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문안하라 (롬 16:1-16)

날짜 : 2016-10-23
본문 : 로마서 16:1-16

서론

사도 바울이 쓴 서신은 거의 모두 앞부분이 교리적인 내용, 뒷부분이 실천적인 내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6장 1~16절은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어서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은 구절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교회에 관해 많은 교훈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27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문안하라’는 동사가 17번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서로 인사하며 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로마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이 본문은 이상적인 교회에 대해 이론적인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실제 교회 현장의 현실적인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상적인 교회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말들을 많이 하지만, 정작 그런 교회가 있더라도 그 사람으로 인해 이상적인 교회가 되지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상적인 이야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쓰고 있는 내용은 현실적인 로마교회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세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Ⅰ. 로마교회 성도들은 다양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사람들이다. 

로마교회 성도들은 출신, 언어, 교육환경, 삶의 질 등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열된 사람들의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로마식 이름과 헬라식 이름, 또 유대식 이름 등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로마교회 성도들의 출신이 다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달랐고, 문화나 성장배경도 달랐습니다. 
또한 이들은 신분도 다르고 재산보유 정도도 달랐습니다. 로마의 오래된 문헌에 따르면 여기 열거된 이름 중에는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우르바노와 허메가 바로 노예의 이름입니다. 부자와 귀족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뵈뵈, 헤로디온, 율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특별히 뵈뵈가 속해 있던 겐그레아 교회는 고린도에서 남동쪽으로 11km 떨어진 항구도시 겐그레아를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당시 항구도시는 무역의 중심지로,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된 뵈뵈는 물질적인 부요를 누리던 성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뵈뵈가 사도 바울과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중산층에 속한 성도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람들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장막 만드는 일을 했던 상인들이었고, 자유민으로 중산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남편 아굴라보다 앞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집안의 영적인 호주가 여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로마교회 안에는 부자, 중산층, 귀족, 노예 등 삶의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신앙 경륜의 차이도 있었습니다. 7절에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친척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사도 바울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신앙 경륜이 오래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베네도는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지 않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경륜이 짧은 것입니다. 
이처럼 로마교회는 각기 다른 삶의 배경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툼과 갈등이 있었던 것이고, 로마서에는 이런 다툼과 갈등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이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듯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복음주의 교단에 속한 교회 중에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교회(Homogeneous Church) 세우기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학생들만을 위한 교회, 25~45세까지 중산층만을 위한 교회와 같이 특정인들만을 위한 교회가 있고, 그런 교회를 세우려는 운동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신앙생활하자는 취지인 듯합니다. 그러나 이런 운동은 성경적인 운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로마교회는 이렇게 동질성이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지 않았습니다. 로마교회는 다양한 출신성분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질성이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부분이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는 하나 된 정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로마교회 성도들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도 정치적인 입장은 하나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야당을 지지하거나 여당을 지지하면 의견조율이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예배할 때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야당을 지지하든, 여당을 지지하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한 가지 이유로 충분히 연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 열 번이나 기록되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있는 한 성도는 모두 한 가족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학교와 같은 곳인 줄 알고 더 배울 것이 없어서 교회를 떠난다고 표현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가족입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패밀리입니다. 여러 가지가 다르지만 예수님이 구원해 주셨고, 말씀을 주셨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 연합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까?” 다른 질문은 아무렇게나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질문은 제대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다고 대답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다투고 싸우는 경우가 있더라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Ⅱ. 로마교회 성도들은 모두 일하며 섬기는 사람들이다. 

