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오늘 본문에 흥미로운 한 가지 사실은 모압이 항상 ‘지방’으로 불리는 반면, 유다는 ‘땅’이라고 불리고 있는 점입니다. 영어로 ‘Country’와 ‘Land’이고, 히브리어로는 ‘지방’을 ‘쎄대’라고 하고, ‘땅’은 ‘에레츠’라고 합니다.
여기서 ‘지방’을 의미하는 ‘쎄대’는 좁고 별 의미 없는 공허한 땅, 멸망의 땅을 일컫고, ‘땅’을 의미하는 ‘에레츠’는 넓고 자원이 풍부하고 하나님이 복 주신 곳을 일컫습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보면 ‘모압 지방’은 아무 의미없는 공허한 삶의 영역을 가리키고, ‘유다 땅’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삶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룻기는 나오미의 며느리인 모압 여인 룻이 모압 지방을 떠나 유다 땅으로 터전을 옮겨오는 위대한 결단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위대한 삶의 영역으로 옮겨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룻이 모압에서 유다로 오고자 한 결단은 위대한 결단이고 신앙적 결단이며 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단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룻의 결단을 모범으로 삼고, 본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룻이 혼자서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결단을 하기 까지 선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바로 시어머니인 나오미였습니다. 오늘은 이런 위대한 결단이 왜 중요한지, 나오미는 어떻게 며느리인 룻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는지, 나오미의 격려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위대한 결단을 위해 필요한 격려의 중요성
혼자 갑자기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것은 흔치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전도를 받거나, 누군가의 격려와 칭찬과 도움으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만큼 격려가 중요합니다. 룻이 이렇게 복된 결단을 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강력하고 결정적인 격려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결단이었고, 룻이 혼자 결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 룻의 결단은 안전상으로 매우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편이 모압 지방이고 서편이 유다 땅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까지는 불과 80km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습니다. 수원에서 강남까지 밖에 되지 않습니다. 걸어서 가도 4~5일이면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다 땅은 무법천지였고, 사람마다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아무런 방어수단도 가지지 못한 두 여인이 그 길을 이동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둘째, 이 결단은 심리적으로도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8절에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향해 네 어미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르바와 룻의 친정어머니가 생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친정엄마와 이별하지 말고 돌아가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친정엄마와 친정 집안의 가족들과 이별하고 친숙한 고향의 문화를 뒤로한 채 타국으로 가서 이방인으로 살겠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유대인과 모압 사람들 사이에는 깊은 적개심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룻의 결단은 심리적으로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셋째, 이 결단은 경제적으로도 부담스러운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과부는 오늘날보다 훨씬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과부를 돕는 사회복지나 연금과 같은 제도가 구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을 잃은 아내들은 연명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일자리를 얻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인 모압 사람들을 향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직장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모압에서 온 과부와 그의 이방인 며느리를 결코 잘 대해줄 리가 없었습니다. 에스겔 22장 7절에 “그들이 네 가운데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서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동족 중의 고아와 과부를 해하기도 했는데, 하물며 모압 여자이자 이방 여인인 룻을 잘 대해 줄 리가 없는 것입니다. 큰 해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먹고 살기 어려운 환경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넷째, 룻의 결단은 신분상으로도 소망이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11절에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오미는 과부가 된 룻과 오르바에게 “너희가 다시 결혼을 하려면 내가 다시 아들을 낳아 계대 결혼을 해야 하는데, 설령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너희는 2명이나 되는데 누구에게 아들을 줘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시집갈 계획도 없으니 나를 따라온다면 너희는 다시 결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고향에 남아 모압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사랑받으며 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나를 따라오면 신분상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가능성이 없다”는 소망 없는 말을 꺼낸 것입니다. 그러니 모압 지방에서 유다 땅으로 이민을 가서 사는 것은 매우 위험부담이 크고 손해가 많은 일이었습니다.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는 친정식구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면에서 유리한 결정이었습니다. 룻과 오르바가 20세쯤 결혼을 했다면 결혼 10년 만에 남편을 잃었으니 이들은 불과 30대 초반밖에 되지 않는 젊은 과부였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아직 젊고 앞길이 창창한 두 며느리를 향해 “평생 결혼도 못하고, 사랑받는 아내가 될 수도 없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도 없고, 먹고 살기도 어려운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할 유다 행을 택하겠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모압 지방에 남아 있는 것이 너희에게 유리하다고 설득한 것입니다.
둘 중 하나인 오르바는 유리한 쪽으로 결정하고 모압에 남기로 했지만, 룻은 이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유다 땅으로 가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결단이며, 여자 혼자 힘으로 내리기 어려운 결단이고, 신앙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이 결단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선한 영향력과 격려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의지만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주변 사람들의 좋은 격려와 영향을 받고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믿은 신자들의 좋은 격려와 영향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격려는 이처럼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입니다.
