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바울 서신의 특징 중 하나는 종결부분이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2개의 장에 걸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서에 비하면 굉장히 많은 분량입니다. 왜 이렇게 길게 기록해 두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로마교회 성도들 중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둘째, 바울이 앞으로 로마교회를 갈 것이고, 만날 사람들과 대화의 기초를 놓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로마서 15~16장에 기록된 종결부분을 살펴보면 바울의 재치와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자기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내 죗값을 대신 갚아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나의 구주이시고, 그 분으로 인해 부활하여 영생 얻게 될 것을 믿는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백되지 않은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고백한 만큼 믿는 것입니다. 신앙을 자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전도를 해보면 새신자들에게 유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됩니다. 자신의 말로 복음을 설명했기에 자기의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고 확신이 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말 잘하는 것 외에도 상당한 지혜와 재치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당신은 마귀 자식이기 때문에 지옥 갈 것이다. 빨리 예수 믿어야 한다!”고 하면 어느 남편이 교회를 오려고 하겠습니까? 기분이 나빠서 “나는 죽어도 교회 안 나간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전도자는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비행기에서 모두 조용히 앉아서 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일어나 예수님을 믿으라고 소리 지르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법적으로도 허용되지 않는 일입니다. 복음을 설명하고 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지혜롭고 재치있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뱀이 상징하는 바는 대부분 사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부정적인 예로 사용되었는데, 예수님이 딱 한 번 긍정적인 예로 사용하신 본문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증거에 지혜와 재치가 필요합니다.
로마서의 종결부분에 세 가지 모습으로 바울의 지혜와 재치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먼저 칭찬하는 지혜, 두 번째로 그러면서도 할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는 능수능란함, 세 번째로 해명할 것은 해명함으로 오해를 불식시키고 있는 재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결부분에 나타난 바울의 재치와 지혜를 여섯 가지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질문과 도전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로마교회 성도들의 장점을 칭찬하는 바울
1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서신을 보내며 그들을 ‘내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한 아버지 모신 영적인 가족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 원수들아’ 그랬다면 누가 이 서신을 읽겠습니까? 바울이 우리를 형제로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형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는 자세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 관해 확신하는 바가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볼 때 너희는 참으로 선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지식적으로 볼 때 모든 지식이 가득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다른 사람들을 능히 가르칠 수 있는 성도들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참으로 착하고 일도 잘하고 공부도 잘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새생명초청잔치를 10월 9일에 앞두고 있는데 불신 가족들이나 친지, 친구들에게 전도할 때 우리는 먼저 그 분들이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잘 살펴서 칭찬하고 격려하는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남편한테 전도할 때도 “이 마귀 자식아 너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 그러지 마시고, “내가 여태껏 당신 때문에 잘 먹고 잘 살았고, 당신 때문에 교회 나갈 수 있었고, 당신 같은 남편이 세상에 어디 있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이번 새생명초청잔치에 교회 한 번 같이 가주면 안 되겠느냐?”고 접근해야 합니다. 이렇게 칭찬함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먼저 비난받고, 질책을 당하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일단 기분이 나쁜데 누가 그 말을 들으려 하겠습니까? 상대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상대가 기분이 나쁘지 않도록 칭찬하고 격려하는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고압적이고 무시하는 태도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본문 14절은 바울의 칭찬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특별히 칭찬에 인색합니다. 남을 칭찬할 줄 모릅니다. 칭찬도 연습하고 해 봐야 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자세로 전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바울의 재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바울
15~16a절에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또한 서신을 보낼 만한 권위가 어디서 온 것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자신을 높여 훈수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 세움 받아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하고, 또 이 서신을 쓰는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하며 겸손한 자세로 전도하는 것과 비굴하게 아첨하는 것과 절대로 같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5절에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할 때 아첨의 말로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신으로 부름 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권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사신과 대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대사나 영사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호주에 집회를 간 적이 있었는데, 호주의 한국 총영사가 저희 교회 집사님이셨던 분인지라 식사 대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현지 사람들이 서빙을 해 주는데 기분이 꽤 좋았습니다. 영사만 되어도 그렇게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 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근무하고 있는 것이기에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대사, 즉 천국 대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대표해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대사의 업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권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우리가 결코 비굴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칭찬, 격려, 겸손한 자세로 복음을 증거하되 권위를 갖고 사명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Ⅲ. 감당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던 바울
20~21절에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책임이 무엇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사역의 범주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남이 전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기 책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 전하지 않은 이방지역으로 가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2장 15절에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3장 6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사명은 이방인들에게 다니면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볼로가 가서 물을 줍니다. 바울의 사명과 아볼로의 사명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과 물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자라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각각의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일반적인 공통의 사명이 있습니다. 기도, 찬송, 예배 등은 우리의 공통적인 사명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위해 감당해야 할 특별한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완수하면 하나님이 상을 주십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책임을 다하고, 장로, 권사, 집사 직분자들도 자기 사명을 완수하면 하나님이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을 다 하면 하나님이 복으로 채워 안겨 주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떤 사명 주셨는지를 파악하고 그 사명을 이루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복된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습니까? 빨리 그 사명을 발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이루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무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목적을 위해 사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의미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사명을 이루어 의미있는 인생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Ⅳ. 자신의 사역 목표를 선언하는 바울