로마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며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량(閑良)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동네 이장 아들만 되어도 타인을 섬기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골을 다녀보면 이장 댁은 참으로 거창합니다. 이장이 되려면 동남아 5개 국어는 해야 한다고 합니다. 시골 노총각들이 국제결혼을 많이 해서 해외에서 이주해 온 처자들이 많기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입니다. 이장이 보통 권력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장 아들은 안하무인입니다. 이장 아들만 되도 아무도 섬기려 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죄인들을 섬겨주셨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섬기시는데 지체된 성도가 섬기지 않는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게으르지 않습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기도해야 하고, 직장생활 해야 하고, 열심히 가정 살림해야 하고, 교회 봉사해야 하고, 집회 참석해야 하는 등 부지런히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술집 같은 곳을 다닐 여유가 없습니다. 
저는 예수님 믿기 전에 술집을 자주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보니 바빠서 갈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교만한 사람도 없고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도 없습니다. 또 왔다 갔다 하면서 구경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와서 구경만 하고 비판만 하고 돌아갑니다.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과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기본적으로 일하고 섬기며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도 모두 수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롬 16:6).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롬 16:9).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롬 16:12).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롬 16:13). 그 어머니의 수고가 무엇이었을까요? 어머니의 수고는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격려하는 일들입니다. 
저는 인천시 동구 화평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어렸을 때 밖에서 늦게까지 연을 날리며 놀다가 어머니가 부르시며 하셨던 말씀 한 마디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아들 잘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잘 생겼다고 하니까 저는 그저 그런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위해 수고하고 격려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로마교회 성도들은 수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가하게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님을 위해 수고할 때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위험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4절에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사도 바울과 함께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 자기 목이라도 내 놓고 사역했다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처녀가 아들을 낳는 일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처녀가 잉태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나는 간음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주장하면 미쳤다고 돌 맞아 죽을 일입니다. 인간 이성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것은 돌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한 일이었습니다. 
마리아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낳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지옥에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영어로 ‘Our Lady of the Risk’라고 합니다. ‘위험을 감수한 우리들의 숙녀’라는 뜻입니다. 
그 때 만일 마리아가 “저는 두렵습니다. 저는 처녀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 인생 책임지시겠습니까?”하고 버티어 잉태하는 일을 기피했다면 예수님이 마리아를 통해 성육신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돌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썼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성당, ‘노트르담’(Notre-Dame)은 ‘우리들의 숙녀’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낳아주신 마리아를 기념하는 성당이라고 합니다. 
7절에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실제로 감옥에 갇혔던 성도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수고한 일군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때로는 욕을 먹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음을 기억하고, 어떤 위험이 있다라도 주님을 위해 감수하려는 헌신된 종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는 욕먹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거야! 위험한 일은 할 수 없어! 안전하고 편안한 일만 할 거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오해를 받고 욕을 좀 먹더라도 주님을 섬기기 위해 수고하는 종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두 번째 중요한 질문은 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위해 어떤 수고를 감당하고 있습니까?” 

Ⅲ. 로마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문안 받은 사람들이다. 

문안은 인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직 로마교회를 방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지금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교회 성도 27명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서신 로마서에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만 문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21절에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이 로마교회의 27명의 성도들과 이외의 모든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부터 고린도와 로마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오고가고 이주하며 서로 잘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었고 행한 수고 역시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선교사입니다. 그는 신약성경 27권 중 절반에 해당하는 14권을 기록한 대사도입니다.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칼빈,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모두 거대한 산과 같은 사람들이지만, 바울에 비할 수 없습니다. 별 일곱 개 총사령관과 같은 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종교개혁기 루터와 칼빈이 사역할 때, 당시 유럽에는 많은 신령주의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역사로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남아 있어도 좋지 않은 부류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스펄전, 로이드 존스와 같은 분들은 대중들을 선동하지 않았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긴 위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사람이 평범한 성도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감사를 표현하고 기도해 주고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홀로 위대한 사도다. 나는 너희들에게 가서 한 번 만 기도해 줘도 기적이 나타나고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게 와서 기도를 받으라”는 교만한 태도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각기 문안하고 있습니다. 4절에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5절에도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고, 9절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고, 12절에도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고, 13절에도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14절에도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고, 15절에도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고, 16절에도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총사령관과 같은 바울이 노예출신 성도들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문안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얼마나 로마교회 성도들과 좋은 관계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개인적인 감사와 문안의 관계가 상실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사회 안에서 기계 속 톱니바퀴처럼 살아갑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것입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의도적으로 관계를 피합니다. 아파트에서 이웃주민을 만나도 서로 인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녀들이 부모님께도 자주 전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쁘기도 하겠지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문안이 사라지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서로 다른 수많은 톱니바퀴가 내재된 기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실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서로 문안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위대한 교리서인 로마서가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택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구원해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존재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서로 많은 차이점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복음으로 하나 된 존재들입니다. 

결론 

참된 복음을 믿지 않는 이단자들은 교회 나오지 말고 자기 집단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연합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불자들은 절에 가면 되고, 이단자는 자기 모임에 가면 됩니다.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서로 돕고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예배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섬겨주셨는데 어느 정도까지 섬겨 주셨습니까? 목숨을 주시기까지 섬겨주셨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매우 존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서로 상대의 존재를 존귀히 여기고, 서로 섬기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수고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문안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사랑과 교제를 회복하고 서로 돌아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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