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견해 차이로 다투지 말라 (롬 14:13-23)

날짜 : 2016-09-18
본문 : 로마서 14:13-23

서론

로마서 14장은 성도의 교회생활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핵심구절은 1절 후반입니다.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쉽게 말해서 사소한 문제로 성도 간에 서로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할 때 사소한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싸우지 말라는 것이 로마서 14장의 핵심입니다. 

Ⅰ. 교회 안에 존재하는 사소한 견해 차이 

오늘날 교회는 다양한 삶의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출신, 성장 배경, 교육적 배경 등 많은 부분이 서로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사소한 문제로 인해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특별히 정치적인 입장에 대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가급적 정치적인 현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 산상성회에 오셨던 강사 목사님이 웃지 못 할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창립기념일을 맞이해 선물로 떡을 할 것이냐 빵을 할 것이냐는 안건으로 회의를 8시간 동안이나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떡으로 결정이 났는데, 인절미로 할 것이냐 시루떡으로 할 것이냐로 다시 8시간 회의를 하게 되었고 결국 인절미 파와 시루떡 파로 갈라져 지금까지도 갈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 내 갈등은 오늘날 한국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교회 내 사소한 문제로 인한 여러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논쟁이 격화되어 교회 존립이 위태롭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것은 고린도에 있을 때였는데,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분쟁이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뿐만 아니라 로마교회에도 이런 논쟁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14장에 따르면 로마교회에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먹고 마시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시장에서 파는 고기나 포도주들은 대부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교회 안에는 자연히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와 포도주를 성도가 먹고 마실 수 있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음식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것이고, 이방신들은 거짓 신들이기 때문에 감사히 기도하고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만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이방신에게 드려진 제물이라 꺼림칙하기도 하고 혹여나 건강상에 문제가 생길 것이 두려워 먹고 마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14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그러니까 바울은 믿음이 강한 편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와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편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비판하여 서로 다투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둘째는 ‘날’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5절에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날에 관한 논쟁이라고 했을 때, 주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주일에 예배하는 것은 이미 초대교회 시대부터 일반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공존하게 된 초대교회 안에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7대 절기나 월삭, 금식하는 날과 같이 특별한 날들에 대해서 이방인들은 그런 전통을 지켜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절기가 되면 이 날을 다른 날들보다 특별한 날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방인들은 그저 다 똑같은 날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구약의 모든 율법, 제사법, 절기법 등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고 폐지되었기 때문에 모든 날이 다 똑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풍습 상 어떤 날을 귀히 여기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는 여러 사소한 문제들이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천국은 어떻게 가는가? 거룩한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와 같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 논제들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사소한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문제들로 말미암아 생기는 견해 차이가 교회의 평화를 위협하고 교회 분열의 요인이 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전체를 통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소한 문제들은 현대 교회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문제에 관해서 많은 견해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시대가 변했고 교회 구성원들도 변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들 가운데 어떤 교회는 음주와 흡연에 대해서 포용적인 교회들이 있습니다. 
독일 교회 목회자들은 맥주를 음료수로 여깁니다. 맥주는 술로 취급되지 않기에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제외됩니다. 또 18세기에 감리교회를 태동시킨 웨슬리 목사님은 포도주에 관한 전문가였다고 전해집니다. 어떤 포도주를 마셔도 원산지와 숙성된 정도를 알아맞힐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포도주를 마셨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목회자 가운데 담배를 즐겨 피운 분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명한 분이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님이십니다. 그는 시가(Cigar)를 즐겨 피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왜 시가를 피우십니까?” 거기에 “저는 시가를 피우면 설교 준비할 때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시가를 피웁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시가를 많이 피우시면 건강에 해롭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제가 과도하게 피운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끊겠습니다”라고 했고, “그러면 ‘과도하게’가 어느 정도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제가 한 입에 시가를 두 개 물고 피우면 그 날로 시가를 끊겠습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날 시가를 완전히 끊는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주일학교 학생이 시가 피우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벌써부터 그렇게 시가를 피우면 건강에 해롭다”고 했더니, 아이가 대답하기를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피웁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는 일절 시가를 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문제는 구원에 관해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 교인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라고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한국 교회가 금연과 금주를 그리스도인 삶의 한 규율로 삼게 된 것은 선교사들이 볼 때에 술만 먹으면 알콜 중독자가 되고, 담배만 피우면 골초가 되는 바람에 이런 것들을 쳐다보지도 말라고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사소한 문제일 따름입니다. 
또 어떤 교회는 예배 시간에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성경번역본을 선택할 때도 흠정역(King James Version)만 무오하다고 해서 다른 것은 절대 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든지, 예배 시 악기를 사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등 사소한 문제들에 관해 논쟁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소한 문제에 관해서 자기의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입장만 옳고 다른 모든 견해는 옳지 않기 때문에 모두 나의 입장에 동의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내 입장이 옳다고 생각되더라도 다른 성도와 다투고 논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성도의 기본적인 삶의 원리를 두 문장으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성도는 완전한 자유를 얻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 누구의 종이 될 수 없다.” 둘째, “성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측면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발적인 종이다.” 그러니까 루터는 성도의 삶을 ‘모든 사람의 종이 아니면서도 또한 모든 사람의 종’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만약 첫째 문장의 원리만 강조하면 그런 성도는 어디를 가서든 자기 주장만 하고, 자기 입장만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태도를 갖게 되어 어느 누구도 상종하기 어려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반면 둘째 문장의 원리만 강조하면 그런 성도는 다른 사람의 노예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완전한 자유인이면서 또한 자발적인 종이라는 두 가지 원리 사이에서 지혜로운 균형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에 교회 안의 사소한 문제들에 관해 성도 간 견해 차이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지 다섯 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설명했고, 또 그런 원리들을 왜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 세 가지로 정리해 주었습니다. 

