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사야 54:11~17)

날짜 : 2007-11-30
본문 : 이사야 54장 11~17절

본문 : 이사야 54장 11~17절
제목 :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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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12 홍보석으로 네 성첩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13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 14 너는 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 아니할 것이며 공포 그것도 너를 가까이 못할 것이라 15 그들이 모일찌라도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니 누구든지 모여 너를 치는 자는 너를 인하여 패망하리라 16 숯불을 불어서 자기가 쓸만한 기계를 제조하는 장인도 내가 창조하였고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도 내가 창조하였은즉 17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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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기업(heritage)이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산 또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기업을 물려주시는 주체가 부모가 아닌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기업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는 유산, 혹은 축복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물려받을 축복과 유산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17절 후반의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에서 ‘의’는 영어로 ‘vindication’인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역성들어 주신다, 혹은 변호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이구, 내 자식. 얼마나 어렵노? 내가 너를 축복하지 않으면 누가 너를 축복해 주겠노?”라고 정겹게 말씀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의 내용과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의의 내용이 무엇인지가 이사야 54장 전체의 내용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4장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 얻을 기업을 네 가지로 선포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이 네 가지를 기업으로 받는 존재입니다.

1. 급격한 변화(Radical Change)의 축복

첫 번째 기업은 ‘급격한 변화(Radical change)의 축복’입니다. 변화에는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와 나쁜 방향으로의 변화가 있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와의 종들이 얻는 변화는 좋은 변화입니다. 그 변화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이사야 54장 1절은 ‘노래할찌어다’라는 선포로 시작됩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은 여인으로 비유되는데, 이 여인의 변화되기 전의 모습이 대단히 비참합니다. 1-3절에서 이 여인은 잉태치 못하고, 생산하지 못한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구약시대 중동지방에서는 잉태치 못한 여인의 고통이 대단히 큰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가 잉태하지 못했을 때, 성전에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습니까? 그만큼 자녀를 얻지 못한 것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잉태치 못한 여인이 변화를 받게 됩니다. 바로 자녀를 얻은 것인데, 그것도 집을 넓히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녀를 얻게 되었습니다. 2절을 보면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찌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장막터를 넓히고, 휘장을 널리 펴고, 말뚝을 넓혀야 할 정도로 자녀가 늘어난다니 얼마나 축복된 변화입니까?
4-8절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은 더욱 비참합니다. 그녀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남편과 최고의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자마자 바람을 피웠습니다. 이런 신실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남편의 진노를 얻고 소싯적부터 버림을 받아 홀로 되었으며, 수치와 치욕이 따르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6-8).’ 그런데 남편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수치스러운 여인을 다시 맞이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수치를 씻어버리시고, 넘치는 진노를 버리시며, 영원한 자비로 긍휼히 여기시고, 명예와 교제를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처럼 이사야 54장 1-8절은 잉태하지 못한 여인이 수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며, 수치를 당한 여인이 명예를 회복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구약성경의 비유는 신약성경에서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죄인이 구원을 받을 때 일어나는 변화가 그 실체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은 열매 없는 존재요, 부끄러운 존재요, 수치스러운 존재요,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열매를 맺게 되고, 수치가 사라지며, 부끄러움도 사라지고, 명예와 하나님과의 교제도 회복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들이 얻을 첫 번째 기업입니다. 로마서 6장 20-2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런데 22절에는 큰 변화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전에는 죄가 주인이고, 그가 맺은 열매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그 인생의 결말은 사망이요, 영원한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영생까지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변화이고 축복입니까?
에베소서 2장 12절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은 소망이 없는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런데 이 사람이 에베소서 2장 19절에서 큰 변화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전에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던 자가 이제는 소망도 있고, 하나님도 있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시는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전에는 열매 없던 존재였으나 이제는 열매 있는 존재가 되었고, 전에는 지옥에 갈 존재였으나 이제는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갈 존재가 된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과 평화(Peace with God)를 누리는 축복

