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흑암중에 있을 때(이사야 50:10)

날짜 : 2007-10-04
본문 : 이사야 50:10

본문 : 이사야 50:10
제목 : 성도가 흑암 중에 행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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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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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이사야서에는 네 번에 걸쳐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등장합니다(42,49,50,52-53장). 따라서 이사야 50장 4-9절은 세 번째로 기록된 여호와의 종의 노래입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의 종은 학자의 귀와 혀를 가졌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증거 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께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종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를 대적하는 자는 모두 옷같이 헤어지고 좀에게 먹히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이 여호와의 종은 1차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이 이사야 50장의 말씀 중에서도 특별히 10절에 주목했습니다. 최고의 청교도 설교자였던 토마스 굿윈은 10절을 본문으로 해서 ‘빛의 자녀가 흑암 중에 행할 때(The children of light walking in darkness)’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존경하는 침례교 조상인 스펄전 목사님도 같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10절의 말씀을 다룰 때, 주로 구원의 확신이라는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빛의 자녀들이 흑암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의 확신을 잃은 경우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교인이나 로마 가톨릭, 혹은 알미니안주의자들과 다르게 구원의 확신이란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가톨릭 교인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것은 죽은 후에나 알 수 있는 것이지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도들과 청교도들은 죽기 전에도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확신은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우리 침례교도들은 죽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는 확신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이라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10절 말씀에 접근할 때에도 흑암 가운데 행하는 성도들을 구원의 확신을 잃은 성도들로 해석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해석해서 참된 성도가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을 볼 수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주제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1. 참된 성도의 두 가지 표식이 무엇인가?

본문을 살펴보면 두 가지 질문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누구냐?”는 질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너희 중에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 한 가지 질문 같아 보이지만 두 가지 질문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참된 성도의 두드러진 표식을 의문문 형태로 말한 것입니다.
먼저 참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합니다(fear of the Lord).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이 성도의 첫 번째 표식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10장 12절을 통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설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첫 번째로 요구하시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존경하면서도 무서워 할 줄 알라는 명령입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잠언, 전도서를 구약성경의 지혜문학이라고 합니다. 이 지혜문학이 제일 강조하는 것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전도서의 결론인 12장 13절에도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지혜의 기초, 지식의 근본, 사람의 본분,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대명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짐승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개와 돼지는 하나님의 무서움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그 분의 무서움을 잘 압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5장 2절에서 애굽의 바로 왕은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욕하고, 무시한 결과로 열 가지 재앙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 군대와 함께 홍해까지 진입했다가 그 곳에서 군대를 모두 잃어버리는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비참한 말로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에는 초대교회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주를 경외하니 성령의 위로가 임하였고, 그 결과로 교회가 수적인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처럼 주님을 경외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조직신학을 가르치시는 교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신이 아는 한 여자분이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남편이 굉장히 심하게 핍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그 남편이 성경을 모두 찢어서 화장실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그 남편은 그만 병이 들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했다가 죽고 만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하나님을 향해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을 향해서도 저질적인 언어를 마구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인간의 본분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가져야 될 올바른 영혼의 태도입니다.
또한 참된 성도는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합니다. 여호와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이 참된 성도의 두 번째 표식입니다. 우리 문화에서 ‘듣는다’는 단어는 귀로, 혹은 청각적으로 듣는 것만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듣는다’고 할 때, 귀는 듣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문화에서 ‘듣는다’는 의미로 쓰인 ‘샤마’는 귀로 들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듣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따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특징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에서도 예수님은 성도의 특징을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 참된 성도에게 흑암이 닥칠 수 있는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의 음성을 듣는 참된 성도들도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10절 중반에 보면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서에 대해 최고의 주석을 저술한 에드워드 제이 영(Edward J. Young) 박사는 이 문장을 의문문 형태로 재해석했습니다. ‘너희 중에 흑암 중에 행하며 빛이 없는 자가 있느냐?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목사로서 저는 종종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왜 저렇게 경건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어려움을 당하는가? 왜 천국 갈 것이 분명한 저 사람에게 어려움이 많은가? 왜 저런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은 빛을 안 주시는가?’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항상 기쁘고, 복되며, 건강하고, 형통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기쁘고, 복되며, 건강하고, 형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목회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목회하는 목사들은 수많은 성도들을 대하면서 항상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항상 기쁘고 잘 된다는 것은 성경적인 사상도 아닐뿐더러 위험한 주장입니다. 만약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울고 있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란 말입니까? 연약하여 병상에 있는 성도들은 성도가 아닙니까?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성도 역시 성도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모두 성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의 음성을 청종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흑암 가운데 행하며 빛을 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성도들은 지옥의 흑암, 마귀의 흑암, 사망의 흑암, 무지의 흑암에서는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지옥이라는 흑암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도 인생을 살다가 환란의 흑암,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의 흑암에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도들은 세상 가운데서 때때로 환란의 흑암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증거는 성경에 아주 많이 나타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욥은 당대 최고의 의인이었습니다. 대단히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욥을 이상하게 대하셨습니다. 재앙에 재앙을 더하셨고, 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재산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가 하면, 자식들도 하루아침에 모두 죽어버렸고, 그나마 남아 있던 건강까지 모두 잃었습니다. 욥 자신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욥의 친구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욥에게 모든 죄를 토해놓고 회개하라고 말하면서 그를 정죄했습니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던 고통의 흑암, 빛을 볼 수 없는 흑암이 욥에게 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자아내는 책은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서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슬픈 장면을 보면 눈물이 나오듯이 예레미야애가를 읽으면 눈물이 절로 나옵니다. 예레미야의 부르짖음은 욥의 부르짖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20장 14-18절을 통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라고 탄식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동족인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죽거나 환란을 당하는 것을 보고 흑암의 깊은 곳에서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흑암의 때가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5-41절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건너편인 거라사 지방으로 가는 도중에 갈릴리 바다 한복판에서 풍랑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결이 배에 부딪히고, 물이 점점 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침몰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고물은 배의 앞 부분, 즉 선수를 가리키고, 이물은 배의 뒷부분, 즉 선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배가 가라앉아 모두 죽게 되자 제자들은 잠들어 계신 예수님을 깨우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이 깨우자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시자 바람도 바다의 풍랑도 모두 그쳤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본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아니, 바다와 풍랑을 향해서도 명령하시는 이 분은 도대체 누구신가?”라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흑암의 때가 있었지만, 예수님께도 흑암의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외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도 십자가상에서 울부짖으셨던 흑암의 때가 있었습니다.

