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입니다. 죄인이 천국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정도의 완전한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예비해두셨다가 주시는데, 이것이 없이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3장 19절까지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의가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음 3장 20절부터 8장 39절까지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9~11장까지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일 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12장부터 16장까지는 하나님의 의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적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2장부터는 구원받은 성도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지침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는 12장 첫 번째 구절은 지금까지 다뤄온 주제들을 바탕으로 논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다룬 내용들은 이미 확립된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 확립된 진리를 근거로 해서 성도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처럼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해서 논리를 전개한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까 하나님과 원수처럼 지내지 말고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과 화친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또 8장 1~2절에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판사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재아무리 한가한 판사라도 죽은 시체를 두고 재판하지는 않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율법에 대하여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심판 받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 갈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받을 심판을 모두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장 1절에 사용된 접속사 ‘그러므로’ 역시 11장 마지막 36절의 내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11장 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엄청난 영광을 가진 주권자시라는 것이 바로 11장까지 확립된 진리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다섯 가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만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드리라’(Offer)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섬기라’(Serve)입니다.
Ⅰ.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먼저 1~2절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돈’을 드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돈 내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도 성도들에게 헌금을 잘 가르쳤습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연보에 대해서 말할 때 ‘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헌금을 제대로 가르친 탁월한 성경교사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에 세 가지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 몸을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 몸을 드려라!” 좋은 말로 할 때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Living Sacrifice)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산 제사는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갖가지 봉사로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산 제사가 될까요? 구약시대에 있었던 모든 짐승제사는 ‘죽은 제사’(Dead Sacrifice)였습니다. 죽은 희생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희생제물을 통해 제사하는 것은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 희생제사가 필요 없는 것이죠. 예수님이 모두 완성하셨습니다. 이제는 어떤 제사를 드려도 짐승을 죽여서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한강에 짐승의 사체들을 버린 사람에 대해서 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짐승들을 왜 그렇게 많이 죽였느냐고 물으니 하늘의 신에게 제사 드리려 죽인 사체들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짐승을 죽여서 하늘의 신에게 제사 드리는 시대가 아닙니다. 희생제물을 통한 제사는 예수님이 모두 완성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을 원하시는 산 제사입니다.
산 제사는 한 번 드렸다가 마음이 바뀌면 다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구히 드려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1년 전에 드린 십일조를 돌려달라고 하는 것은 성도의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잘못된 자세입니다. 헌금은 한 번 드리면 영구히 드린 것이기에 돌려받을 수 없고, 돌려 달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의 몸을 원하실까요? 이것은 몸의 소유가 성도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핏값을 지불하고 사신 것입니다.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것을 찾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몸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몸을 범죄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3절 후반에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몸을 통해 산 제물을 받으시고 영광을 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을 내 것 인양 착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허용하시지 않는 죄악스러운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으신 음란을 위해 사용한다든가 파괴적인 약물, 마약, 독주, 담배, 부도덕한 죄악 등에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기쁘게 받으시도록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6장 19절에도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지체가 있습니다. 눈, 코, 입, 귀, 손, 발 등 몸이 있고 지체가 있습니다. 성도의 발은 하나님께 드려진 발이고, 성도의 눈도 하나님께 드려진 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 모든 지체를 드려 거룩한 열매를 맺고 살라시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생각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전반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곧 생각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마귀와 이 세상은 성도의 생각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전쟁터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5~6절에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 성도들뿐만 아니라 성도의 자녀들에게도 비성경적인 사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들을 부지런히 심어주려고 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그런 짓을 하고, 대학 교수들조차 일부가 비성경적인 사상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신문, 방송, 각종 대중매체에서 세속적인 문화, 오락 등을 주입하고 마귀적인 사상을 갖도록 조장합니다.
한 대학의 원로급 되는 교수가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인생의 조언이라고 해서 가르치는 것이 “결혼하지 말고 싱글로 살아라. 야한 마음을 가지고 살라. 그리고 돈은 오직 섹스와 놀이를 위해서만 사용하라. 절대로 교회에 갖다 바치는 헌금으로 사용하지 마라. 허무주의를 취하라. 종교를 멀리하라. 기독교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가르치는데 그런 죄의식은 사람을 불행한 자로 몰고 간다”입니다. 그래서 월급 받으면 바람 피러 다니게 만들고, 방탕하고 부패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그런 교육을 받아서 되겠습니까? 학생은 듣는 대로 배우기 때문에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배우는 것 이외에는 더 많은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대학 교수에게 그런 사상을 배운 학생들은 그것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녀들이 이런 악하고 패역한 사상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자녀들의 생각 속에 진리에 관한 말씀이 가득 차도록 가르치고 양육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 자기 의지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후반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의지가 무엇인지 분별해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시키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다를 때는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이유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 주시도록 간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성도들은 이 세 가지, 몸, 마음, 의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Ⅱ.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3~8절까지는 성도의 하나님 섬기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 구절들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장으로, 고린도전서 12, 13장과 에베소서 4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2장 역시 이에 대해 매우 중요한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본문은 성령의 은사를 사람의 몸에 빗대어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이되 많은 지체가 있는 것처럼 교회도 하나이되 은사를 가진 많은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 섬기는 일에 관한 네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 안에는 은사 없는 성도가 아무도 없고, 모든 은사는 귀중하다는 진리입니다. 사람 몸에 지체가 없는 몸은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모두 있는데, 중간에 사고로 쓰지 못하는 지체가 간혹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몸에는 모두 지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에는 어느 것 하나 쓸모없는 사람이 없고, 쓸모없는 지체가 없으며, 은사 없는 성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은사는 소중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어떤 분은 “나는 방언을 하니 방언하지 못하는 당신은 은사가 없다”고 자부하는데, 이것은 은사에 관한 매우 큰 오해입니다. 방언만 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방언을 할 줄 알아야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도 아주 잘못된 교리입니다. 방언은 은사 중에 하나일 따름이고, 섬기고 일하는 것도 모두 다 같은 성령의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6~8절은 교회를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예언할 때 믿음 좋은 사람은 신령하게 미래의 일을 알아맞히고, 믿음이 약한 사람은 잘 알아맞히지 못하는 수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부채도사나 점쟁이들이 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태껏 목회생활을 해 오면서 점쟁이처럼 신앙 생활하는 자들이 잘 되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다 왜곡되고 삐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는 구절에서 ‘예언’이란 ‘성경을 풀어서 설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체계’입니다. ‘분수대로’는 ‘그에 맞춰서’라는 의미이기에, 이 구절은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체계에 적합하도록 설교하라”는 뜻입니다.