Ⅱ. 사소한 문제에 관한 견해 차이가 있을 때 취해야 할 다섯 가지 행동원리 

첫째,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도 간 서로 다투거나 싸우지 말고 인정해 주고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에 저 사람은 시장에서 고기나 포도주를 먹거나 마시지 못한다고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런 고기와 포도주를 먹는 성도들을 향해 가타부타 말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다투거나 싸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행동원리를 언급하게 된 출발점은 성도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요, 주 안에 한 가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주 예수님에 의해 구원받아 한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존재가 되었으니 사소한 문제에 대해 서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투지 말고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에게 여러 자녀가 있다고 가정할 때, 자식들끼리 사소한 문제로 싸우고 반목하고 원수와 같이 지낸다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성도들은 한 아버지를 모신 아버지의 자녀들이고 형제 자매이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에 관해서는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서로 받아줄 것을 명했습니다. 
둘째, 서로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3절 전반에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시장에 팔린다고 해도 그 음식이 우상숭배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여 감사함으로 그것들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은 왠지 속이 꺼림칙하고 체할 것 같고 귀신이 들러붙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로 상대를 조롱하거나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런 것도 하나 먹지 못해서 쩔쩔매나?”라고 업신여기며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 사람을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3절 후반에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사람을 누가 무시하고 멸시하고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절 중반에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먹지 않는 사람 입장에서는 먹는 사람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나 포도주를 아무렇지 않게 마음대로 먹는다고 비난하고 비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야 말로 세속적인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저 사람들은 아마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비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셔서 강한 믿음을 갖게 하시고 그를 사용하셨는데,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함부로 비판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왜 비판할 수 없는지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믿음을 강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신데 아직 그런 단계에 오르지도 못한 네가 어찌하여 믿음 강한 자들을 비판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시고자 믿음을 강하게 하신 것을 믿음 약한 자가 함부로 비판하는 것은 적반하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넷째, 신앙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거든 각각 자기 마음에 확신한 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5절에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들에 대해서는 자기 마음에 확정된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중에는 우상숭배에 사용된 후 시장에 내다 판 고기를 먹는 사람도 있고, 먹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스스로 성경을 읽어보거나 성숙한 신앙인들에게 조언을 받아 자기 입장을 확정지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확신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괜히 남들이 하는 말에 좌지우지 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3절에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절대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양심에 확신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자기 양심은 그런 고기나 포도주를 먹거나 마시지 말라고 하는데, 남들이 먹고 마시기 때문에 휩쓸리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혼란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그럼에도 상대를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옳다고 생각해도 남을 배려하는 자세를 견지하라는 것입니다. 13절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존재지만,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해치는 경우에는 스스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다른 성도들이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 모두 자기 의견에 동조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서로 영적으로 진보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도 식탁에 고기를 먹지 않는 형제가 앉아 있을 때에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먹고,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가 실천해야 할 배려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해서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5절에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고, 20절에도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21절 후반에도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성도는 자기 의견이 아무리 옳고 더 큰 믿음을 바탕으로 한 입장이라 할지라도 사소한 문제를 갖고 서로 비방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서로 배려하고 받아주어야 합니다. 사실 가정에서도 부부끼리 다투는 것은 큰 문제로 인함이 아닙니다. “왜 치약을 짤 때 가운데서부터 짜느냐?” “왜 빨래 통에 양말을 말아서 집어넣느냐?”와 같이 사소한 문제들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도는 사소한 문제로 견해 차이가 생기면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Ⅲ. 사소한 문제에 관해서 서로를 배려해야 할 세 가지 이유 

첫째,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3절 후반에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장에 파는 고기를 먹는 자도 받으셨고, 먹지 않는 자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간에 서로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냐는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셨기 때문에 서로 비난하거나 헐뜯지 말고 서로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둘째, 견해 차이가 있더라도 둘 다 하나님을 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6절에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도 주를 위하여 먹는 것이고, 먹지 않는 사람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는 것입니다. 둘 다 하나님을 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투고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절대 다수는 하나님 위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절대 소수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숫자가 아주 적다(few)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 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되겠습니까? 극소수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끼리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사소한 문제들을 갖고 서로 반목하고 비난하고 다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문제 앞에서는 서로 양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입니다. 이기려고 애를 쓰면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셋째,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은 죄를 선고받고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도는 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면제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물으시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너는 왜 우상숭배에 사용된 고기를 먹었느냐?”고 물으시면 “남들은 다 먹는데 어떻게 저만 안 먹습니까?”라고 대답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음식은 모두 거룩한 것이기에 기도하고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자기 양심에 옳다고 확신한 그대로 소신껏 대답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11~12절에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대 앞에서 잘한 부분에 대해서 상을 주시고,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을 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 최종적인 판단을 받게 될 것이고, 그때 대답할 말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받아주신 사람들입니다. 또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자매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투지 말고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기 의견을 관철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롬 14:7~8).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넓혀주시기 원하며,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서로 받아줄 수 있는 넉넉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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