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해야 할 두 가지 이유 (롬 13:8-14)

날짜 : 2016-09-11
본문 : 로마서 13:8-14

서론

로마서 13장은 구원받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국가와 그리고 주변의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먼저 시민으로서 국가와 관계를 맺고 있고, 또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의 이웃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1~7절은 성도와 정부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명령과 어긋나지 않는 한 정부의 명령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무원들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국민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순복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8~14절은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웃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신자를 포함해서 불신자에 이르기까지 이웃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까요? 우선 8절 전반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하나님은 먼저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빚 이외에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이 뒷부분에 기록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성경이나 영어번역본을 보면 이 말씀이 8절 처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빚지는 삶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다른 사람에게 작은 빚이라도 지지 말아야겠습니다. 10원짜리 동전 하나라도 빚지거나 떼어먹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빚을 미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채무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들이 부채를 안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빚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반증하며 심지어 빚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의 침례교 목사 스펄전의 전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등굣길에 연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어버린 나머지 문방구에서 연필 한 자루를 외상으로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귀가해서 목사님이셨던 아버지께 외상으로 연필 한 자루를 얻어 학교에 갔었노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 대노하시며 어린 스펄전을 크게 책망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벌써부터 빚지는 법을 배웠다고 엄청난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스펄전은 그 일이 있은 후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교황을 미워하듯 일평생 빚지는 것을 싫어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펄전은 수천 명의 성도를 수용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탄 테버나클 교회를 건축할 때에 빚 없이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빚을 내어 교회 건축하거 빚을 갚지 못해 이단 종파에 팔려 넘어가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성도는 빚지지 말라 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혹시 빚진 것이 있다면 빨리 갚으시고 빚지는 일을 경계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성도들이 빚진 것을 떼어 먹지 않고 잘 갚기만 해도 많은 전도의 열매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성도라면 누구나 세 가지 빚을 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로마서 1장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해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 빚은 어떤 빚일까요? 바로 복음 증거의 빚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우리는 공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 우리가 공로나 기여한 부분이 있습니까?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어떤 일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세우신 공로로, 그 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공짜로 받은 것입니다. 히나님이 우리에게 공짜로 구원을 주셔서 거저 받았으니, 너희도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 증거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은 많은 나라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대학, 병원, 고아원 등 교육기관과 사회복지시설이 많이 있는데 대부분 초창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세워준 것들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우리 고유의 자본으로 세워진 학교가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들에게도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금번 추석명절에 친지들이 모이면 복음증거의 빚을 갚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족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10월에 있을 새가족 초청 잔치에도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 증거의 빚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일은 엄밀히 말하면 상 받을 일라기보다 빚을 갚는 일입니다. 우리는 빚을 갚는다는 자세로 열심히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로마서 8장 12~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는 죄에게 져서 죄악에 끌려 다니며 살지 말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이를 한 마디로 성화의 빚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죽이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 가야할 성화의 빚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로마서 13장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성도는 다른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NIV(새국제역)성경에 “the continuing debt to love one another.”(서로 사랑해야 할 지속적인 빚)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속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했듯이 너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지속적으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나님이 내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향해서 항상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성도는 세 가지 빚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 증거의 빚, 성화의 빚, 사랑의 빚입니다. 갚아야 하는 빚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이웃을 사랑해야 할 빚은 다 갚을 수 없는 무궁한 빚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항상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성도라면 그 누구를 향해서라도 “나는 그 사람과 강 건너갔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하고는 강 건너 갔다”고 말씀하시면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강 건너갔다는 표현은 옳지 않은 말입니다. 속히 배타고 다시 건너오시기를 바랍니다. 
또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와 같은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할 무궁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빚 갚는 일을 그만 두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의 빚을 갚아 나가야 하고, 사랑의 빚을 갚는다고 해서 그것을 공로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빚을 갚았다면 그것은 그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공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주변의 이웃을 사랑해야 할 빚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두 가지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빚이고, 둘째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할 빚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빚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후자의 빚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이 주제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빚을 갚아야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8~11절).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은 ‘십계명’을 가리킵니다. 첫째 돌비인 1~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핵심을 담고 있고, 둘째 돌비인 5~10계명은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세 번씩이나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8절에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9절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살인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정조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간음하지 않습니다. 자기 아내와 딸의 정조가 중요하듯 타인의 아내와 딸의 정조도 소중한 것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의 재산을 존중해서 도적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명예를 존중하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가정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남의 집이나 아내를 탐내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응당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5~10계명은 모두 다른 내용을 갖고 있지만, 한 마디로 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결국 율법의 완성입니다. 부모를 학대하거나 이웃을 살인, 간음하고 이웃의 물건을 탐내어 도적질하거나 이웃에게 거짓말하는 모든 일들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물론 십계명을 지킨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을 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십계명을 지켜서 율법을 완성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율법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결코 아닙니다. 십계명에 대해서 설교하고 강조하는 사람을 향해 은혜도 없고 사랑도 없는 율법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자세입니다. 20세기에 유행했던 세대주의 종말론과 근본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은 많은 목회자들은 율법과 은혜를 서로 배척되고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기고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면 “율법은 이렇게 말하지만, 은혜는 저렇게 말한다.”, “율법은 이렇게 말하지만 사랑은 이렇게 말한다”식입니다. 이렇게 가르쳐서 성도들로 하여금 율법과 사랑을 서로 원수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십계명은 쓸데없다고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세대주의와 근본주의가 낳은 폐해입니다. 율법과 사랑은 같은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이 사랑이고, 사랑은 곧 율법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인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계명이 필요하고 십계명을 지키려면 마음속에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돌비의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특징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Ⅱ. 사랑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1~14절). 