설교자가 성경을 설교할 때는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시스템에 잘 맞추어 그에 부합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신학자들은 이를 ‘신앙의 유비 원리’라고 합니다. 한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성경의 다른 본문과 내용이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원리를 가리킵니다. 균형과 일치를 이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한다고 성경 한 절 읽고 엉뚱한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 체계에 적합한 설교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섬기는 사람이면 섬기는 일을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은사가 있으면 섬기는 일을 하고, 식당에서 설거지 봉사를 하고 싶으면 설거지를 하고, 베푸는 은사가 있으면 베풀라는 것입니다. 베푸는 것은 꼭 돈이 많아야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베푸는 일에도 헌신할 수 있습니다. 또 가르치기 원하는 사람은 가르치는 일로, 권위하는 사람은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몸에 불필요한 지체가 하나도 없듯이 모든 지체는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대전에 잘 알고 지내던 한 목사님이 새끼발가락에 암이 생겨 절제하였습니다. 그 작은 새끼발가락 하나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새끼발가락을 절제한 이후 걸을 때 일직선으로 바르게 걷는 일이 어려워졌습니다.
금번 2016년 브라질 올림픽에서 골프여제로 등극한 박인비 선수는 올림픽 출전하기 직전 경기에서 손가락에 상처가 나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작은 손가락, 새끼발가락 하나가 그렇게 중요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 가운데 하나도 불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서로 “너는 이 교회에 필요없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당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런 말로 서로 격려해야 할 줄 믿습니다.
둘째, 다양한 은사를 가진 성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협력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이가 음식물을 씹어서 위장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그러면 위장에서는 열심히 운동을 해서 소장에 넘겨주고, 소장은 음식물의 모든 영양분을 흡수해서 각 지체들로 보내주고 나머지는 대장으로 내려 보냅니다. 이것이 모든 소화기관들이 협력해야 되는 것이지, 이는 “다 씹어주고 남는 게 뭐 있냐?”고 해선 안 되고, 위장도 “네가 씹다 넘겨준 거 주물럭거린 것 밖에 뭐 있냐?”고 해서도 안 되고, 소장도 “나도 영양분을 다 흡수해서 보내주면 남는 것 없다”고 말해도 안 되며, 대장도 “너는 줘도 매일 그런 것만 준다”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소화기관들이 서로 서로 불평만 하게 되면 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일 소화불량에, 몸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모든 지체가 건강하고 제 역할을 잘 감당해야 몸도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너는 왜 나와 같지 않느냐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몸의 지체가 다 같은 역할만 갖는다면 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 몸에 눈만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온 몸이 다 입이면 어떻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다른 부분들을 인정하고 각각 받은바 은사에 맞춰 봉사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한 때 신령한 은사만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은사만 추구하다보니 결과가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교회를 위해 지체대로 봉사하고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자신에게 주신 은사 이상의 교만한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진리입니다. 3절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은사, 자기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통령보다 똑똑한 것 같습니다. 매일 대통령은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고 훈수를 둡니다. 대통령보다 높은 것이죠. 신학교 교수 시절 가르쳤던 제자가 목회하는 교회를 갔는데, 목사님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목회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더니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교회 권사님 한 분이 매 주일 찾아와서 이번 주일에 설교할 본문을 주고 가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준다”는 것입니다. 처음 한두 번은 권사님과 부딪힐 수 없어서 그대로 했는데, 계속 가져오더라는 것입니다. 엄연히 영역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고 싶은 설교를 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마땅히 생각할 것 이상의 생각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권사라는 직분은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목회하는 역할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직분 이상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체로써 각자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하면 건강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교만한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성도의 은사는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예를 들어, 팔이 일을 하는데 “나는 이 몸을 위해서 일하고 싶지 않다. 나는 몸에서 떨어져 독립할거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팔이 혼자 떨어져서 일하면 일이 될까요? 영양분이 공급될 수도 없고 몸도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도들이 자신이 받은 은사를 발휘할 수 있는 장이요, 하나님이 세워주신 유일한 통로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 봉사하고 섬겨야 합니다. 섬기고 은사대로 봉사하고 헌신하시길 바랍니다.
결론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해 두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로마서 12장부터는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요지의 내용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실천적인 지침입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몸 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한 인생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각자가 지체로서 기능을 잘 수행하고 감당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지체도 건강해 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머리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강남중앙침례교회의 담임목사이지만, 이 교회의 머리는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교황도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요, 머리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결코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지체입니다. 지체는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각각 은사를 교회를 위해 사용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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