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이사야 52:7~10)

날짜 : 2007-10-17
본문 : 본문 : 이사야 52장 7-10절

본문 : 이사야 52장 7-10절
제목 :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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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8 들을찌어다 너의 파숫군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9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찌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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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저는 지난주에 서울 근교의 시골에서 목회하시는 어떤 목사님과 사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목회를 시작한지 만 20년이 지났는데,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성도수가 60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부지런히 전도해서 10명이 등록하면 10명이 이사를 가고, 20명을 전도하면 20명이 또 다른 곳으로 가는 바람에 60명을 유지하기도 몹시 어려웠으며, 교회가 이처럼 부흥이 되지 않자 사모님은 우울증에 걸리고, 목사님은 크게 낙담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었습니다. 아마도 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21세기 초반의 한국 교회가 대부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야할 것인지를 오늘 이 시간에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언제나 목회자로서 멘토를 삼는 분은 19세기 침례교의 위대한 조상인 찰스 스펄전 목사님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오늘 본문의 10절을 중심으로 ‘위대한 부흥(The great revival)’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이 설교를 전할 때의 나이가 24살이었는데, 그는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1,200명의 회중에게 설교를 하고 있지만, 새로운 성전을 짓게 되면 6개월 이내에 2,000명 이상의 회중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이 설교를 할 때가 1858년이었는데, 그로부터 3년 뒤인 1861년에 6,000석 규모의 메트로폴리탄 태버네클을 헌당하였습니다. 메트로폴리탄 태버네클은 당시 런던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회가 되었고, 무려 10,000명 이상의 성도들이 그 곳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는 위대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부흥 설교를 자꾸 하더니 결국 부흥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스펄전 목사님이 1858년에 ‘위대한 부흥’이라는 설교를 한 이유는 그 당시에 일어난 미국의 제3차 대각성 운동에서 자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서 대각성 운동이 세 번 일어났습니다. 제1차 대각성 운동은 1726년에 시작하여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된 1776년까지 50년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1차 대각성 운동은 식민지 시대의 부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차 대각성 운동은 독립전쟁에 성공한 미국 사람들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800년부터 1850년까지 그들은 서부의 개척지에서 텐트를 치고 기도하면서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2차 대각성 운동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대각성 운동은 1857년에 시작하여 1858년까지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3차 대각성 운동이 1, 2차 대각성 운동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대각성 운동의 주역이 주로 평신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1, 2차 대각성 운동이 주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면에, 3차 대각성 운동은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평신도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자발적으로 기도모임을 시작한 것이 큰 역사를 이루어서 1857년부터 2년 동안 무려 백만 명 이상이 교회에 새로 등록하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주로 그 당시에 뉴욕시에 살던 상인들을 중심으로 부흥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상인들의 부흥(the businessmen's revival)’, 기도 부흥(prayer revival), 혹은 ‘평신도 부흥(the laymen's revival)’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별명으로 불리는 것이 바로 제3차 대각성 운동입니다.
1857년에 미국의 상황은 대단히 심각했습니다. 미국의 모든 은행들의 기능이 정지되었습니다. 단순한 경제 공황이 아니라 은행 공황이 찾아온 것입니다. 은행에 돈을 맡겼다고 해서 언제나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은행이 망하면 은행에 맡긴 돈이 모두 휴지조각이 됩니다. 그래서 은행에 돈을 맡겨 놓고 먹고 살만하다고 하던 큰 부자들이 하루아침에 거지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번 IMF가 찾아왔을 때, 대전에 있는 한 은행이 망해버려서 거기에 돈을 맡겨뒀던 사람들이 큰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까? 1857년의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살인과 자살이 늘어나고, 길거리에는 노숙자가 늘어났으며, 몸을 파는 여인들이 길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런 상황이 오기 직전의 미국 사회는 물질숭배사상이 만연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돈을 사랑했습니다. 청년들에게 교회에 오라고 하면 돈 벌러 가야 한다고 거절했습니다. 장년들에게도 교회에 오라고 하면 주일에 가게를 열어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 가지 못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교회마다 장년도, 청년도, 주일학교도 텅텅 비는 상황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돈을 더 사랑하자 이런 부패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국 사회를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의 심장부인 은행을 치셨고, 은행 공황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따랐던 돈은 모두 휴지 조각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미국 사회가 온통 공황으로 허덕이던 1857년 9월에 제레미야 램피어라는 사람이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이 사람도 경제적으로는 망했지만,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노숙자들에게 열두시부터 한시까지 교회에서 열리는 기도모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전단지를 나눠주었습니다. 우리가 이왕에 이렇게 망했으니 잠시 하나님의 집에 들러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자 노숙자들은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겠냐고 생각하며 기도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주에는 여섯 명밖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 다음 주에는 20명, 그 다음 주에는 40명으로 참석자 수가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여섯 명으로 시작된 9월의 기도모임이 11월에 가서는 무려 1만 명의 상인들이 모이는 대규모 기도모임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상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은행 공황이 찾아와서 우리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며, 우리에게 부흥을 보내주시옵소서!”
찬양 인도도, 설교자도 없고 10분이든, 20분이든 자유롭게 모여서 기도하는 이 모임은 급기야 뉴욕 타임스의 사설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강남중앙침례교회의 12시 기도모임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사설에 기록되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미국 전역에 이 소식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미국에 동일한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흥의 여파로 1858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한 주에만 5만 명의 새신자들이 교회에 등록하는 기록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2년 동안에 무려 백만 명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고, 미국은 은행 공황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대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와 같은 부흥을 보고 싶습니다. 제가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동안에 이와 같은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의 사설란에 우리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전역에서 부흥이 불이 일어나며, 전 세계에도 부흥이 불길이 퍼져가는 역사를 보고 싶습니다. 물질숭배 사상과 방탕한 문화는 모두 깨어지고, 사람들마다 모여서 땅 값, 주식동향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을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알게 되는지, 어떻게 하면 함께 모여서 기도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은혜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52장은 유다 역사에 일어날 큰 부흥에 관한 예언입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유다 백성들이 시온으로 돌아오는 큰 구원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구약의 세익스피어라고도 불립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서의 문체가 수려하고 그림 같은 묘사가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바라는 부흥을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부흥 전의 상황

