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자가 필요한 이유 (룻 1:1-5)

날짜 : 2016-11-06
본문 : 룻기 1:1-5

서론

오늘부터 구약성경 룻기를 중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룻기는 구속과 구속자에 관한 책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시인 괴테는 비록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룻기를 읽고 성경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탁월하고 완전한 걸작이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룻기는 불신자가 읽어도 아름답고 그 구성이 탁월한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66권 가운데 여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책이 2권 있습니다. 에스더와 룻기입니다. 이 두 책은 세 가지 면에서 대조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에스더는 유대인으로 이방인인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과 결혼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민족 말살의 위기를 겪게 된 유대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말렉의 후손인 하만의 음모로부터 유대인들을 건져내기 위해 유대인인 에스더를 이방인인 아하수에로 왕과 결혼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룻기는 그 반대입니다. 모압 여인으로 이방 여인인 룻이 유대인인 보아스와 결혼해서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육신적 족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둘째, 에스더서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섭리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책입니다. 반면 룻기는 4장으로 이뤄진 짧은 책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37번이나 언급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를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셋째, 에스더서는 아하수에로 왕이 베푼 잔치로부터 내용이 전개됩니다. 아하수에로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술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아각 왕의 후손 75,000명이 죽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룻기는 3명의 남자가 죽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마지막은 다윗의 조부인 오벳이 출생하는 복된 사건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렇듯 에스더와 룻기는 내용상 세 가지 면에서 대조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두 책 모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그림처럼 보여준다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룻기는 세 가지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Genealogy)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Typology)인 보아스를 통해 구속자 혹은 기업 무르는 자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 인간은 왜 구속자가 필요한지를 설명하려는 신학(Theology)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또 룻기는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의 특징에 따라 4개의 ‘W’로 정리하기도 하고, 룻이 처한 장소에 따라 구분하기도 합니다. 먼저 전자로 구분해 보면 1장은 ‘Weeping’입니다. 울고 있는 룻입니다. 2장은 ‘Working’입니다.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일하고 있는 룻입니다. 3장은 ‘Waiting’입니다. 타작마당에서 보아스의 반응을 기다라고 있는 룻입니다. 4장은 ‘Wedding’입니다. 보아스와 결혼하는 룻입니다. 그리고 후자로 구분해 보면 1장은 모압의 룻, 2장은 보아스의 밭에 있는 룻, 3장은 타작마당에 있는 룻, 4장은 가정에 있는 룻입니다. 
룻기가 ‘구속자’에 대한 말씀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구속’이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에게는 이 단어가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 역시 왜 하필 이런 단어를 쓰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속’, 또는 ‘구속자’라는 단어는 매우 은혜로운 단어입니다. ‘구속자’란 속전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구원하는 사람을 일컫기 때문입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보아스는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토대로 구속자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며, 왜 구속자가 필요한지, 그리고 구속받은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변화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구속자가 필요한 사람 

룻기는 왕족이나, 유명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기근을 당해 먹고 살 것이 부족해 져서 땅 팔고 집 팔고 가까운 이웃 나라로 이민 가서 살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가장이 일찍 죽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은 이방인인 모압 여인들과 결혼했지만, 두 아들마저 죽어 세 명의 여자만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유복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멜렉을 떠올리면 ‘타향살이’라는 곡이 생각납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저는 엘리멜렉이 이 같은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신문 1면에 실릴 기사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집안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유복하지도 못한 집안의 이야기가 주목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 이야기에 성경 66권 중 1권 분량을 할당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 평범한 집안의 이야기가 다뤄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높고 높은 분이십니다. 시편 113편 4~5절에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신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귀신, 악신도 많고 다양한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동남아를 가보면 가게마다 작은 신상을 모셔놓은 곳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손님이 물건에 대해 물어보고, 흥정하려고 해도 기도 시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대답도 하지 않고 신상에 절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모두 악신들이죠.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신 위에 계시는 가장 높은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가장 높고 영광스러운 창조주이시며 참신이십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천사들 중에 타락하고 부패한 것들이 이 세상 악신으로 활동합니다. 
여러분, 구속은 이렇게 높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이 낮고 천한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대업입니다. 시편 113편 6~7절에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이 진토에서 허덕이는 가난한 자를 살피시고 거름무더기 속에 있는 궁핍한 자를 건져내시는 것, 이것이 바로 ‘구속’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 궁핍한 자, 거름무더기 속에 있는 자, 진토에 있는 자들을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왜 몰라주십니까?”라고 교만하게 대들고 따지면, 하나님은 “내가 너 같이 교만한 자를 만나 줄 이유가 무엇이 있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가난한 자요, 궁핍한 자요, 거름무더기나 진토와 같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찾아가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신분이 높지 않다. 나는 학식이나 재산도 많지 않고 권력도 없다. 나는 내세울만한 집안의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만나 주시겠나?”라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도 만나주십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높이 들어 복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 가격이 한 앗사리온입니다. 그런데 한 앗사리온에 한 마리를 더 얹어 준다는 것은 그만큼 값어치가 없는 동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참새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참새 한 마리에도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10장 30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세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42절에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높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들의 머리카락, 물 한 잔에까지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영혼 구원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계시겠습니까? 사람 보기에는 나오미나 룻이 지극히 평범하고, 거름 무더기에 빠져 있는 궁핍한 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남편이 죽고 두 아들도 죽어 가문이 몰락한 처지에 놓인 여인들은 결코 주목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오미나 룻과 같은 이들이 귀한 사람들입니다. 영원 전부터 택하시고 사랑하시어 구속자를 보내주셔서 구원하시려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인 것입니다. 
구속자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분과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부자 등 다 가진 사람들에게도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자기 힘으로 잘 먹고 잘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죄 문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속자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Ⅱ. 구속이 필요한 이유 