두 번째 기업은 ‘하나님과 평화(Peace with God)를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찌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9-10).’ 9-10절에는 노아의 언약과 그리스도의 언약이 비교되며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언약은 화평케 하는 언약, 평화의 언약(covenant of peace)인데, 이 두 언약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인자를 베푸시겠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의 죄악이 관영하자 하나님께서는 8명의 노아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홍수로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무지개를 두시면서 이제 다시는 물로 이 땅을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노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번 미국 집회 기간 동안 뉴올리언스를 다녀왔는데, 그 큰 도시가 물로 망해버린 모습을 보았습니다. 집들이 모두 물에 잠기고, 리모델링된 도시의 중요 부분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 도시처럼 변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물로 온 세계가 멸망한 것은 아닙니다. 노아와의 언약으로 하나님께서 물로 온 인류를 쓸어버리는 심판을 다시는 실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진노를 거두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인자를 베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언약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진노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화평을 누리십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려면 먼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되어야 합니다. 효녀 심청이 몸을 던져서 용왕의 진노를 풀고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택하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하셨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propitiation’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총화’, 혹은 ‘유화’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진노하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은 나에게 인자하시다.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신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막힌 담이 없다. 하나님은 나와 평화를 누리신다’라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진노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진노는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들이 누릴 두 번째 기업입니다. 이 언약이 곧 화평케 하는 언약(covenant of peace)이며, 이 화평의 언약은 영영히 제거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수없이 많은 구절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라(enjoy)’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 1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하시고, 에베소서 2장 14절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더 이상 막힌 담이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죄짓고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죄짓고 살면 얻어터집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서운 것입니다. 영영한 지옥이 진노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아버지가 자식이 잘못되지 않도록 징벌하듯이 하나님께서 교훈하시는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얻어맞을 때는 아프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특별한 표현일 뿐입니다. 자식을 때릴 때에 영원히 멸망하라고 때리는 부모는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올바른 길을 가라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진노는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대통령과 매우 친한 사이라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제가 어느 날 밥을 굶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고,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마 “내가 굶게 되었으니 나를 좀 도와주시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대통령과 친하여 매일 독대하는 사이라면 뭐든지 가서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화친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려울 때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도와주시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화평하셨기 때문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서 구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피곤합니다. 용기와 능력을 주세요. 하나님! 제가 굶게 되었습니다. 제게 재물을 주세요. 하나님! 제가 참 외롭습니다. 제게 사랑을 주세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 분과 평화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여전히 머물러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막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자기의 머리 위에 있어서 그것이 집행되기만 하면 자신의 영혼과 인생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를 도저히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 온 세상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진노가 제거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 그 화친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것이 성도들이 받을 두 번째 기업입니다.

