 명령입니다. 이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명령이고 문 되신 그리스도를 통과하여 양의 우리인 도피성 안으로 들어오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오늘 초청되어 나오신 여러분, 양의 우리 밖에서 방황하지 마시고 문 되신 그리스도를 통과하여 구원과 자유를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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