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강해] 메뚜기 재앙의 의미

날짜 : 2011-04-10
본문 : 요엘 1:1~12

본문 : 요엘 1:1-12
제목 : 메뚜기 재앙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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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2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찌어다 땅의 모든 거민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찌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3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시대에 고할 것이니라 4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5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찌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찌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6 한 이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7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8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찌어다 9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10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니 곡식이 진하여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찌어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아 곡할찌어다 이는 밀과 보리의 연고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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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를 소선지서라고 말합니다. 대선지서는 두꺼운 것이고 소선지서는 얇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소선지서가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분량만 적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소선지서도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책인 것입니다. 성도님들 모두 요엘서를 통해 영적인 유익을 얻기 바랍니다.

Ⅰ. 요엘 선지자와 그 시대

선지자(prophet)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 있는 하나님의 대변자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이 자원하여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의 수납자입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했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에게 당신의 뜻과 진리를 보이시고, 선지자들은 계시를 받아 백성에게 전달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셰익스피어(Shakespeare)가 많은 문학 작품을 썼을 때에도 영감 있는 작품을 썼다고 사람들이 평가를 했습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영감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수하다는 의미이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적인 계시를 주신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들은 자신이 연구한 이론이나 사상을 발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이었습니다. 요엘도 선지자였습니다. 요엘 1장 1절입니다.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여호와를 통해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요엘의 의미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The Lord is God)”라는 것과 아버지가 브두엘이라는 것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브두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설득을 당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요엘의 아버지 브두엘이 하나님께 감화를 받아 자식을 낳아 여호와가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요엘이 어느 시대에 활동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복음적인 학자들 사이에 이에 대하여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는 B. C. 800년 경 남왕국 유다에서 요아스 왕 초기에 활동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근거가 없습니다. 또 다른 견해는 요엘은 유다 왕국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학개, 스가랴, 말라기 다음으로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만약에 이것이 B. C. 9세기경에 기록 되었다면, 북 왕국에도 메뚜기 재앙이 있었을 것인데, 요엘서에 보면 북 왕국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둘째, B. C. 9세기경에 기록 되었다면 그 당시에 우상 숭배가 문제였는데 요엘서에는 우상 숭배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유다 백성이 우상 숭배를 더 이상 하지 않는 시기에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B. C. 9세기경에 기록 되었다면 왕에 대한 언급이어야 함이 분명한데 요엘서에는 왕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로는 제사장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엘서는 구약 시대 마지막 선지서로서 B. C. 40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B. C. 9세기로 보느냐 B. C. 5세기로 보느냐에 따라 요엘 2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에 침략한 군대가 로마 군대인지, 바벨론 군대인지 달라지는 것입니다.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B. C. 5세기경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Ⅱ. 요엘 선지자가 증거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인가?