룻기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배경이 되는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룻기의 시대적 배경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대입니다. ‘사사’(Judge)는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기 전에 통치하던 사람들입니다. 사사기 21장 25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시대에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우상숭배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에 기근을 보내셨습니다. 흉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회개하도록 돌이키실 때에 주로 네 가지를 사용하셨습니다. 기근, 질병, 전쟁, 자연재해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임을 알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다시 찾아야 했습니다.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재앙을 거두시고 다시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는데,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근으로 말미암아 떡이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기근이 오게 되었다면 엘리멜렉과 나오미, 두 아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에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엘리멜렉이 하나님을 왕으로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의 집과 땅을 팔고 온 가족이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이 모압으로 감으로써 두 가지 좋지 못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첫째, 엘리멜렉은 가나안 땅의 토지를 잃게 되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 하나님은 그 땅을 분배해 주시며 “이 땅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팔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토지가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자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어서 천국 문 앞에 섰는데, 하나님께서 네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시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비행기에 탔는데 승무원이 내리라고 하면 얼마나 언짢겠습니까? 
토지는 단순한 땅이 아니라 천국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권력자인 왕이라도 그 땅을 임의로 빼앗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 3절에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으로부터 이스르엘에 있는 포도원을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그 땅은 비옥하고 경치가 좋고 열매도 잘 맺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이 그 땅을 돈 주고 사려 하자, 나봇이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제 아무리 왕이라도 천국의 내 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토지는 생명의 상징이요, 구원의 상징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이 토지를 잃었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천국에 들어갈 자리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시간은 천국의 자리를 마련하고 집을 짓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모압 생활 10년 만에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가정의 대가 끊어졌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복에서 배제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이름이 후손들에게 계승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계대결혼제도’가 생겨난 것입니다. 
신명기 25장 6절에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아우가 홀로 된 형수와 결혼해서 죽은 형의 아들을 낳아 형의 이름을 잇게 하고 땅을 차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계대결혼제도’입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고, 두 아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계대결혼할 아들이 없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서 살 형편도 안 되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연 상태의 모든 인간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과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태어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천국에 들어갈 자리가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천국에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에서 배제된 것입니다. 모압에 있는 엘리멜렉의 가정은 도울 자가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오직 바랄 것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 밖에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에게나 모두 구속자,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구속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이민 간 것도 큰 잘못이었지만, 말론과 기룐이 모압 여인과 결혼한 것 역시 큰 잘못이었습니다. 창세기 19장 37~38절에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아들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온 롯이 술에 취해 정신이 없을 때, 두 딸이 아버지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모압과 암몬 족속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수노릇을 하였습니다. 신명기 23장 3절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는 육신적으로 남편이 죽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복에서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오르바는 그대로 비참한 상황 속에 다시 모압으로 돌아갔고, 룻은 룻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룻은 평소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해 주는 말씀들을 잘 들어 믿고 있었던 반면 오르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분은 이백만명이나 되는 우리 민족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을 주신 분이시다. 홍해와 요단 강을 가르셨고 이 분이 함께 하시면 대항할 자가 없다.” 나오미는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르쳤을 것이고, 룻은 잘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은 자리에서 듣고도 오르바처럼 믿지 않고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룻처럼 믿고 구속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 1:16~17).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룻은 남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룻이 주워온 이삭으로 죽을 끓여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밭의 주인이 보아스란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보니 이 여자는 모압 여인이지만 보통 여인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이후 룻의 청혼을 받아들여 룻을 구속한 남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구속했는지는 다음 시간에 계속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룻은 보아스와 결혼해서 오벳을 낳았는데, 오벳은 다윗의 조부였고,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에는 3명의 여자 이름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다말, 둘째는 기생 라합, 셋째가 바로 모압 여인 룻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지만, 밧세바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총 3명이 됩니다. 이 세 여인은 모두 가난하고 평범한 여자요, 이방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기재되었습니다. 유대인 여자 가운데는 단 한 사람도 언급된 이름이 없는데, 이방 여인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지만 창녀로 변장해 있다가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여인입니다. 여기 베레스로부터 예수님이 오시게 되었습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의 술집 여자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 선 똑똑한 술집 여자로, 보아스가 이 라합으로부터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와 이방 여인 룻으로부터 다윗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미천한 이방 여인들이 저주의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하나님이 버리신 곳에서 복을 주시는 곳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도 이방인이지 않습니까? 버림받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일본의 압제에서 구해 주시고 해방시켜주심으로 기독교의 위대한 부흥을 경험하여 부강하는 국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에베소서 2장 12절과 19절은 버림받은 이방인들에게 구속이 가져다주는 변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아멘! 

결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복을 주시지만 어려움을 주실 때는 즉각 회개하고 돌이켜서 복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룻기는 소망 없는 이방 여인 룻이 구속자인 보아스를 통해서 겪게 된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룻기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모압에 살다가 그대로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구속자로 말미암아 상상치도 못할 복을 받을 것인가?” 베들레헴과 모압 사이에서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책이 바로 룻기입니다. 우리 중에 단 한 사람도 모압에 거하고 모압 남자에게 돌아가는 오르바와 같은 사람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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