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종의 수난(이사야 52:13~53:9)

날짜 : 2007-10-17
본문 : 이사야 52장 13절 ~ 53장 9절

본문 : 이사야 52장 13절 ~ 53장 9절
제목 : 여호와의 종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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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15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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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이사야서에는 네 번에 걸쳐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등장합니다(42, 49, 50, 52-53장).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종의 네 번째 노래이자 마지막 노래입니다. 저는 본래 오늘 설교의 제목을 ‘여호와의 종의 승리’라고 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52장 13절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받들어 높이 들려 존귀하게 되리라(lifted up and highly exalted)’는 것 이상의 승리의 선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여호와의 종의 승리’라고 제목을 정했는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 승리가 거저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엄청난 수난을 통해서 온 것입니다. 영광은 언제나 고난 뒤에 오는 것이 성경의 순서이며, 인생의 진리입니다. 고난도 당하지 않고 영광만 차지하려는 것은 도둑심보입니다. 우리의 격언 중에도 고진감래, 즉 쓴 것이 지나가야 단 것이 온다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지금 씁쓸한 인생을 겪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쓴 것 뒤에 단 것도 올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도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라고 기록되었고, 히브리서 2장 9절에도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언제나 고난 뒤에 영광이 찾아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전하기 전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먼저 전하는 것이 옳은 순서라고 생각하여 오늘 본문의 제목을 ‘여호와의 종의 수난’이라고 바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여호와의 종이 왜 수난을 당하셔야 했는지에 대한 네 가지 질문을 먼저 던져보고 그 답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수난의 정도(degree)는 어떠했는가?

몇 년 전에 상영되어 화제가 되었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이 수난의 사실성을 잘 표현했던 영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어떤 영화로도, 어떤 그림으로도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난을 모두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52장 14절을 보면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외관은 본래 흠모할 만한 것도,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외관인데(3절), 고난을 통하여 그 외관이 더 일그러지고 인생보다 상한 것입니다. 인생보다 상하였다는 말은 인간인지 아닌지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모습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맞고, 찢기셨으면 인간인지 아닌지도 몰라볼 정도가 되셨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사야 53장 5절에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찔림’이라는 말은 관통했다는 의미입니다. 창이 예수님의 심장 끄트머리에 살짝 닿은 정도가 아니라 꿰뚫고 몸 밖으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상함’이라는 말은 살짝 상처를 입은 정도가 아니라 짓이김을 당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창이 예수님의 몸을 관통하여 심장이 터지고,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을 그와 같이 능욕하였어도 잠잠하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7절).’ 세 번째 여호와의 종의 노래인 이사야 50장 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로마 병정들이 사용하는 채찍의 끄트머리에는 쇠붙이와 뼈 조각이 붙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으로 한 번 등을 후려치면 살점이 떨어지고, 혈관이 끊어져 피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채찍에 맞으면서도 그들에게 잠잠히 등을 내맡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수염을 통째로 뽑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사람이 머리카락 하나만 뽑아도 따끔한 법인데, 그들은 예수님의 수염을 아예 통째로 뽑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잠잠히 뺨을 맡기셨습니다. 그들이 욕을 하고 얼굴에 침을 뱉어도 얼굴을 돌리지 않고 잠잠히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폭력은 실제였고, 그 분이 맞으신 채찍은 가장 고통스러운 채찍이었으며, 그 분께서 흘리신 보혈은 실제로 사람의 피였습니다. 그 분은 사람이 당하는 실제적인 모욕을 모두 당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 가운데는 ‘가현설’이라는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현설이란 예수님은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고, 실제로 수난을 당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된 사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수난을 받으셨습니다. 생명을 가지고 호흡하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극한적인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2. 수난의 본질(nature)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극한적인 수난을 당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수난의 본질(nature of suffering)은 무엇일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수난이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그 분의 수난은 다른 사람을 위한 수난이요, 다른 이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대속적인 수난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이 본문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시면 ‘우리’라는 단어 대신 ‘나’라는 단어를 넣어서 이사야 53장 4-6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실로 나의 질고를 지고 나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나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나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내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내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우리’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바로 질고와 슬픔과 허물과 죄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질고는 육신의 연약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육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병은 하나도 없고, 완전하게 건강하신 분들만 손을 들어보시라고 해도 손을 들 수 있는 분은 아마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질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슬픔과 허물과 죄악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질고와 슬픔과 허물과 죄악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연약한 육신 위에 얹으시고 그 형벌과 저주를 대신 담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대속적인 수난(substitutionary suffering)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3-4).’ 우리를 대신하여 수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멸시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저 분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처럼 하나님께 형벌을 받는가’라고만 생각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대속적인 수난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와 학문으로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1절).’ ‘누가 믿었느뇨’라는 말씀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있을 때에만 우리는 메시야 수난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성령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이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수난의 기원(origin)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극한적인 고난을 대신 받으셨다면, 이 수난의 기원(origin of suffering)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누구로 말미암아, 무슨 연고로 이런 수난을 받는 것일까요? 이사야 53장 6절 후반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어가 ‘여호와’입니다. 53장 10절 전반의 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요, 성자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것이요, 성령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기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팔고, 불법 재판을 하며, 폭력을 가한 악인들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들은 각각 자기의 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만약 가룟 유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제가 은전 30냥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서 십자가에 달리셨으니, 예수님께서는 저 때문에 그 사명을 이루신 것이 아닙니까? 저는 공로자입니다. 제게 상을 주십시오”라고 요청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네가 악을 행하였으니 너는 네 악을 담당하고 지옥으로 가서 죽을지니라”는 대답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 또는 악 속에서 그 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지만 악을 행한 인간은 “제 악으로 하나님께서 계획을 이루셨으니 제게 상을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악을 따라서 책임을 지고 심판을 받을 뿐입니다.
악인들에게 능력이나 권세가 많아서 예수님께 수난을 준 것이 아닙니다. 수난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창세전에 세워주신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있습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 진리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사도행전 2:23-24).’ 예수님의 수난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지식을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4장 27-28절에는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평소에는 원수였던 헤롯 왕과 본디오 빌라도가 연합을 해서 예수님께 수난을 가한 것은 그들에게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예정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수난은 직접적으로는 악하고 법 없는 자들의 악의에 의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근거한 것입니다.