3. 흑암 중에 할 일은 무엇인가?

빛이 없는 흑암에 처할 때, 참된 성도들은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오늘 분문이 그 답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줍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 어떤 분들은 특별한 말씀도 아니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분들은 사도행전 17장 21절에 등장하는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은 매일 새로운 사상만 찾아 다녔습니다. “새로운 사상과 철학은 없는가? 소크라테스도, 피타고라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두 지나갔는데 더 새로운 것은 등장하지 않는가?” 이처럼 아테네 사람들은 새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목회가 잘 안 될 때마다 새로운 방법이 있는가 하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느라 바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니 오히려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온고지신’이란 성어처럼 옛 것을 알면 새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뭔가 대단하고 새로운 것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래되고 검증된 진리, 수 천년동안 체험으로 확증된 진리를 전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 묵은 진리를 통해 성도가 흑암에 처했을 때 행할 바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첫째로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인데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이름’이라는 이상한 표현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34장 6-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의 앞을 지나가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 다음에 하나님의 성품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많아 천 대까지 베푸시고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받아주십니다. “하나님! 제가 인생을 잘못 살았습니다. 저는 여호와 앞에 허물이 큰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 저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신뢰하고,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자비와 은혜와 용서와 천대까지 이어지는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향해 대들며 막말하는 사람의 죄는 결단코 간과하지 않으시고 삼사대까지 그 죄 값을 갚으십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능력이 없어서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그저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의 후손들 삼사대에게까지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살다가 흑암에 처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자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건강하고, 다른 한 사람은 매우 약합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여행을 하다보니 물과 음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오아시스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약한 사람은 그야말로 쓰러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때, 강한 사람이 말합니다. “여보시오. 나에게 기대시오. 아니면 업혀도 좋소.” 그래서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에게 기대어서 사막을 횡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기대는 사람을 귀찮아하거나 뿌리치지 않는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신실하며 의지할만한 분이십니다. 혹시라도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고민의 짐, 고통의 짐을 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짐을 홀로 지지 마시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저는 시편 55편 22절을 매우 좋아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인생길을 가다가 어려운 짐을 지게 되면 언제든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시간이 지나고 자연스럽게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상담 받겠다고 쫓아다니지 않아도 하나님께 맡기면 95% 이상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해결됩니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하나님께 맡기면 그 분께서 여러분의 짐을 대신 지시고 붙드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 론

시편 112편 4절은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난다는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여호와를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사람은 흑암 중에 처하여 빛이 없는 상황이 되어도 반드시 일어나는 한 줄기 빛을 보게 됩니다. 캄캄한 동굴 속을 걸어갈 때, 어디선가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한줄기 빛만 있어도 우리는 입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흑암을 지나도 하나님께서 빛을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욥에게 닥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빛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가진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주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욥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욥아!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하마를 만들 때, 하늘의 별을 지을 때 네가 거기에 있었느냐? 너의 지혜와 나의 지혜를 감히 비교할 수나 있느냐?”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전에는 귀로 듣기만 하였으나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티끌에 앉아 회개하나이다.” 욥이 이처럼 하나님께 회개하고 나아가니 하나님께서 빛을 주셔서 두 배의 복을 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흑암이 찾아 왔지만, 이 흑암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합니다. “70년이 지나면 빛이 찾아 올 것이다.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망하게 하고 너희를 해방할 것이다.” 이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전 538년에 반포된 고레스 칙령을 통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흑암을 지나는 분은 안 계십니까? 나의 삶은 왜 이렇게 흑암으로만 뒤덮여 있는지 고민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무거운 짐은 하나님께 모두 맡기십시오. 피곤하고 연약한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께 기대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 반드시 빛이 일어날 것입니다. 빛이 일어나는 삶을 경험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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