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성도를 향한 세 가지 명령 (롬 12:9-21)

날짜 : 2016-08-28
본문 : 로마서 12:9-21

서론

오늘은 로마서 12장 9절부터 21절을 중심으로 해서 구원받은 성도를 향한 3가지 명령이라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 로마서의 네 번째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얻은 백성들, 구원받은 백성들은 실제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교리적인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읽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쉬운 부분이며, 크게 연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실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실천하기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기도해야 합니다. 
로마서 12~16장까지는 “이렇게 행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라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명령문이기 때문에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은 우리 성도들이 실천해야 될 것이 5가지가 있는데 지난주에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1~8절까지의 말씀 ‘드리라’(Offer)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몸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의지를 드려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섬겨라(Serve)”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사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됩니다. 
Offer, Serve 이 두 가지를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Ⅰ. “사랑하라” 
  
오늘은 다섯 가지 중에 남은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는데, ‘구원받은 성도를 향한 세 가지 명령’이라고 제목을 잡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첫째로 나오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Love)’는 명령입니다. 성도의 삶은 미움의 사역(ministry of hatred)이 아닙니다. 성도의 사역은 사랑의 사역(ministry of love)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미움을 가득 품고, 미워하고 또 미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워하고 흠잡고 또 끌어내고 또 공격합니다. 우리가 신문을 보게 되면 전부 다 그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다 미움의 사역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사역은 사랑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품고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사랑은 극도로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말세의 삶에서 사랑에 관해서 두 가지 특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사랑이 식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0~12절에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했습니다. 서로 핍박하고 서로 미워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말세의 첫째 특징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잘못된 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 1~4절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가장 최고로 사랑해야 하는데 하나님 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 돈과 쾌락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과 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하나님 위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돈과 쾌락입니다. 
그런데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요, 돈을 좋아하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대한민국에서 돈 싫어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쾌락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럼 고통을 사랑합니까?”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더라도 하나님보다는 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사랑의 대상에서 하나님은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대상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말세가 되면 사랑의 관해서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 지에 대한 네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9절에, “사랑은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며, 선을 사랑해야 합니다. 진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비진리를 옹호하거나 악을 옹호하거나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악을 중심으로 주고받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를 중심으로 주고받는 사랑이 참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상숭배자들도 서로 사랑합니다. 도덕적인 타락자들도 서로 사랑합니다. 도덕적인 타락자들, 조폭 깡패들, 정치적인 매국노들도 서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은 악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선을 지향하고 진리와 선이 중심이 되어서 진리와 선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는데 자녀가 잘못되고 악으로 갈 때, 부모가 그것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가 잘못되면 부모가 채찍질하고 야단치고 질책을 해야 그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자녀가 바른길로 가도록 하는 것이 바른 사랑입니다. 자녀가 바른길로 가지 않는데 자녀가 기죽을 것 같아서 놔두라고 하는 것은 절대 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첫째로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선을 사랑하고 악은 미워해야 합니다. 악도 좋고 선도 좋다고 하는 중도도 안 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랑은 악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성도들은 상호간에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0절에,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Honor one another above yourselves.”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존경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도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20~21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서로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우애하기를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열심을 품고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미지근하게 사랑해서는 안 되며,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성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반만 사랑하고 무심하게 사랑하고 미지근하게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인지 아닌지,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니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니고, 헌금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 출석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 등록을 한 것도 아니고 안한 것도 아니고, 강남중앙침례교회 성도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아주 미지근하게 섬기면 하나님이 토하셔서 내치실정도로 싫어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하신 말씀이 주님의 본심인 것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했습니다. 구토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구토가 난다는 말씀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은 하나님이 구토가 나실 정도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주님 섬기는 일에는 열심을 품고 섬겨야 합니다. 매 주 예배당 나올 때 불평하거나 수요예배와 금요철야 예배는 나올 계획과 의지, 생각도 없다면 하나님을 아주 미지근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열심을 품고 사랑하라, 열심을 다해 사랑하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우선순위의 첫째인 것입니다. 
넷째는,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내세의 소망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12절에,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시대는 두 시대입니다. 영어로는 “this age, age to come”입니다. ‘this age’는 현세이고 혹은 금생이라고 번역이 되고, ‘age to come’은 내세입니다. 올 시대 즉 내세입니다. 우리는 금생과 내세를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금생과 내세입니다. 어떤 분들은 금생과 내세사이에 천년왕국이 있다고 하는데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금생과 내세에 복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년왕국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적이 없습니다. 금생과 내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금생을 사랑합니까? 내세를 사랑합니까? 일반적으로 금생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금생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사랑합니다. 중요한 것은 금생을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내세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세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금생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100년을 넘기기 힘듭니다. 시간적으로 짧습니다. 그리고 금생은 아무리 잘 살아도 고난이 많습니다. 금생은 돈이 많고 권력이 있다 해도 환난이 있습니다. 짧을 뿐만 아니라 환난이 있습니다. 복음성가에도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원망하지 마세요’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금생은 짧을 뿐만 아니라 환난이 많습니다. 하지만 내세는 짧지 않습니다. 영원하고 내세에는 영원한 영광이 있습니다. 영원한 영광 즉 ‘장차 올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생과 내세 중 무엇이 중요할까요? 내세가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양으로 봐도 내세가 많고 삶의 질로 봐도 내세가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가올 내세를 사랑해야 합니다. 금생보다 내세를 더 사랑해야 합니다. 금생에 잠깐 당하는 환난은 별거 아닙니다. 환난은 별거 아니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지나갑니다. 금생에서 당하는 환난은 내세에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즐거워해야 합니다. 즐거운 일이 없어도 내세의 소망 때문에 즐거워해야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살다가 생명을 다할 때 영원한 영광이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즐겁지 않습니까? 금생은 짧고 환난이 있어도 내세는 영원하고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내세를 사랑해야 합니다. 내세의 소망을 사랑해야 합니다. 소망 중에도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도 참고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저에게 환난이 왔지만 잘 참고 잘 감당해서 영원한 영광을 받게 해 주옵소서’하며 내세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선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고, 내세를 사랑하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Ⅱ.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라” 

