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종의 승리(이사야 53:1~12)

날짜 : 2007-10-19
본문 : 이사야 52장 1~12절

본문 : 이사야 52장 1~12절
제목 : 여호와의 종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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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온이여 깰찌어다 깰찌어다 네 힘을 입을찌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찌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2 너는 티끌을 떨어버릴찌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보좌에 앉을찌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찌어다 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4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이왕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였었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 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다 6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줄 알리라 곧 내니라 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8 들을찌어다 너의 파숫군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9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찌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11 너희는 떠날찌어다 떠날찌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찌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찌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찌어다 12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여 행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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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오늘 본문은 사실상 지난주와 동일합니다. 네 개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 가운데 네 번째 노래입니다. 지난주에는 이 노래에 나타난 여호와의 종의 수난이 어떠했는지에 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본문에서는 수난보다 승리가 먼저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 52장 13절은 승리의 선언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는 것이 곧 승리의 선언입니다. 이 승리의 선언 뒤에 극심한 수난이 예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난이 예언되기도 전에 왜 승리의 선언이 먼저 예언되었을까요?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슬픈 영화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을 미리 안다면, 영화 중간에 고달프고 슬픈 장면이 계속될지라도 극심한 감정의 요동을 피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와 같은 이유로 이사야 52장에도 승리보다 수난이 먼저 예언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처럼 네 번째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는 여호와의 종의 수난 외에도 여호와의 종의 승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여호와의 종이 쟁취한 승리가 무엇인지 세 가지로 나눠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가 선포되어 있다

첫째로 본문에는 여호와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resurrection and exaltation)가 명백하게 선포되었습니다. 이사야 52장 13절에 기록된 ‘받들어(raised)’라는 단어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심을 받은 부활을 의미하고, ‘높이 들려서(lifted up)’라는 말씀은 승천을 의미하며,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highly exalted)’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매우 존귀하게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쥐신 분, 만유를 다스리는 분이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52장 1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존귀를 선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승귀’란 승천과 존귀를 하나로 합친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이처럼 이사야 52장 13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를 수난에 앞서 예언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이나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도들이 증거한 진리를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이 케리그마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승귀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하루 만에 삼천 명을 회개로 이끈 사도행전 2장 24절과 31-33절의 설교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베드로의 설교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높이셔서 존귀하게 되셨고, 존귀하게 되신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으므로 그 성령의 역사를 오늘날 보고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선포한 진리의 핵심도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귀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영광스러운 구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수난을 당하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이름 위에 높은 이름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름 위에 높은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 즉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빌립보서 2장 11절의 ‘주’는 헬라어로 ‘퀴리오스’인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의 ‘여호와’를 번역할 때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수난 당한 후에 멸망으로 끝나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존귀하게 되심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받기에 합당하신 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를 거부하면 영원한 멸망 밖에는 받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어도 괜찮고, 안 믿어도 그만인 분이 아닙니다. 믿지 않으면 큰 일 납니다. 만왕의 왕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 밖에 남지 않습니다. 축복받기 위해서 믿는 것은 둘째 문제입니다.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멸망당하지 않도록 예수님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0, 22절에서도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서 만물을 복종케 하시는 존귀하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머리가 되셨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1장 13-16절에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이 말씀에 묘사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당하시고 아파하시는 분이 아니라, 힘 있게 비취는 해와 많은 물소리 같은 목소리, 불꽃같은 눈을 가진 분이십니다. 수난은 지나갔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그 분은 살아나셨습니다(He's risen)”라고 인사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나의 구주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매 순간 나를 도우시고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시라'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21세기에 사는 성도와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비전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력한 분, 나와 상관없는 분, 실패하신 분이 아니라 반드시 성공하시는 분, 지금도 영광과 존귀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의 삶을 현실적으로 인도하시는 나의 구주시라는 비전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삶이 아무리 고달플지라도, 아무리 세상에 악이 횡행할지라도, 아무리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사상이 득세할지라도 그들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되신 예수님께서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속죄의 범위는 ‘택한 백성’에게 제한되어 있다