3. 여호와의 교훈(Divine Instruction)을 받는 축복

세 번째 기업은 ‘여호와의 교훈(Divine instruction)을 받는 축복’입니다.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13).’ 본문이 말하는 ‘네 모든 자녀’는 예루살렘에 거하게 될 거민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교훈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44-45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아오는 사람을 배척하지 않으시고 모두 구원하시며 영생을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가느냐면 여호와의 교훈을 받은 사람이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은 선지자의 글에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선지자의 글이 바로 이사야 54장 13절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하는 여호와의 교훈은 윤리나 도덕적인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윤리, 도덕을 교훈하지 않습니다. 윤리는 윤리 선생님께 배워야 합니다. 게다가 지식으로 배우는 윤리는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 학원에서 함께 윤리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가장 비윤리적이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본문에서 말씀하는 교훈은 윤리적인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라는 성공학 교훈도 아니며, 건강하게 살라는 건강 교훈도 아닙니다. 건강 교훈이야 목사보다도 의사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제가 설교하는 여호와의 교훈이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영적으로, 내적으로 역사하여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특별한 교훈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아! 나는 죄인이구나. 하나님의 진노가 나에게 머물러 있구나. 내가 이대로 살면 현세에도 망하고, 영원히 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되겠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셔서 죄 값을 갚으셨으니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의 교훈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유효적인 소명(effectual calling)이라고 하며, 이것이 여호와의 교훈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설교자의 말씀을 들어도 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한 사람은 믿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한 사람은 그 말씀을 이해하면서 그 말씀이 믿어진다고 하고, 한 사람은 순 거짓말 같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차이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그것을 자유의지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와 예수님은 그것이 여호와의 교훈이 그에게 임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을 받은 사람은 모두 예수님께로 나아오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내어 쫓지 않으시며, 영생을 주시고 마지막 날에 생명의 부활을 주십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들이 누리는 세 번째 기업입니다.
환경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사는지, 한국에서 사는지, 혹은 중국과 일본에서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지배하심이 사람을 행복하고 보람 있게 만들어줍니다.
제가 미국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입니다만, 미국은 땅도 넓고, 자연도 아름다운 살기 좋은 곳입니다. 땅이 얼마나 넓은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는 눈이 내리는데, 루이지애나에서는 더워서 에어컨을 틀고 다녀야할 정도였습니다. 먹을 것도 얼마나 풍요로운지, 사람들이 음식을 너무 먹어서 뚱뚱한 정도가 지나치게 심했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사람들이 저울에 올라가면 저울이 “한 사람씩 올라오세요. 왜 두 사람이 한꺼번에 올라옵니까?”라고 말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자연이 좋고, 먹을 것이 풍요롭다고 해서 미국 사람들이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풍요로운 가운데서도 자신이 불행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환경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교훈을 받아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님과 말씀이 우리를 지배할 때, 그저 라면에 보리밥만 먹고, 자전거만 타고 다녀도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벤츠와 BMW를 타고 다녀도 매일 싸우고, 이혼한다고 난리를 피우면 뭐가 행복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여호와의 교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범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생을 얻었으니 늘 웃으시고, 감사하시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보장된 승리의 축복(Guaranteed Victory)

여호와의 종이 누릴 네 번째 기업은 ‘보장된 승리의 축복(Guaranteed victory)’입니다. ‘너는 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 아니할 것이며 공포 그것도 너를 가까이 못할 것이라 그들이 모일찌라도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니 누구든지 모여 너를 치는 자는 너를 인하여 패망하리라 숯불을 불어서 자기가 쓸만한 기계를 제조하는 장인도 내가 창조하였고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도 내가 창조하였은즉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4-17).’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치는 자들이 도리어 패망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치려고 기계를 만들어도 시원찮아서 도무지 쓸 수가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도리어 정죄를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변호하고 옹호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패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깁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사단이 아무리 우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려도 사단은 이미 패배하고 심판을 선고받은 존재입니다. 사람을 수 백 명을 죽일 만큼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라고 해도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서 으르렁거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감옥 안에 있는 다른 죄수들에게는 공포가 될지언정 감옥 밖에 있는 자유 시민들에게는 전혀 공포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느냐고 욕을 먹을 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시시각각으로 공포와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담대하게 물리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병들어서 죽으면 어떡하나?”라고 고민하십니까? 죽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고 해서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는 존재임을 믿으십시오. “내가 지금 사업이 어려우니 어떡하나? 망하면 어떡하나?” 하고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굶어 죽게 되면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먹이실 뿐만 아니라,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도들에게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고, 그 승리는 현세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승리, 내세의 승리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망하기 다 틀렸습니다.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마귀의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짐이 아니라 이김을 주십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도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이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형편과 처지가 다가와도 우리는 이깁니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습니다. 어떤 존재가 다가와도 우리는 이깁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섬기는 여호와의 종들에게 보장된 네 번째 기업입니다.

결 론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을 섬겨 봐도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하나님을 섬겼더니 도리어 어려운 일만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종들에게는 반드시 물려받을 기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에 열매 없는 존재요,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열매를 맺게 되었고 명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화친한 존재가 되었고, 여호와의 교훈을 받아 예수께로 나와서 영생을 얻은 존재가 되었으며, 미래나 영원을 통해서 반드시 승리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성도들에게 이런 기업을 물려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기업을 마련하시고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사먹되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사야 55장은 이런 위대한 초청입니다. 잔치를 마련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기업은 이사야 52-53장에 기록된 메시야의 수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이와 같은 맥락으로 전개됩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은 여러분들은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이 축복과 기업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런 축복에 아직도 문외한인 분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구주로 영접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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