11~14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내세를 준비하는 것이고 천국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세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천국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내세를 어떻게 준비할까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11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또한’은 영어로 ‘Besides’(그 외에도)입니다.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이유 외에도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현세가 지나가고 내세가 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12절 전반에도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에는 밤이 가까웠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현세가 밤이고, 내세를 낮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간이 밤이라는 것입니다. 현세는 밤이고, 어둡고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밤의 때가 지나가면 낮이 온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성도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래의 구원’, ‘영화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몸의 부활까지 다 이뤄지는 완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가까워오고,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보다 완전한 구원이 이뤄질 날이 가까워 왔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지금 성도의 참된 삶이 현세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이뤄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한 번 살다가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내세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라난 태아는 이생을 강건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산부가 담배 피고 술 마시고 마약 하고 태아에게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듣으면 아이에게 치명적인 어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의 일생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아이의 이생은 결코 순탄할 수 없습니다. 이생이 8~90년이라고 해도 잘 준비하지 못한 자의 내세는 복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생을 사는 동안 내세를 어떻게 잘 준비해야 하는 지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랑으로 내세를 준비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사랑이 제일인데 왜 사랑이 제일일까요? 사랑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현세에서 가치가 있고, 내세를 위해서도 영원한 가치를 갖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세를 잘 준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우리는 지금 밤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최근 5차 핵실험을 해서 대한민국 땅에 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5차 핵실험을 하면 뭔가 대단한 조치를 취할 것처럼 말하더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평안히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핵폭탄이 떨어지면 남한도 망하고 북한도 망하는 공멸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절대로 핵폭탄이 터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죽는 것도 문제지만 대한민국은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땅이 됩니다. 일본에 발전소 하나가 터져도 나라가 여러 모양으로 휘청거리지 않았습니까? 그 옛날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과는 또 다른 파괴력으로 남북한 전역을 쑥대밭, 불모지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세는 밤입니다. 그러나 낮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쨍하고 볕 들 날이 오는 것입니다. 낮이 온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우리가 부활해서 영생하는 그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낮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무엇으로 준비해야 할까요? 사랑으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번에 추석명절에도 가족들이 모이면 그리스도인들은 조금 일찍 가고, 부모님 용돈도 좀 더 드리고, 친지들이 과일 사올 때 고기도 좀 사가고, 설거지도 좀 많이 하고, 일찍 오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설거지 할 때가 되면 예배시간 됐으니 교회 가야 된다고 하면 친지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저것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행동을 취해서는 절대로 빚 갚는 일이 안 됩니다. 사랑의 빚이 갚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함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12~14절에 사도 바울이 이웃을 사랑함으로 내세를 준비하려는 성도들에게 세 가지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12절 후반에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밤의 어둠을 틈타서 온갖 못된 짓을 일삼습니다.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을 저지릅니다. 성도들은 이런 어두움의 일을 걸치고 다니지 말고, 헌옷을 벗어버리듯 다 벗어버리고 어둠이 범접할 수 없도록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빛의 갑옷이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고 자기에게 빛이 임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빛의 갑옷을 입으면 세상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그 빛이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 빛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둘째는 단정히 행하라는 것입니다. 13절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정히 행하라는 것은 똑바로 걸으라는 의미입니다. 
기독교 역사 상 위대한 분들이 참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어거스틴은 바울 이후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젊은 시절에 정부(情婦)를 두고 살았습니다. 정부는 첩도 아닌 동거녀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 여자 사이에 애를 갖기도 하며 방탕한 삶을 살았는데,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밀라노에 있었을 때에 동네 어린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하면서 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성경을 집어서 읽게 되었는데, 그 때 읽은 본문이 바로 로마서 13장 13~14절입니다. 어거스틴이 이 말씀을 읽고 참으로 크게 자신의 삶을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 어거스틴은 밀라노 최고의 설교자라고 불리던 암브로스라는 사람의 설교를 듣고 성장해서 바울 다음으로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날 목회자들이 어거스틴이 저술한 ‘신국론’만 읽어도 세대주의 종말론과 같은 엉터리 이단사설을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셋째는 성도 각자의 삶에 죄성이 좋아하는 것을 먹이거나 공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절 후반에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눈으로 나쁜 것을 보면 그 사람은 반드시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귀로 나쁜 것을 계속해서 들으면 반드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술집을 서성거리는 사람은 언젠가 그 곳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화투를 가지고 논 아이는 후에 도박에 가담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죄성이 좋아하는 것을 먹이지 말라는 것은 범죄할 기회를 일말에 차단하라는 것입니다. 죄성을 계속 부추기면 결국 죄라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바울이 명령한 세 가지는 빛의 갑옷을 입고, 단정히 걸어가고, 죄가 좋아하는 것을 공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14절 전반의 말씀이 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예수님으로 옷 입으면 예수님과 연합됩니다. 성도의 삶은 예수님과 연합된 삶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되었기 때문에 성도가 가는 곳에 예수님이 가시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자신이 가게 되는 동행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 위주로 생각해서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성도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빚입니다. 우리는 빚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빚을 갚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십계명을 완성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내세를 준비하는 최상의 일입니다. 그러면 훗날 천국에 갔을 때에 하나님이 “네가 사랑을 했구나!”하고 우리의 행한 바를 기억하시고 상급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천국에서 많은 상급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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