요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전대미문의 엄청난 메뚜기 재앙이 임했습니다. 노인들도 그런 메뚜기 재앙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노인들도 놀라 계속해서 후손들에게 전해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메뚜기가 땅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메뚜기의 온갖 종류가 쳐들어 왔습니다.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욜1:4) 저는 이것을 보면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 곤충학에 대해서도 정통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메뚜기는 이방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인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메뚜기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답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요엘서 1장에는 이것이 메뚜기 재앙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요엘서 2장에 가면 메뚜기 재앙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즉 요엘서 1장은 메뚜기 재앙을 군대 용어로 설명한 것이고 요엘서 2장은 군대의 침략을 메뚜기 용어로 설명을 한 것입니다. 요엘서 1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메뚜기 재앙인 것이 분명합니다. 메뚜기가 가지고 있는 무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한 이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메뚜기의 이빨입니다. 또 그들이 끼친 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7, 12절). 만약에 이방 군대가 쳐들어 왔으면 도시가 파괴되고 백성이 칼에 죽었을 것인데 메뚜기가 쳐들어 왔으니 나무가 말갛게 벗겨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엘서 1장은 문자 그대로(literally) 메뚜기 재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 역사 가운데 메뚜기 재앙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벅(Pearl Sydenstricker Buck)의 책 「대지」를 아십니까? 제가 어렸을 때 영화로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보면 중국에 어마어마한 메뚜기 재앙이 와서 땅을 쓸어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1654년에는 대만에 메뚜기 재앙이 일어나 농산물을 모두 쓸어버렸습니다. 그래서 8천여 명이 굶어 죽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2004년에는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수십억 마리의 메뚜기가 침입해 국가 1년 곡식 생산량의 4분의 1을 먹어 치웠습니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가 증거하는 메뚜기 재앙의 핵심은 그것이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요엘 2장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로마 군대의 침략을 메뚜기의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군대 앞에서 행하신다고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단히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역사 속에 일상적인 재앙이 아닌 대재앙이 일어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단언적으로 말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자연은 설사 하나님이 하시지 않더라도 그속에 무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죄로 인해 대자연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죄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대자연속의 무질서 때문에 오는 재앙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조심해서 말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구약의 선지자인 것처럼 이런 저런 재앙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도 단언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셨고, 우리는 그런 계시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완성해 주신 계시 즉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재앙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가 아닙니다. 규범적인 계시를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단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규범적인 계시를 주시지 않습니다. 규범적인 계시는 모든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엘이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이신론자(deist)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이 세상은 하나님이 시계태엽을 감아놓은 것이 저절로 풀리는 것처럼 풀려가는 것이지 하나님이 개입하거나 간섭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신론은 시계태엽 신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신론자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계시를 주신다든 지, 하나님이 개입해서 기적을 이루신다든 지, 하나님이 개입해서 심판한다는 것을 인정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성경과 직접적으로 위배되는 사상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재앙이 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언적으로 말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는 자연적인 재앙이라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입니까? 잘 모르는 것이 정답니다.
지금 요엘이 증거하고 있는 메시지는 메뚜기 심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재앙인지 아닌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메시지는 메뚜기 재앙이 예비종(alarm)에 불과하고, 더 큰 국가적인 재앙이 올 것인데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모두 망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적인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이 인류 역사 가운데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엘이 말하는 것은 메뚜기 재앙이 하나님께서 최후 심판을 예정하고 계시다는 예비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온 인류를 심판하시는 그 날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엘도 이것을 눈치챈 것입니다. 요엘 1장 15절입니다.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메뚜기, 지진, 태풍, 인간의 질병, 조류독감, 구제역 등 큰 규모로 세계적인 영향을 주는 재앙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지 않고, 아들이신 예수님께 맡겼는데 심판날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재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메뚜기 재앙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인데도 정말 무섭습니다. 그런데 실체로서 오는 지옥의 재앙은 얼마나 두려운 것입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배짱도 좋습니다. 세계적인 대재앙들은 인류에게 최대 재앙의 날이 온다는 예비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게 되면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고 요엘서 1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됩니다. 요엘 1장 9절입니다.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소제와 전제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출애굽기 29장을 보게 되면 아침과 저녁으로 번제를 드립니다. 그래서 이것을 항상 드린다고 해서 상(常)번제라고 합니다. 양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고운 밀가루로 소제를 드리고 포도주를 부어 전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밥이고, 소제와 전제는 반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번제를 드리면 소제와 전제가 항상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소제를 드리려고 하는데 밀가루가 없고, 전제를 드리려고 하는데 포도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지옥에는 설교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습니다. 지옥에는 설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찬송을 듣고자 해도 성가대가 없습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음소리만 있을 뿐입니다. 지옥이 아니라 해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도 드리지 못하는 땅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드리고 있으니 행복한 것입니다.
둘째, 인간의 희락이 말라버립니다. 요엘 1장 12절 후반부입니다.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 가정에도 필요한 것이 희락입니다. 가정에 가면 “깔깔깔”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와 대화를 많이 해야 합니다. 남편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바가지부터 긁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도 희락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와도 희락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오면 성도들은 모두 윗이빨을 보이고 인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희락이 없으면 다툼과 싸움, 분쟁만이 있을 것입니다. 지옥은 영원히 희락이 없는 곳입니다. 예배와 희락이 사라지면 그 곳은 바로 지옥입니다.

Ⅲ. 요엘 선지자는 대재앙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명령하고 있는가?

요엘서 1장에서는 네 가지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첫째, ‘깨어라(wake up)’입니다. 5절입니다.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찌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찌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술취하는 자입니다. 술의 노예가 되어서 술에 의존하고 삽니다. 술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대재앙은 이렇게 술 취하는 사람들을 번쩍 정신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애곡하라(lament)’입니다. 8절입니다.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찌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모가 어려서부터 혼인할 사람을 짝지어 줍니다. 결혼을 안했어도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고자 했는데 남편이 죽어버렸습니다. 얼마나 애절하게 울겠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울라는 것입니다.
셋째, ‘부끄러워하라(be ashamed)’입니다. 11절입니다.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찌어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아 곡할찌어다” 농부들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도 밭에 곡식만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내 직장만 안정적이면 되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뭐가 중요하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가지고 주인을 못 알아보는 것은 소보다 못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부르짖어라(cry out)’입니다. 14절입니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몰수히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찌어다” 울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지 말고 진실로 울면서 기도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대재앙이 오면 요엘 선지자는 네 가지를 하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졸던 사람은 깨어나고, 세상을 의지하던 사람은 애곡하고, 직업을 의존했던 사람은 부끄러워하고,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진실로 기도해 보지 못한 사람은 진실한 마음으로 부르짖어 보라는 것입니다.

결론

요엘서 1장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너희는 현세와 내세를 위해서 무엇을 의존하고 있느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너희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안전한 것이냐?”입니다. 술, 남편, 직장, 형식적인 종교를 의존하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은 메뚜기만 보내도 날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완전한 것을 가지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엘을 가리켜서 “오순절의 선지자(prophet of the pentecost)”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요엘서 2장의 내용이 사도행전 2장에 그대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날 이스라엘 백성이 사도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베드로가 답변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온 세계에 대재앙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합니까? 각각 죄를 회개하고, 예수 이름을 믿고,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현세도 행복하고, 내세에도 행복할 것입니다. 현세에도 성령으로 희락이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진정한 희락이 오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현세와 내세에 인간이 의존할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대재앙은 인간을 근본으로 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항상 성령 충만해서 희락이 넘치는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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