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이사야 51장 9-11절
제목 : 네 종류의 위로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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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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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지난주에는 이사야 50장을 통해 성도가 흑암 중에 행할 수도 있으나, 기도를 하면 흑암 중이라도 빛이 일어난다는 말씀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이어지는 이사야 51장은 성도에게 일어나는 빛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감을 얻어 위로하는 대상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다 백성들입니다. 집에서 멀리 떠나와 돌아갈 곳도 없고, 자유와 평안이 없는 상태가 계속 되었습니다. 성전은 파괴되었고, 성전이 있는 시온성, 즉 예루살렘을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 곳은 사막같이 황폐해졌습니다. 이때의 유다 백성들의 심령을 가장 잘 표현한 시가 시편 137편입니다. 1절과 3절을 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의 백성들에게 “너희가 고향에 돌아왔으니 고향 노래를 하나 불러서 우리를 기쁘게 해보라”고 조롱합니다. 그러자 유다 백성들은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 137:4)’라고 참담하게 대답합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다 백성들의 심령은 참담하다 못해 영혼의 가장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쳐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백성들을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은 위로하는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의 언약백성을 위로하신 하나님께서는 신약의 언약백성인 우리를 또한 위로하십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51장에는 네 종류의 위로가 등장합니다.
1. 광야가 에덴으로 변하는 축복이 임한다
첫째로 광야가 에덴으로 변하는 축복의 위로가 임합니다.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3).’ 시온은 예루살렘,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수도를 가리킵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족장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제일 먼저 땅의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이 가나안 땅을 너와 너의 후손에게 영영히 주리라.” 그 다음에는 자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으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 이처럼 다른 어떤 약속보다도 땅의 약속이 제일 먼저 등장합니다. 언약이 반복적으로 갱신될 때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도 ‘가나안 땅을 영영히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는 약속입니다.
가나안 땅은 언약 백성인 유다 백성들의 순종과 불순종을 구별해주는 지표가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백성이 불순종한다면 땅은 소산을 내지 않고, 열매도 맺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이 백성들을 토해냅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까닭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가나안 땅을 다시 위로하십니다. 위로하시되, 마치 광야가 에덴동산처럼, 사막이 여호와의 동산처럼 변하듯 위로하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던 곳에 열매를 맺는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언약백성들에게 그림책처럼 보여주신 이 진리는 신약의 언약백성들에게 영적인 실체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불순종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황폐해지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면 교회는 다시 열매를 맺고 영적으로도, 숫자적으로도 부흥을 이룹니다. 이것이 참된 부흥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봐도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늘 하나님의 백성들의 타락과 부패가 극에 달했습니다. 16세기에는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기 전에 교회가 교리적으로 부패하고 윤리적으로 타락했습니다. 타락과 부패가 극에 달해 교회를 교회라고 부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18세기에 영국의 복음적인 대각성 운동(evangelical awakening)이 일어나기 전에도 영국 사회는 음주라는 거대한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음주는 국가적인 저주였으며, 사람마다 술에 취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가 일어나서 부흥 운동을 일으킴으로서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고, 음주의 문제는 사라졌으며, 교회는 다시금 부흥되었습니다. 17-18세기에 일어났던 미국의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언제나 타락과 부패, 그리고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자 진리가 회복되고, 구원과 성결과 선교의 열매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부흥운동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우리의 삶이나 영적 생활도 사막, 혹은 광야와 같이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면 우리의 심령이 다시 기름진 밭으로 변하여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 없던 영혼이 열매 맺는 영혼으로 변화됩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하나님의 교회 위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영원한 구원의 영광을 보게 된다
두 번째 위로는 영원한 구원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 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 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6-8).’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말씀을 두 번 반복하십니다. 6절 후반에서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며. 8절 후반에서는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6절에는 구원이, 8절에는 의가 먼저 나왔으나 사실상 내용은 같습니다. 구원이 영원하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면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늘과 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비방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과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좀먹은 옷처럼 사그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신 의는 영원합니다. 교회는 구원의 영원한 영광을 새롭게 깨달을 때에 부흥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영원한 영광을 깨달은 사람의 영혼에 부흥이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고 기도했습니다. 무엇이 영광스러운 것인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의 권력이 영광스럽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재물이 영광스럽습니까? 물론 권력과 재물과 명예도 영광스럽습니다마는 그런 영광은 일시적이며 모두 지나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이 아닙니다. 반면에 구원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과 하나님의 교회는 구원의 영원한 영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영원 전부터 우리 각 사람을 사랑하시고 미리 구원하기로 예정하셨습니다.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죄에 빠진 우리를 건지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사 우리의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 우리의 죄 값을 모두 갚으셨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악한 세상을 살아갈 때에 방황하거나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 속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성도들은 성령을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모시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가 추구하는 바를 이해할 수도, 따라올 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모여서 함께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친히 교회의 머리로 세우셨으며, 교회마다 직분자를 세우셔서 그 직분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모든 일들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우리의 육신이 연약해지고 병들어 죽어도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하늘의 처소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재림하셔서 영원한 하늘과 땅을 새롭게 만드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부활을 주셔서 썩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는 육신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 진리들이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때에 누릴 축복과 영광은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눈으로 본 적도 없으며, 귀로 들은 적도 없는 극상의 축복입니다. 이런 영광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구원의 영광을 망각하고 감사하지 않으면 기껏해야 세상의 정치와 경제 밖에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정치와 경제에는 아무런 영광이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한들 일시적일 뿐입니다. 영원한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뿐입니다. 이와 같은 구원의 영원한 영광을 여러분의 영혼 속에 새롭게 깨닫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요, 참된 부흥입니다.
