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로마서 1~11장은 교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고, 12~16장은 실천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성도가 주변의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 교회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5장에서 핵심 구절은 5~6절입니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 말씀은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거나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의 뜻이 같게 하여 주시도록 간구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서로 일치(Unity)와 조화(Harmony)를 이루게 해 주시도록 간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작은 변화에도 쉽게 조화가 깨지고 일치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런 기도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기도가 필요할까요?
Ⅰ. 교회 안에는 조화와 일치를 깨뜨리는 위협요소가 있다.
교회 안에는 조화와 일치를 깨뜨리는 위협적인 요소가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의 일치와 조화를 위해 기도해야 했던 이유는 일치를 위협하는 요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11). 제자들이 항상 하나가 되어 일치와 연합을 잘 이루고 있었더라면 예수님의 이런 기도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로마교회의 일치와 조화를 위협하는 요소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교회 안의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 있었음을 1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교회 안의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니까 거기서 조화와 일치가 깨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우상에게 바쳐진 후에 시장에 내다 판 고기와 포도주를 먹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두고 믿음이 강한 경우는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었고, 믿음이 연약한 경우는 먹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조화와 일치가 위협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단지 이런 영역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인격, 직분, 세력적인 영역 등에서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도 있지만 사실 그런 차이는 사소한 것에 불과합니다. 별 차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사소한 차이에 연연할 것이 아니고 더욱 많은 공통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며 살아가는 공통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차이가 있어봐야 극히 작은 차이입니다.
성도들 사이에 차이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각각 다른 배경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차이를 강조하면 일치가 깨지는 것이고, 동질성을 강조하면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상대와 나의 차이가 무엇인지 찾으려 하지 말고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둘째, 성도들의 출신성분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로마교회 안에 존재하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서로 다른 출신으로 인해 일치를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8절에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할례의 수종자(유대인의 종)이 되신 이유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을 허무시고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하심입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 허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갖고 있는 장벽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오랫동안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멸시했으며, 서로 원수처럼 지내왔습니다. 심지어 겸상하지도 않았습니다. 먹는 음식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기적은 이러한 출신성분에 의한 장벽이 무너지고 한 하나님을 섬기며 한 교회 안에 소속되어 살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문화, 역사, 종교, 언어 등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 무시하고 멸시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한 하나님을 섬기며 조화와 일치를 이루게 된 것은 엄청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들은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위협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로마교회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있었다는 것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에 교회일치에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위협적인 요소는 오늘날 교회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사상적인 차이로 인해 분열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교회는 절대로 공산주의화 될 수 없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네 가지 계명이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 신앙은 절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를 싫어하기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무너뜨리고 파괴하려 합니다. 교회에 이런 분열이 가중되면 간첩들이 그 때를 기회로 삼아 교회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남북으로 나뉜 이 땅에서는 사상적인 차이로도 얼마든지 분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이단의 왕국입니다. 미국에는 이단들이 교회 파괴하는 짓을 하지 않고 얌전히 활동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이단들은 전통적인 교회에 침투해서 성도들을 이간질함으로 문제를 일으킵니다. 유별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자기들끼리 예배를 드리고 가만히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공격적이며, 기존 교회들을 비판하고 파괴하는 못된 짓을 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단이라는 위협적인 요소를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항상 교회 일치와 조화를 이루도록 서로 협력하고 힘을 모아야 합니다.
Ⅱ. 교회는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원천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조화와 일치를 이룰 원천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가 모두 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치와 조화의 근본 원천이 되십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배경을 갖고 살아가지만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중심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5절에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 간에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시는 주체가 바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고 약한 자를 위로하시는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십니다. 강한 성도든 약한 성도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있다는 사실이 교회의 일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133편 1~3절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모두 영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서로 의견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분을 내거나 서로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일치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시면 성도들끼리도 가까워집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성도들 사이도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포용력보다 비판력이 강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면 비판하기보다 서로 포용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부족함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녀의 부족함을 감싸주시는 분들입니다. 인내의 하나님께서 약한 자식을 위로하시고, 오래 참으셔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모든 성도들이 읽고 듣고 믿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조화와 일치의 원천입니다. 4절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하다 멸망을 받고, 또 어떻게 해야 복을 받는 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을 수 있고, 한 교훈을 받기 때문에 성도는 그 말씀을 중심으로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계시고, 한 아버지가 계시해 주신 말씀, 이 두 가지만으로 충분히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Ⅲ. 교회가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5절에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본받으면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까요?
