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레 27:30-33)

날짜 : 2016-02-28
본문 : 레위기 27:30-33

서론 

레위기 27장의 주제는 ‘서원과 십일조’입니다. 제가 레위기를 두 번째 강해설교하고 있는데, 처음 할 때 서원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았기 때문에, 오늘은 십일조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9세기 영국 선교사 가운데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설립했던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는 배가 정박하는 곳에만 선교활동이 이뤄지는 것을 보고 배가 닿지 않는 중국 내륙으로 선교하자는 목적으로 선교단체를 설립하여 거의 천명에 달하는 영국 선교사들을 내륙으로 파송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선교활동을 하면서 했던 아주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은 결코 물질에 부족한 법이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에 필요를 공급하시는 방법은 ‘십일조와 헌물’입니다. 헌물은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고, 십일조는 마땅히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헌물은 자율적인 것이지만, 십일조는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입니다. 
오늘날은 십일조 제도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논리로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모두 헛된 주장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교회는 모두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십일조는 결국 본인이 결정해야 할 사안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십일조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십일조와 관련해서 미국의 많은 설교자들이 인용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항해를 하다가 파선되어 어렵사리 무인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도와줄 사람이 오지 않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 또 다른 한 사람은 여유롭게 선탠을 즐기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걱정을 하고 있던 사람이 여유를 즐기고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선탠이 왠 말입니까?” 그랬더니 “나는 한 주일에 일만 불을 십일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목사님이 꼭 찾으러 올 줄로 확신한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미국 목사님들이 자주하는 농담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십일조 생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실 성도들이 내는 돈에 관심이 있다 라기 보다, “이 성도가 십일조를 내는 신앙인인가? 아닌가?”하는 사실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목회자들만 관심이 많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관심이 많으십니다. 복음서 내용 가운데 1/6이 ‘돈’과 관련된 내용이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 39구절 중 16구절이 돈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 역시 매우 관심이 높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돈에 관한 문제는 연관이 많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오늘은 레위기 27장을 네 가지 주제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레위기 27장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헌금 법 

성도는 헌금 생활 할 때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따라야 합니다. 
먼저 1~25절에 사람이 하나님께 의무적으로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못한 경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서원하고 지키지 못할 수도 있음을 전제로 하고 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1~8절에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했다가 지키지 못한 경우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헌신하겠다고 하고서 서원을 지키지 못한 경우에 돈으로 환산해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를 드려야 할까요? 본문에는 여러 가지 예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20~60세까지의 남자가 서원을 지키지 못한 경우 은 50세겔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은 1세겔이 당시 장정의 4일치 임금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은 50세겔은 약 200일치의 임금이 됩니다. 오늘날 연봉 5,000만원인 사람이라면, 대략 3,000만원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서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9~13절에는 가축의 경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변심하면 소 값의 1/5을 더해서 돈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14~15절에 집을 드리겠다고 한 경우 후에 마음이 바뀌어 그냥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집값의 1/5을 더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16~25절에 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5을 더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이렇듯 서원한 내용대로 지키지 못하면 돈으로 환산해서 드리되 그 가격의 1/5을 더해서 드려야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헌금 법입니다. 
그러나 26~33절에 기록된 내용은 자발적으로 드리는 경우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세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첫 소생과 짐승의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26~27절에 “오직 생축의 첫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새끼라 우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부정한 짐승이면 너의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하여 속할 것이요 만일 속하지 아니하거든 너의 정가대로 팔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자도 하나님의 것이고, 짐승의 첫 새끼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13장 2절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남을 하나님께 모두 드려야 하는데, 전부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장남을 대신해서 레위인을 취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인의 숫자와 이스라엘 백성의 장남 숫자를 계산해서 레위인의 수가 적으면 남은 장남의 수만큼 돈으로 받으셨습니다. 사람의 첫 소생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초태생은 대신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흠이 있는 짐승이라 드릴 수가 없으면 당사자는 짐승을 팔아 그 짐승 몸값의 1/5을 더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팔리지 않는 경우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짐승을 팔아서 돈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28~29절에는 ‘아주 바쳐진 것’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히브리어로 ‘헤렘’이라고 합니다. 이는 ‘저주 받은 물건’ 내지 ‘멸절해야 할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반드시 멸절시켜야 할 물건이나 사람을 성경은 ‘아주 바쳐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물건이나 사람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원을 통해 하나님께 드릴 수도 없고, 사람이 취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취하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없애버리시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사람이 취하면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여호수아 6~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여리고 성과 그 속에 있는 물건들이 ‘바쳐진 물건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를 아간이 취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어 아골 골짜기에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아말렉 족속과 그 전리품 역시 진멸시켜야 할 것들이었는데, 사울이 아각 왕을 살려놓고 그들의 짐승 중 좋은 것들을 취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책망하였고, 사울은 그 이후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아간이나 사울은 헤렘을 취했다가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30~33절에는 땅의 곡식이나 소산물, 나무의 과실 등의 소출 1/10이 하나님의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소출의 1/10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와야 하는데, 너무 멀어서 가져 오기가 어렵다면 그것을 팔아서 그 가격의 1/5을 더해서 돈으로 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1/5을 더 내기 싫으면 메고 오든지 끌고 오든지 가져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나 양과 같은 가축의 1/10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를 정하는 방법은 가축의 주인이 막대기를 두고 소나 양을 그 막대기 밑으로 지나가게 할 때, 10번째, 20번째, 30번째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잔머리를 굴려서 돈이 될 것 같은 가축이 지나가려고 하면 순서를 조작해서 시원찮은 가축을 지나가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은 본래 10번째로 지나갈 가축도, 지나간 시원찮은 가축도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상대로 사기 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잔 머리를 굴리면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둘 다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Ⅱ. 이스라엘의 헌금 법은 신약시대에 그대로 적용이 가능한가? 