3. 미래의 축복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
세 번째 위로는 미래의 축복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 양식이 핍절하지도 아니하리라(11-14).’ 바벨론에 포로 된 백성들은 슬픔과 탄식, 그리고 정복자들의 학대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나타날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비록 학대 받으며 탄식과 슬픔 속에 젖어 있지만 유다 백성들은 아름답고 축복된 미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면 성도들은 축복된 미래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미래는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삶이 광명한 해가 돋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영광스러울 뿐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장래에 대해서 언제나 좋은 것을 말해야 합니다. 장래에 대해서 어둡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속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아니라 악령을 모신 사람들은 언제나 미래를 어둡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에 갈 것이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말만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신 사람들의 장래는 어두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망하기는 모두 틀린 사람들입니다. 슬픔과 탄식과 학대하는 자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설령 학대하는 자들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악령일 뿐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수천만의 악령들이 몰려와도 한 분이신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학대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우리는 육신적으로 죽지 아니하며, 영적으로도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양식이 핍절하지 않는 즐거움과 기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면 이와 같은 축복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앞길은 언제나 밝은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비록 내 인생이 시궁창에 거꾸로 박혀 있기라도 한 듯 괴롭고 슬프다고 할지라도 조금만 기다려보십시오. 그렇다면 영광스러운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도 없을만큼 슬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그 앞길에 영광스러운 미래를 예비하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들은 어둡지 않습니다. 어두운 사람은 주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슬픔 속에서도, 좌절 속에서도, 바벨론에 포로 된 상황 속에서도 밝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현재가 괴로워도 미래가 밝으면 사람은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요, 이런 심령으로 변하는 것이 참된 부흥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위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다른 존재들도 가끔은 위로를 합니다. 예를 들면 점쟁이들도 당신의 앞길이 잘 될 거라는 둥 위로를 합니다. 그러나 점쟁이들의 위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고, 책임져줄 능력도 없습니다. 그냥 복채 받으려고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지 그 말에는 아무런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가 밝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뒷받침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불확실한 소망이 아니고 확실한 소망이며, 불완전한 소망이 아니고 안전한 소망인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선언을 듣게 된다
네 번째 위로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선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려 하였음이니라(16).’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책을 많이 썼다 해도 공자와 맹자는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호메트가 아무리 종교적인 기술이 탁월하다고 해도 중보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석가모니가 아무리 큰 깨달음을 얻었다한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아닙니다. 그는 중보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서 계시는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섰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이미 천국에 간 성도들이 우리를 둘러 서 있습니다. 그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집니다. “네 죄를 네가 알지니라!” 그렇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 “제 죄를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천국에 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와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이 사람은 내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나에게 맡겨주신 백성이요, 내가 이 사람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예수님의 이 한 마디에 천국의 문이 열리고 우리는 영원한 축복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얼마나 귀중하고 영광스럽습니까?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어떤 다른 도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도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탁월한 종교적 기술을 발휘하여 귀신도 잘 내 쫓고, 기적도 일으키며,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 사람도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께 자신 있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는 귀신도 많이 쫓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기적도 많이 일으켰습니다. 저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죠?” 그러나 그 때에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난 너를 모른다. 내가 성령을 네 속에 보내준 적이 없다. 네가 한 모든 짓은 성령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악령으로 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행한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 이 얼마나 비참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와 같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마 7:22-23). 