둘째로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가 ‘택한 백성’에게 제한되었다는 명백한 진리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수난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셨느냐는 것은 아주 심각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따라서 역사적으로 칼빈주의 진영과 알미니안주의 진영이 크게 갈라졌습니다. 개신교를 창시한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은 이 문제에 관해서 칼빈주의라고 불리는 사상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내에서 아르미니우스라는 사람이 루터와 칼빈의 사상에 반대되는 사상을 발표했습니다. 이 사상이 알미니안주의가 되어 많은 교파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침례교회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차이 때문에 17세기부터 일반 침례교회와 특수 침례교회로 갈라져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반 침례교회는 알미니안주의를 믿는 침례교회이고, 특수 침례교회는 칼빈주의를 믿는 침례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일반 침례교회에서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 사상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의 죄나 아말렉의 죄, 김일성이나 마호메트와 같은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죄 값을 다 값으신 것은 아니고 오직 믿는 자에게만 그 피가 효과를 드러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주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받고 구원받을 가능성만을 열어놓은 것이지 실제로 누구의 죄도 값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인간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그 사실을 믿을 때에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알미니안주의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피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 능력이 없어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믿어주지 않으면 아무 효과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의 범위는 넓혀놨지만 막상 그 효력은 대단히 약화시켜놓은 이론입니다. 사람에게는 기분 좋은 이론이로되 자세히 살펴보면 구원의 주도권을 인간이 쥐고 있는 인본주의적인 이론입니다. 저는 알미니안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저는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와서 처음부터 칼빈주의를 설교했고, 지금도 칼빈주의이며, 영원히 칼빈주의를 따를 것입니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타락된 본성과는 잘 맞지 않지만, 매우 성경적입니다. 알미니안주의는 기분은 좋을지언정 분명히 성경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서도 알미니안주의의 이론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는 6절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모두 양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양 같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두 가지 꺼림직한 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두’ 앞에 ‘우리’라는 제한적인 단어가 있다는 사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11절에 기록된 바처럼 예수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대상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11절 후반에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고 기록되었고, 12절 후반에도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0장 28절을 통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근거로 볼 때에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신 이유는 단순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 많은 사람을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단순히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할 가능성만을 열어주었는가, 아니면 많은 사람의 죄를 실제로 담당하고 갚아 주었는가? 그리스도의 피는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면 결코 실패함이 없이 성부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구원하는 성공적인 피인가?” 이와 같은 질문들은 대단히 골치 아픈 문제처럼 보이지만, 우리 신앙이 좀 더 깊이 있는 헌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해답을 얻고 지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애매하게 넘기고 지나가면 평생 동안 애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저는 네 번째 여호와의 종의 노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피에는 결코 실패가 있을 수 없다는 확증을 얻습니다. 본문 10절에도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속건제는 레위기 5장에 기록되었는데, 죄를 지었을 때 단순히 하나님께만 제물과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상대방에게도 아울러 손해배상을 하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위해서 속건제물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씨를 보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씨’란 ‘후손’을 의미하는데, 육신적인 후손이 아니라 영적인 후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영적인 후손을 보게 될 것이며,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어디에도 실패의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의지가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6장 38-39절에도 예수님의 분명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 안에 있는 영혼들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수난을 당하셨고, 그들의 죄 값을 갚으셨으며, 그 자신이 속건제물이 되심으로 죄에 대해 배상하셨고, 그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마지막 날까지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고 생명의 부활과 영생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피영민 목사의 믿음입니다. 본문 11절 전반에도 실패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납니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실패는 전혀 없습니다.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한 영혼의 죄 값을 갚으시고, 성령님은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이 진리를 믿게 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와서 믿으려고 해보지만 믿을 수가 없다고 푸념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죄 값을 갚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값을 갚아주신 사람은 반드시 믿습니다. 성령께서 그 진리를 믿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유의지의 산물이 아닙니다. 믿음이 자유의지의 결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정확한 복음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는 오리겐파, 알렉산드리아 학파, 혹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알미니안주의가 구호물자 복음이라면, 칼빈주의는 선물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옷이나 음식 같은 구호물자는 모두 펼쳐 놓고 필요한 사람이 와서 가져가게 합니다. 가져가는 것이 필요한 사람들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선물은 다릅니다. 그 사람을 위해 필요한 것을 사서 상자에 넣은 다음 포장도 예쁘게 해서 필요한 때에 전해줍니다. 여러분은 구호물자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으셨습니까? 아니면 선물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저는 28살에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죄를 사해주시고, 영생과 부활과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의 자유의지로 구호물자를 주워오듯이 복음을 주워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구호물자 복음은 증거하지 않습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귀한 선물을 모두 받으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한 속죄제사는 예수님께서 담당하셨으며, 성령께서는 그 구원을 집행하십니다. 이처럼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고자 예정하신 영혼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 값을 갚으셨고, 성령님께서는 그들의 영혼에 역사하셔서 그들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 날에 모두가 생명의 부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가만히 앉아서 “너는 택함을 받았으니 구원을 받나, 못 받나 한 번 보자”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수단으로 전도와 선교라는 미련한 방법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을 정해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선교가 얼마나 미련해보입니까?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많은데,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외국에 돈을 전해주고 교회를 세워준다고 하니 얼마나 미련해보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미련한 방법을 통해서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그 분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전도와 선교도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승리할 뿐입니다. 마귀와 악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반드시 패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위대한 승리자가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은 결코 망할 수 없고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몸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이래도 망하지 않은 겁니까?”라고 불평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번 죽는 것은 모두에게 정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도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어도 결국 다시 살아나서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영생의 축복과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 있는데 우리가 왜 실패자입니까? 우리는 승리자입니다.