4. 수난의 목적(purpose)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께 그와 같은 모진 수난을 계획하셨을까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모진 수난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목적(purpose of suffering)은 무엇일까요? 본문 5절과 11절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5, 11절).’ 이 두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메시야에게 그와 같은 수난을 허락하신 세 가지 목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목적은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이 예수님의 대속적인 수난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원수 된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수는 아무리 예쁘고, 착하고, 공부를 잘하고, 돈이 많다 해도 원수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는 그 인생이 성공하거나 형통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화친하게 된 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분의 대속적 수난이 우리에게 역사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신분이 사라지고, 화평과 화친만이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하여 수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수난을 보시고 우리와 화목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으며, 그 분과 교제하고 찬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메시야 수난의 첫째 목적은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 목적은 치료입니다. 5절 후반을 보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나음’이 곧 치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는 치료란 근본적인 영적 치료를 의미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베드로전서 2:24-25)’고 말씀했습니다. 영적 치료의 핵심은 방황하는 영혼이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영혼이 방황하지 않는 것은 기적입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사람이 방황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고, 울기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슬픈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냥 슬퍼했습니다. 영혼의 목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혼의 목자 되신 분께 돌아오니까 이 모든 슬픔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갈 곳이 어디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자 내 영혼에 닻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영혼의 닻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영적인 치료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치료는 영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본문 4절의 전반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질고는 우리 육신의 연약함이요, 슬픔은 우리 감정의 연약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마태는 마태복음 8장 17절에서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육신의 연약함과 질병도 함께 짊어진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영육의 치료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은 분들은 이사야 53장 5절을 붙들고 기도하시고, 육신의 질병을 가진 분들은 이사야 53장 4절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 내게 있는 질병은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것이니 가져가소서!”라고 기도하면 치료의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병과 연약함을 담당하셨으니 육신의 질고가 있는 분들에게는 이 말씀이 임하여 치료의 기적이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육신의 질병을 이겨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치료의 근원이십니다. 약을 먹고 치료받는 근원도, 운동을 해서 치료받는 근원도,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아 기적적으로 얻는 치료의 근원도 모두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 4-5절을 붙들고, 자주 읽고, 외우고, 기도하면 기적을 볼 것입니다. 기적을 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신 세 번째 목적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의롭지 못한 죄인 된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당당하게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죄 없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의로움은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결 론

메시야의 수난은 메시야의 승리의 근원이요, 성도들의 사죄와 칭의와 화친과 치료의 근원입니다. 누군가가 “너는 예수를 믿어서 무슨 축복을 받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사죄와 칭의와 화친과 치료를 받았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사죄(forgiveness)는 죄를 용서받는 것이고, 화친(reconciliation)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며, 칭의(justification)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고, 치료(healing)는 영육간의 나음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이 네 가지를 입술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이 네 가지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사죄와 칭의와 화친과 치료의 은혜가 임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우리 영혼의 피난처이며, 신앙과 신학의 본질이요, 모든 확신의 근원입니다. 원수가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의 피난처는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수난입니다.
우리의 원수인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하나님! 이 사람은 죄가 많습니다. 이 사람이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 한 것을 아십니까? 이 사람은 천국 가기에 합당한 사람도 아니고, 축복받을만한 존재도 아닙니다. 죄인아! 한 번 대답해봐라. 너에게 죄가 있지? 네가 축복받을 수 있는 존재냐? 네가 천국 갈 수 있는 존재냐?”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야 합니다. “마귀야! 네 말이 맞다. 우리는 천국에 합당한 존재도 아니고, 축복받을 만한 존재도 못 된다. 그런데 너는 이사야 53장의 종의 노래, 수난의 노래도 안 읽어 봤느냐? 나는 죄를 많이 지었지만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대신 수난을 받으셨다. 나는 천국 갈 자격이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 나는 축복받을만한 존재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수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축복받는 자가 되었다. 그러니 무식한 사단이여! 내게서 떠나가라! 물러갈지어다!” 만약에 마귀가 “아이구!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라고 물으면 “강남중앙침례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다가 알았다”고 당당하게 말해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우리의 영원한 확신의 근거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대속적 수난의 모든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육신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기적적인 치료가 임하여 모든 질고가 사라져버리고, 우리의 영혼을 괴롭히는 더러운 악령들도 모두 떠나가 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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