우리도 장남을 신학교 보내야 하고, 과일이 생길 때마다 1/10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까요? 우선 대원리는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헌금 법이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100%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 가운데는 폐지된 것도 있고, 완성된 것도 있고, 영적으로 여전히 타당한 것도 있습니다. 이를 잘 분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세 가지로 나뉘는데, 의식법은 예수님이 모두 완성하셨기 때문에 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피의 제사를 드리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사회를 다스리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폐지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법이 취해야 할 법들이 있습니다. 가령 살인한 자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법은 우리나라에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간통한 자를 처벌하는 것도 오늘날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돌로 치는 일까지는 할 수 없어도 반드시 처벌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간통죄를 폐지하고 나니 모텔들이 흥왕한다고 합니다. 시민법 원리는 오늘날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도덕법은 영구적으로 보편타당한 계명입니다. 도덕법은 율법 이전에도 존재했던 법들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율법폐기론자들로 혹여나 천국에 가더라도 꼴찌로 들어갈 자들입니다. 십계명은 우리 마음의 비석에 새겨놓으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아주 악한 자들입니다. 
율법도 무조건 다 없어졌다고 하면 안 됩니다. 폐지된 것도 있고, 완성된 것도 있으며, 그대로 따라야 할 것들은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를 분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째로, 서원법에 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켜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켜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성도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켜야만 합니다. 서원을 했는데 형편이 어려워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경우에 제사장에게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면 참작해서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레 27:8). 디스카운트, 즉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서원을 지키지 못할 형편에 처한 자에게 목회자는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서원한 것은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경솔하게 서원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 서원을 촉구하는 것도 잘못된 행위입니다. 부흥회 때 열렬히 찬송을 부르다가 주의 종으로 헌신할 사람 일어서라고 하니 눈치 보다가 공부하기 싫어 일어서는 것 같이 얼토당토 않는 행위는 모두 엉터리 서원입니다. 그런 서원을 하도록 촉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사람의 첫 소생이나 짐승의 초태생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초태생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원리는 유월절에 기인합니다. 초태생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원리는 예수님이 구속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초태생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5). “Firstborn over all creation”(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장자가 되셔서 우리의 죗값을 속죄하심으로 말미암아, 초태생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는 원리를 모두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장남을 반드시 신학교로 보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셋째로, 성도가 저주받은 물건을 취해서는 안 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신약시대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도둑질 한 물건에 대해서 십일조를 드려야 할까요? 뇌물 받은 것도 십일조를 드려야 할까요? 도둑질을 했다는 것, 뇌물을 받았다는 것 등은 이미 취하지 말아야 할 것 취했음을 의미합니다. 헤렘을 취한 것입니다. 
어떤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러 장로님 댁에 들어갔는데, 그간의 십일조를 모아 둔 봉투를 발견하고 이건 도저히 못 가져가겠다고 해서 쪽지를 남겼다고 합니다. “제가 아무리 도둑이라도 하나님의 것에는 손대지 않습니다”라고 적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둑들도 취하지 않는 십일조를 성도들이 취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입니다. 
여러분, 도둑질한 물건이나 죄악으로부터 오는 열매들은 십일조를 논하기 이전에 애당초 취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성도는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하고, 도둑질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로, 소산물의 1/10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원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이 원리는 모세시대를 넘어 모세 이전의 모든 시대에 보편타당한 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족장시대에도 십일조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갖는 소득의 십분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십일조는 인심 쓰듯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을 마땅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입니다. 십일조는 서원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서원하거나 서약해서 드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돌려드리는데 생색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 통장에서 100만원을 인출한 다음, 생신을 맞이해서 용돈을 드린다면 기쁜 일이겠습니까? 너는 왜 내 것을 가지고 가서 생색내느냐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네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절도죄에 해당하고, 제8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는 불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도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스스로 선하고 의롭다 여기는 사람이라도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그들은 모두 도둑입니다. 십분의 일을 다 떼어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을 하면서도 이것이 도둑질인 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의 것을 떼먹으면서 스스로 도적질하고 있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말라기 3장 8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는 마땅히 드려야 하는 것이고, 헌물은 자발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인데, 이것을 다 떼어 먹었으니 너희는 도적질하는 자라고 말라기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증거한 말씀입니다.  