아무리 종교적으로 탁월한 기술자라도 주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천국문이 닫혀 있고, 영원한 지옥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비록 죄로 말미암아 빛도 없는 흑암에 빠진 주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참된 주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것이 부흥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북을 치고 큰 소리로 부흥회를 한다고 해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저도 부흥회를 하고 나서 허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면 참된 부흥이 옵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가정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 추석 명절에도 여러분은 절대로 우상숭배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절한다고 해서 같이 가서 절하지 마십시오. 죽은 조상이 와서 음식을 먹는다는 거짓말도 믿지 마십시오. 살아계실 때는 식사 대접 한 번도 안한 사람들이 돌아가신 후에는 잔뜩 차려놓고 과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정작 돌아가신 분들은 먹지도 못할 음식들을 귀신이 와서 먹는다는 핑계로 부지런히 차립니다. 귀신은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5초만 잘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이론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음식 앞에서 절하지 마시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상숭배하는 가족들을 구원해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가족들이 이처럼 우상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들을 구원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여러분이 기도하면 가족들이 왜 절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것입니다. 그러면 가족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노라고 대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한 달 후에 추석을 맞이했습니다. 모든 식구들이 큰 집에 모여서 추석을 보내는데, 큰 집 식구들과 우리 집 식구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을 차리고 모두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서서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이 왜 절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절을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가족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형수님이 꿈을 꿨는데 한 쪽에는 절이 있어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고 있고, 한 쪽에는 교회가 있어서 목사님 한 분이 성경을 가지고 서 있더랍니다. 형수님이 절과 교회 사이에 나 있는 길을 걷고 있는데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다 말고 형수님에게 “우리가 졌으니까 교회로 가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형수님은 그 꿈을 꾸고 나서 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형님도 형수님을 따라 교회에 나가서 지금은 안수집사가 되었습니다. 큰어머니께서도 교회에 나가서 방언도 받으시고 신앙생활 잘 하시다가 소천하셨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절한다고 해서 같이 절하는 것만이 가정의 화목을 지키는 길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지켜 우상을 멀리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절하지 말고 가족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래야 가족 구원이 이뤄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음식 차릴 때도 남보다 먼저 가서 일도 잘 도와주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사람이 먹는 거니까 음식은 차려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식구들이 음식을 다 차려놨는데 그 때야 가서 “교회 다녀오느라고 늦었다”고 변명하면 그 분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전도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루 일찍 가서 일도 좀 더 하면서 전도하세요. 그러면 전도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결 론
부흥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 1절의 전반부에 보면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들을찌어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 위로하겠다!”고 선포하시면서 네 가지 위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좇는다는 것과 여호와를 찾아 구한다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여호와를 찾는다(seek the Lord)’는 것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가 찾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릴 수 없는 분입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나갈 때 방해물이나 어려움이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이런 방해물과 어려움을 헤치고 나아가서 주님을 찾는 것이 바로 본문이 말씀하는 ‘여호와를 찾는다’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려고 하면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졸음이 최고의 방해물입니다. 혹시라도 불면증이 있는 분들은 레위기를 처음부터 읽어보십시오. 아니면 요한계시록을 읽어보십시오. 금방 주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농담이지만 졸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방해합니까? 그러니까 졸음을 물리치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또 기도하려고 해도 방해물이 나타납니다. 기도에 집중하려고 하면 핸드폰이 울려서 통화하는 바람에 방해를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뿐만 아니라 예배드리러 올 때도 방해물이 많습니다. 예배드리기 한 두 시간 전에 부부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에 가자고 하면 배우자가 안 일어나거나, 옷 입다가 꾸물거리거나, 화장이 덜 끝났다고 하는 바람에 말다툼이 시작되고 급기야 부부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도 예배 시간에 우리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헌금을 드릴 때에도 ‘이거 내면 누가 알아주기나 하나? 이 돈이면 맛있는 음식을 사먹을 수 있을텐데’하는 마음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했으나 사람들에게 가로막혀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지붕을 뜯고 침대에 줄을 매어 내려갔을 때, 예수님께 병을 치료받고 죄사함을 얻는 은혜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어떠한 방해와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모두 물리치시고 주를 찾는 심령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네 가지로 위로하십니다. 바짝 마른 심령에 열매를 맺게 하시고, 현재는 괴롭지만 축복된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시며, 우리의 영혼에 복을 주심으로 기름진 심령이 되게 하실 것이고, “너는 내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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