1857년 뉴욕에 큰 은행 공황이 일어났듯이,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유다 백성들은 국가적인 공황 상태에 직면했습니다. 그들은 돈도 받지 못하고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5절 후반을 보면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백성을 향하여 “너희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했느냐? 너희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째서 너희가 여기까지 끌려와서 포로가 되었느냐?”고 조롱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떠든 것입니다. 이 때의 유다 백성들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시편 44편입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시 44:12-16).’ 바벨론 사람들은 유다 백성들을 종일 놀리고, 능욕하고, 조소하고, 조롱하고, 비방하며 후욕했습니다.
급기야 바벨론의 왕이었던 벨사살은 느부갓네살 왕이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고 노략한 하나님을 섬기는 그릇에 술을 부어 마시고 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을 쓴 것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메네’라는 말은 ‘계산하다(count)’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나라의 시간을 계산해보니 끝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겔’은 ‘무게를 재었다(weigh)’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벨사살 왕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재어보니 자격이 미달인 왕으로 판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바르신’은 ‘나뉘었다(devide)’는 의미입니다.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파사 사람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들은 다니엘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도 조롱하고, 백성도 조롱합니다. 부흥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은 모든 그림의 색깔이 어둡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조소, 비방, 능욕, 후욕, 압박, 핍박과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고,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시온성, 즉 예루살렘 성에는 ‘티끌이 쌓여 있는 황폐한 곳’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너는 티끌을 떨어버릴찌어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찌어다(2, 9절).’ 시온성이 황폐해지고 티끌이 쌓여갔지만 유다 백성들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탄식하며 위만 바라보았습니다. “여호와여! 이와 같은 상황에 처했으니 우리를 살려주소서!”

2. 부흥의 전령들

이런 현장에 부흥의 소식을 알리는 전령들이 나타났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들을찌어다 너의 파숫군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7-8절).’ 바벨론과 예루살렘 성 사이에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산입니다. 그런데 파수꾼들이 시온성을 지키는 동안 높은 산꼭대기에 전령들의 발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산꼭대기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파수꾼아! 들어라! 바벨론이 멸망했다. 유다가 해방되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칙령을 발표했다. 우리는 다시 시온성으로 돌아간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신다. 기뻐하라!” 그러자 파수꾼들은 그 소리를 듣고 “아! 저 높은 산에 선 전령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노래하면서 함께 기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했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부흥은 전령들로 인해 나타납니다.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인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 전도자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 신학의 복음’입니다. 바울이 계시를 받았고, 어거스틴이 발견했으며, 루터와 칼빈이 재조명한 하나님의 주권신학의 복음이 부흥의 전령들이 전해야 할 소식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평생을 가르쳤고, 20세기에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증거하였으며, 제게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증거하라고 명하신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신학의 복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복음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바벨론, 즉 죄의 포로에서 해방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다는 복음이 하나님의 주권신학의 복음입니다. 참된 복음이 없다면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도 부흥이 아닙니다. 인간의 화려한 언변이나 신령한 기적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부흥이 아닙니다. 기적은 불교에도, 크리스챤 사이언스나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들에게도 나타납니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는 아닙니다. 참된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흥은 참된 복음을 전파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3. 부흥의 원동력