두 번째 중요한 명령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라(Share)”는 것입니다. 13절에,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해주며 대접하기를 힘쓰라, 곤궁한 상태에 있는 성도의 필요를 공급해 주고, 손님들에게 친절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는 작은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큰 부흥을 이루고 확산되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요인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 나누기를 잘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에,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이고 ‘코이노니아’였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재물을 갖게 된 경우에는 남을 도와줘야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에게 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도와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한일서 3장 17~18절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특히 교회는 재물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재물에 대해서 너무 절약하는 것도 좋지만, 절약이 인색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인색하면 갖고 있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꼭 있는 사람만 너그러운 것이 아닙니다. 없는 사람도 너그럽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옷도 만들어주고 다 나눠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을 악용하려는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그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악용하는 사람에게는 줘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진실로 주고 싶을 때는 줘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우러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주라고 명령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 헌금도 우리 자녀와 우리 교회와 우리 국가만을 위해 써야한다고 생각하면 바로 부패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눠야 합니다. 오늘날 제 3세계에는 가난한 성도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선교할 때 줘야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주는 것을 확대하고 확대해서 지금도 많이 나눠주고 있습니다. 강남에 있는 교회들은 나눠줘야 합니다. 나눠주면서 강남에 있는 교회들도 커야 하지만 또한 커야 나눌 수 있는 힘이 있으므로 커지면서 나누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성도는 돈을 나눠줄 뿐 아니라 마음도 나눠줘야 합니다. 15~16절에,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우는 사람, 장례식장 가서 같이 울기는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솔직히 어렵습니다. 나는 잘 안되는데 남이 즐거워하면 시기심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즐거워하기가 참 힘듭니다. 우는 자들에게 가서 얼마든지 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 되는 사람과는 같이 즐거워하기가 참 힘든 일입니다. 마음을 나누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성도는 나누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돈도 나누고, 밥도 나누고, 옷도 나눠야 합니다. 갖고 있는 것이 있으면 나누십시오. 마음도 나누고 나누고자 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나누어주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데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남고 남도록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지 않기 때문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나눔의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집을 주목하시고 자꾸 복을 내려주셔서 누르고 흔들고 넘치도록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돈이든, 마음이든 나누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자기의 권리를 포기할 줄도 알라” 
  
그 다음 중요한 세 번째 명령은 성도는 자기의 권리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리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때로는 치러야 할 희생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6 장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가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권리를 찾으려고 혈안이 돼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네가 권리가 있어도 그것을 포기할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권리가 있어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까? 14절에,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핍박하고 중상모략하고 욕하는 사람을 저주하고 싶을 것입니다. 저주를 받는데 저주를 같이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핍박하는 사람을 저주할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저주하고 싶어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축복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 말이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2~13절에서 이 원리를 목회현장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인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라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when we are cursed, we bless’입니다. 저주를 받을 때에 우리는 축복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주를 당해도 축복하라는 말씀은 실천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when we are persecuted, we endure it, 저주를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아라, 핍박을 당하면 견디고 때리면 그냥 맞아라’는 말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 김익두 목사님이 산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몇 대 맞았는데, 김익두 목사님이 “아,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는구나. 내가 김익두다, 내가 예수 안 믿었으면 넌 현장 즉사다. 내가 예수 믿어서 맞기만 하고 때리질 않겠다.”라고 말씀하시자, 강도가 “아이고, 김익두 선생님 이름만 듣던 위대한 분을 만났습니다.”하고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다고 합니다. 
‘when we are slandered, we answer kindly. 중상모략을 당할 때에 친절하게 대답한다.’ 중상모략을 당할 때에 친절하게 대답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삶은 자기가 가진 본연의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또 17~20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했습니다. 나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복수하고 악으로 갚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것이 공통된 인류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려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복수할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복수할 권리를 포기하고 원수가 나에게 원수 짓을 해도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수에게 떡과 물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의 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떡 주고 물  주고 원수에게 당하기만 하고 손해만 보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원수 갚아주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수는 징벌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징벌하면 약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징벌하시면 그것은 아주 무섭습니다. 원수 갚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십시오.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 권리들이 참 어려운 권리입니다. 이해하기는 쉬워도 이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너와 나 할 것 없이 어려운 권리인 것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 성도는 뭘 포기해야 할까요? 성도가 포기해야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심을 포기해야하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로마서 12장 3절에,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 12장 16절에,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원수도 갚지 않고, 저주한 자를 축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이 낮아져야 합니다. 마음이 높아지면 항상 불안한 것입니다. 누가 나한테 말 한마디만 기분 나쁘게 해도 엄청난 분노가 일어납니다. 내 마음이 높기 때문에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성질이 나는 것입니다. 백화점이나 공항 등 어느 장소를 가든지 꼭 성질내는 사람이 한 사람씩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마음이 높기 때문에 자기를 잘 대접하지 않으면 성질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낮으면 성질을 낼 일이 없습니다. 마음을 낮추면 되는 것입니다. 

결론 
  
구원받은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믿음도 다르고, 삶도 다른 사람입니다. 로마서 12장은 우리에게 다섯 가지 명령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드리라’, ‘섬기라’, ‘사랑하라’, ‘나누라’,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라도 희생하고 포기할 줄 알라’고 이 다섯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그렇게 살고 있다고 떳떳하게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항상 우리 자신을 살펴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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