세 가지 면에서 본받아야 합니다. 첫째, 남에게 비방을 받을지라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신 이타적인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3절에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만족을 위해 사신 고집스러운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서든지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열등감이 있는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열등감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시고 고집스럽게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기쁘게 아니하셨듯이 강한 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세도를 부리지 말고 연약한 자를 받아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한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든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라는 것입니다. 강한 자들이 약한 자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열 개의 고리로 만들어진 줄을 어떤 사람이 붙잡고 매달려 있다고 가정할 때, 열 개의 쇠 고리 중 하나가 약한 고리로 이뤄져 있다면 그 사람은 곧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의 약한 고리 때문에 그 줄이 끊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 개의 계명으로 이뤄진 십계명을 전반적으로 잘 지켰는데, 딱 하나의 계명을 어겼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계명 중 단 하나밖에 어기지 않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를 어긴 것은 모든 계명을 어긴 것과 일반입니다. 그 사람은 지옥 가기에 충분히 넉넉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만 끊어져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 갈 사람은 빨리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아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셔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으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연약한 부분을 담당해 줘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매우 강한 분이십니다. 풍랑이는 바다도 그의 말씀 앞에 잠잠해 지고 귀신들도 그 앞에서 꼼짝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군대 귀신도 몰아내시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 모든 죄인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으니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죄인 된 우리를 받아주셨듯이 우리도 서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7절에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이 받아주지 않으셨으면 지옥을 피해갈 수 없는 대역죄인들 입니다. 지옥 아랫목으로 떨어졌을 죄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받아주셨습니다. “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인으로 살다가 그대로 죽으면 모두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영원한 멸망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받아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서 죄인들을 받아 용서해 주셨고, 그리스도께서 강한 자로서 약한 자를 받아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고,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받아 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도 서로 받아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길입니다.
셋째, 서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8~9절에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습니다. 유대인을 섬기는 종, 할례 받은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은 섬기는 종이 되신 예수님을 부각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섬기는 자가 될 때 교회는 일치와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남을 지배하려고 하면 싸움만 납니다. 그러나 남을 섬기고자 하면 절대로 싸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너그럽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을 섬기신 목적은 구원의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셨습니다. 구원의 약속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도 처음부터 유대인만 구원하시겠다고 증거하지 않고 모든 백성,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이루시고자 예수님은 유대인을 섬기는 종이 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에 네 번이나 인용되고 있습니다. 시편 18편 49절, 신명기 32장 43절, 시편 117편 1절, 이사야 11장 10절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네 구절이나 인용되고 있습니다. 모두 “모든 열방이 주를 찬양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 말씀이 다 이뤄졌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이 진리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교회의 조화와 일치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Ⅳ. 교회가 조화와 일치를 이뤄야 할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자기만족이나 행복을 누리기 위해 교회의 일치와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조화와 일치를 이뤄야 교회 구성원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본주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치와 조화에 힘쓰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적 행복은 신앙생활 이외의 것으로도 결정될 수 있습니다. 행복은 교회의 일치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근본적인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행복은 부수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1차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조화와 일치를 이뤄야 할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6절에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구체적으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조화와 일치를 이뤄야 합니다. 교회의 일치와 조화 속에서 예배하면 하나님이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케 하십니다. 성령이 임재하시면 성도들이 복을 받게 됩니다. 참된 예배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참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응답받는 복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강력한 복음 증거 사역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성도가 서로 다투면 복음 증거의 길이 막히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면 불신자들은 척하고 알아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싸우니까 전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 증거력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청년 대학부가 많이 부흥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은 복음 증거력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소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일치와 조화를 이루면 복음 증거의 능력을 갖게 되고, 성도들이 전도에 힘을 쓰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 이곳저곳에서 싸움이 나면 새신자가 와도 정착하지 못합니다. 다시는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교회 안에서 큰 소리를 치면 오히려 영혼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큰 소리 치지 않아도 정의실현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을 방해 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교회는 복음 증거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능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서로 다른 배경, 인격, 출신, 언어, 교육환경, 생김새를 가진 교회 구성원들이 한 지역교회를 이루고 조화와 일치를 이뤄나간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모든 성도가 한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하고 있는 지역교회는 모두 천국의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죽으면 천국 본점으로 가게 됩니다. 지점에 있는 것도 행복한 일이고, 본점으로 가는 것은 더욱 행복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는 살아도 행복하고 죽으면 더 행복해 집니다. 천국 본점은 항상 행복합니다. 그러나 지점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천국의 지점인 교회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잘 담당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섬기고 받아주면 교회 안에 참된 예배가 이뤄지고 강력한 복음증거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늘 교회의 조화와 일치를 위해 헌신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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