설교자들은 부흥의 전령들이지 부흥의 원동력은 아닙니다. 부흥의 원동력은 오로지 하나님뿐이십니다. 부흥의 바람은 성령의 바람뿐입니다. 참된 부흥사는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저는 목사인데, 저의 타이틀은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목사 뒤에 다른 말을 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라는 직분보다 부흥사라는 단어를 즐겨 쓰시는데 저는 사람이 그런 직함을 붙이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유일하신 부흥사는 성령 하나님 한 분 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8-10절을 통해 우리는 부흥의 원동력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시온성으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돌아오시되 그냥 돌아오지 않으시고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어감이 불분명한데, 영어성경을 보면 ‘bare his holy arm’, 즉 그 분께서 거룩한 팔을 걷어 붙이셨다(bare)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성을 찾아오시되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팔을 걷어붙이고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팔을 걷어붙이시고 그 자녀들의 역성을 들어주시며 위로하십니다. “누가 우리 자식들을 건드렸느냐?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 자식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간 녀석들이 누구냐?” 부흥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팔을 걷어붙이시고 모든 것을 회복하십니다. “누가 내 자식들을 병들고 괴롭게 했느냐? 누가 시온성을 황폐하게 만들었느냐? 내가 시온성을 에덴처럼, 물댄 동산처럼 다시 만들겠다. 누가 내 백성의 머리에 재를 끼얹어 놨느냐? 내가 재를 다 씻어 주고 내 백성을 보좌에 앉게 해주리라. 누가 내 백성의 목에 줄을 매어 놓았느냐? 내가 모두 풀어 주리라. 누가 내 성중에 할례 받지 못한 부정한 자들을 놓아두었느냐? 내가 그들을 모두  쫓아내리라. 누가 내 백성에게 더러운 옷을 입혀 놓았느냐? 내가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제가 어렸을 때, 동네 깡패와 싸우다가 얻어맞아서 코피가 터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동네 깡패 녀석이 싸움을 잘해도 우리 어머니께서 팔을 걷고 나오시면 모든 사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동네 깡패는 도망가고, 어머니는 내 코피를 닦아주시며 집 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머리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도 부흥의 상황을 마치 그림처럼 그려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팔을 걷으시고 교회에 다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팔을 걷으시고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찾아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일을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백성들도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도 하나님을 찾고 사모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부흥을 본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저는 부흥에 목마릅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는 부흥을 보았는데 그 후로는 오랫동안 부흥을 보지 못했습니다. 거짓된 기적은 난무하지만 참된 부흥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1857년의 미국처럼 물질숭배사상이 팽배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사랑합니다. 돈을 부지런히 버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도 열심히 돈을 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돈이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뿐인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 사람들이 돈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 것인지, 교회에 올 것인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돈 버는 것을 택합니다. 이것이 물질 숭배 사상입니다. 성도덕이 타락하고 부패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불신앙이 득세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헌금을 드려서 짓는데, 절은 한 분이 잠깐 사인만 하면 후딱 지을 수 있습니다. 불신앙이 득세하는 사회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우리나라가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할 때에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멸망이 홀연히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결 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색깔은 매우 어둡습니다. 그러나 색깔이 어둡다고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두운 색깔이 지나고 나면 곧 바로 밝은 빛이 오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흥의 전야입니다. 우리는 어두울 때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부흥을 주시겠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이 강단에서 설교하고 있는 동안에 부흥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부흥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제가 부흥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부흥은 오직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일어납니다.
부흥을 기다리는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두 가지를 명령합니다. 첫째로 깨어야 합니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1절).’ 멀쩡하게 눈 뜨고 있는 사람에게는 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잠자고 있으니까 깨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깨어라’는 명령은 대부분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없는 부흥은 없습니다. 기도가 선행되어야 부흥의 불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자리에 주일 낮에만 교회에 오시는 분이 계십니까? 금요철야도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주 금요철야에 남전도회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서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금요철야는 오후 9시 30분부터 시작합니다. 그 시간에 연속극만 보지 마시고 기도하십시오. 잠에서 깨야 합니다. 금요철야 뿐만 아니라 새벽기도회, 수요예배도 있습니다. 언제든지 오셔서 기도하십시오. 램피어 한 사람이 기도를 시작해서 미국에 3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불을 다시 보내주시도록, 다시 팔을 걷어붙이시고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도록,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으로 뜨거워지고 우리 교회 위에 하나님의 위로를 다시 보내주시도록 깨어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명령은 ‘떠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11절).’ 우리는 죄와 불의를 떠나야 합니다. 죄와 불의와 싸움과 다툼이 있는 곳에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와 불의를 떠나서 스스로 정결케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왜 바람을 피웁니까? 성도들이 왜 술을 마십니까? 왜 성도들이 사람을 음해하고 악한 일을 저지릅니까? 우리는 그와 같은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잠에서 깨고, 불의를 떠나 스스로 정결케 하면 시온성으로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만간 우리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지체하지 않고 부흥이 찾아올 것입니다. 부흥을 위해서 깨어 기도하며 정결케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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