Ⅲ.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성경적 근거 

그러면 소득의 십분 일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십일조 원리가 모든 시대에 적용되어야 하는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 속 다섯 시대를 배경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창세기 시대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도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4장 20절에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멜기세덱에 대해 히브리서 7장 3절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둘러싼 전쟁에서 전리품을 얻어 오는 길에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28장 22절에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지식이 모자라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약하고 있지만, 사실 이는 마땅히 드려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도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의무임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모세가 정한 율법이고, 이스라엘의 세금과 같은 것인데 우리가 왜 드려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모세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 이전부터 존재했고,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입니다. 이스라엘의 세금도 아닙니다. 국가를 대상으로 납부하는 세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국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국가가 간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모세 시대에는 십일조 제도가 율법에 편입되었습니다. 민수기 18장 21절에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받으셔서 레위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십일조를 받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받은 것이 없습니다. 다른 지파가 자기 기업에서 얻은 소출을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은 그것을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계십니다. “오늘날은 레위인이 없는데, 왜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레위인이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레위인들도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민수기 18장 26절에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사도, 신학교 교수들도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괜히 신약성경에 십일조를 내라는 기록이 없다면서 사람들을 망하는 길로 인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시대 레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아서 먹고 살았고, 레위인들도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림으로 결국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원리를 명백히 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모세 이후의 구약시대에는 백성들의 신앙이 부흥기를 맞으면 십일조를 냈습니다. 신앙의 성장과 십일조는 거의 항상 정비례했습니다. 역대하 31장 6절에 “유다 여러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더미를 이루었는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부흥기 때 백성들이 십일조를 가져왔습니다. 
또 느헤미야 10장 37절에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부흥기 때도 백성들은 십일조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넷째로, 신약시대 예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마태복음 23장 2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를 하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섯째로 사도 바울의 시대는 어땠을까요? 사람들은 그가 십일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누구보다 분명하게 하나님께 십일조 드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간접적인 용어로 십일조를 설명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3~14절에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성전에서 나는 것(십일조)을 먹으며, 복음 전하는 자들도 성도들이 내는 십일조를 먹고 살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의존해서 먹고 살았듯이 신약시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결론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내기 어려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십일조를 내라는 것은 먹을 빵을 빼앗는 것과 같은 일이기에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살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드릴 계획도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할지라도 십일조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시간이 흐를수록 경제적인 어려움을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가난해도 지금부터 십일조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돈이 전부 하나님의 것인데, 꼭 십분의 일만 드려야 할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십분의 일은 구별해서 십일조로 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답입니다. 내 돈이 전부 하나님의 것이면 다 드리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무엇을 먹고 살겠습니까? 하나님께 십분의 일을 구별해서 드리는 사람은 십분의 구도 하나님의 것이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드리려면 자발적으로 드려야지, 의무적으로 드리면 마음에 기쁨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는 내 마음에 기쁨과 감동이 올 때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평생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의무적으로 해도 얼마든지 기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의무를 갖습니다. 의무이지만, 남편이 아내를 기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무를 기쁨으로 감당하면 복이 됩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햇빛, 공기, 물 등은 모두 공짜로 주셨습니다. 곡식도 하나님이 주지 않으시면 하나도 거둘 수 없습니다. 자식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준 것임을 믿는다면 너는 십일조로 표현하라”시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 십일조하지 않는 성도님들은 결심하시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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