3. 그리스도는 택한 백성과 승리의 탈취물을 나누신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백성들과 함께 승리의 탈취물을 나누신다는 진리가 기록되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12절).’ 분깃을 얻고, 탈취물을 나누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승자가 행하는 일입니다. 승자만이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승리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부터 분깃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전리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적인 복이요, 하나는 물질적인 복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 영생과 부활과 성령을 모두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방언과 같은 은사만이 신령한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미 신령한 복을 받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만유를 분깃으로 받습니다. 히브리서 1장 2절을 보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상속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로마서 8장 17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권을 가졌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만유를 공동으로 상속받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상속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유를 상속하십니다. ‘만유’란 영어로 ‘everything’, 즉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혹시 지금 가난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다해도 기죽지 마십시오. 만유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조금 가지고 있다고 폼 잡지도 마시고, 가난하다고 기죽지도 마세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과 만유를 상속할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자가 되심으로 우리도 강한 자, 승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은 절대로 패배의식을 갖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여러분 중에 오늘 말씀이 어렵다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할지라도 오늘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목사는 교리적인 설교를 할 때 어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재미도 없고, 딱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진리입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 세 분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러자 다른 할머니가 “그 노래 우리 고등학교 교가네”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할머니가 그 할머니에게 “그러면 너하고 나하고 동창이구나”라고 좋아하자, 세 번째 할머니가 “이상하다? 우리 학교 교가도 곡은 같은데 가사가 좀 다르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할머니들이 “너희 학교 교가는 가사가 어떻게 되는데?”라고 묻자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고 대답했다는 확인이 안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치매가 심하면 택시를 타고 나서도 기사님께 “기사님! 제가 어디 간다고 했죠?”라고 묻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더 심한 기사님은 “아니? 손님 언제 타셨습니까?”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물론 우스개 소리입니다. 사람의 기억력은 제한적이어서 잘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승리자요, 택한 백성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구원하시는 성공자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육의 복을 누리는 승리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인생이 조금 어렵다고 해서, 병들었거나 사업이 어렵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주눅 들어 살지 마십시오. 기죽지 마십시오. 부흥이 안 되는 교회는 성도들이 기죽어서 인상만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흥되는 교회는 언제나 밝고 활발합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은 기죽어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8장 37절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나, 사업이나, 육신의 건강이나, 교회의 모든 일에 늘 승리가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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