16절 후반에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목표는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산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이 직분을 수행할 때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제물도 없이 빈손으로 덜렁덜렁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도 떼어내고 피를 뿌린 후 그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제사장의 직무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제사장인 바울은 이방인들 가운데 구원의 열매를 맺어서 그 열매들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물은 죽은 제물이었지만, 신약의 제물은 산 제물입니다. 헌신되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제사장된 바울의 사역 목표였습니다. 우리 역시 바울과 같은 복음의 제사장이고,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에게는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헌금을 드리는 것 말고 전도한 사람, 그리고 그 전도한 사람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제사장이 가져야 할 제물입니다. 다음 주 새생명전도축제에 오실 때, 혼자 오지 마시고 하나님께 올려드릴 산 제물을 함께 드릴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가져야 할 목표가 무엇이었을까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영어 공부할 때도 몇 개의 단어를 외울지 정해 놓고 하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냥 외우는 사람은 몇 개 외우다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어 천개를 외우겠다고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는 사람은 목표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한 할머니의 일화가 나오는데, 70세가 넘은 고령임에도 영어를 능숙하게 잘 하시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할머니는 영어 단어 10,000개를 외우신다고 합니다. 이렇다 할 학교를 졸업하신 것도 아닌데 웬만한 영문과 출신 학생들보다 훨씬 더 많은 단어를 알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단어를 외우실 수 있었는지 취재해 보니, 집안에 온통 단어로 도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늘 보면서 단어를 외우는 것입니다. 아나운서가 뜻을 물어보니 곧잘 대답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그 프로그램을 보고 할머니도 목표를 세우고 하면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단 공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운동을 하더라도 목표를 세우고 하면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 성경읽기, 기도 등 많은 부분에 목표를 세우고 진력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대 사명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습니다.
목표 없는 사람은 방향 없이 날아가는 화살과 같습니다. 당신의 구체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다음 주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Ⅴ. 이방인의 사도로 이룬 업적들을 열거하는 바울
17~19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루리곤은 현재 유고슬라비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유고슬라비아까지 넓은 지역에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표적과 기사와 능력의 역사로 이방인 사회에 복음을 증거하는 업적을 세웠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를 자랑하노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17절은 자칫 오해하기 쉬운 구절입니다. NIV(새국제역)성경에는 “I glory in Christ Jesus”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glory’가 명사로 사용되면 ‘영광’이라는 뜻이지만, 동사로 사용되면 ‘자랑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동사 다음에 바로 목적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치사 ‘in’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자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도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자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복을 받았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흑암 가운데 살았지만 이제는 빛 가운데 살고 있다. 내 인생에 예수님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 때문에 내 인생이 영광스럽게 되었다”와 같이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9장 23~24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는 부자입니다. 나는 권력이 있습니다. 스펙이 좋습니다. 지혜롭고 학벌이 좋습니다”라고 자랑하면 듣기는 하지만 속으로 그 사람을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부족하지만 예수님이 이런 복을 주셨습니다”라고 예수님을 높이면 그런 사람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들게 됩니다. 그리고 저런 사람이 믿는 예수님을 나도 한 번 믿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하는 사람은 전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높이고 자랑하면 전도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룬 모든 업적에 대해서 예수님을 높이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Ⅵ. 로마에 가지 못했던 바울의 해명
22절에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에도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여러 번 가려고 했다가 가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쁜 사람이라 오해하지 않도록 해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다른 곳으로 인도하셔서 복음을 전하라 하셨기에 로마로 가는 길이 막혔던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못 간 것이니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입니다.
우리는 상대를 나쁘게 생각하기 전에 당사자의 해명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나쁘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로마서에 두 번이나 로마에 가지 못한 이유를 해명하고 있습니다. 아주 지혜로운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바울의 인사말을 통해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아직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깨닫게 하시고 한 걸음씩 인도해 주셔서 복된 인생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목표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입니다. 내가 지금 구체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사역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셋째, 내가 지금 자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7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할 일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위해 각자의 할 일이 있습니다. 복음의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자기 직무를 모르고 한가하게 있으면 어떻게 제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부패할 때는 제사장이 자기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성전 문도 닫혔고,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제사장 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일의 중차대함을 깨닫고 그 일을 책임지고 감당함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제물로 하나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랑스러운 제사장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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