Ⅱ. 위대한 결단의 계기와 하나님이 사용하신 격려의 수단
그렇다면 룻이 이렇게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어떤 수단을 사용하셔서 룻이 이런 결단을 내리도록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사용하신 격려의 수단이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시 시대적 배경은 사사들이 통치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성경 66권이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모세오경과 욥기, 여호수아 정도가 기록되어 있었을 것을 감안한다면 룻이 성경을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이 몇 권 되지도 않는 성경이 고가의 파피루스나 가죽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룻이 기록된 계시인 성경의 영향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룻이 성경을 읽고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룻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고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실이었습니다. 룻은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었으며, 유다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위대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아버지인 엘리멜렉과 남편인 말론, 그리고 오르바의 남편인 기룐은 비교적 일찍 죽었기 때문에 이런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어려웠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룻의 가정이 전통적인 모압의 가정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유다 땅을 떠나 모압으로 이민 와서 살고 있는 형편일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적인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었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에게 항상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너희가 믿는 신들과 다른 분이시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시며, 그는 천지의 창조주요, 살아계신 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고, 전능한 분이시며, 우리 민족이 애굽에 노예 되었을 때, 강한 손과 편 팔로 해방시켜 주신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두 며느리들은 이러한 시어머니의 직・간접적인 신앙교육을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가정의 신앙적 분위기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집안의 가장이 우상숭배하면 자식들도 모두 우상숭배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집안에 향을 피워놓고 우상숭배하고 귀신을 섬기면 그 집안은 영적으로 어두운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흑암 가운데 있는 집안에는 우상숭배하는 자손들만 자라게 됩니다. 신앙인이 배출되기 매우 어려운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은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신앙적 분위기가 잘 조성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가정이 복을 받고, 자녀들이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적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는 장례식을 가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가족 중에 신앙인과 우상숭배자가 혼재해 있으면 항상 다툽니다. 하도 싸워서 제가 예배를 집례하러 갔다가 쫓겨 나온 적도 있습니다. 우상숭배하는 가족들의 세력이 강하니까 먼 거리를 갔지만 예배도 하지 못하고 쫓겨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상의 영향이 미치고 있는 가정임을 금새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우리 자손들은 가정을 이뤄도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신앙적 분위기가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간과할 수 없이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룻이 이 위대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쳐온 사람은 역시 시어머니인 나오미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오미의 어떤 특징들이 이렇게 어려운 결단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우선 나오미의 훌륭한 인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8~9절에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11절에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두 며느리들을 향해 ‘내 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고부관계는 어려운 관계 아닙니까? 사이가 좋기 어려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내 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을 다 기억하고 있으니 이제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 다시 결혼해서 평안한 가정을 이루어 살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어머니 나오미의 성격과 인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친절하고 자상하며 이기심이 없고 사랑이 풍성한 사람입니다. 표독스럽고 이기적이며 비판적인 인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더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나오미의 형편과 처지가 지금 감사할 수 있는 상황입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되고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보다는 불평하고 원망할 일들만 가득하지 않습니까? 남편이 죽고 다 키워 놓은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무엇을 감사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복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말끝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언급하며 자기 인생에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8절, 9절, 13절을 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그 중에는 기쁨도 있지만 고통도 있다. 때로는 하나님의 손길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복이 될 때도 있지만, 차디찬 매가 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고 전능한 분이시며 사람의 인생을 지도하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존하고 있는 나오미의 신앙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며느리 룻에게는 지울 수 없는 강력한 영향을 준 것입니다. 이처럼 인격적인 영향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영향은 더욱 강력한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시절에 친하게 지내던 한 친구의 아버지가 신문사 주필이셨는데 회갑잔치를 하게 되어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맛있는 밥을 얻어먹으려고 갔던 저는 친구의 아버지가 식사에 앞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 어른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제게 복을 주시고 강건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데, 제 가슴에 ‘하나님 아버지’라는 문구가 비수처럼 박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한 마디가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훌륭한 분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다면, 나는 증조할아버지쯤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아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엉뚱한 사람이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정작 아들은 감화를 받지 못했지만, 저는 큰 감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인격적인 감화도 주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영적 감화를 준 사람이었습니다.
Ⅲ. 나오미의 격려를 받고 나타난 결과
오르바와 룻은 둘 다 시어머니로부터 인격적인 감화를 받았습니다. 두 며느리 모두 시어머니 나오미를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13절 전반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며느리 모두 시어머니 나오미로부터 인격적인 감화를 받았습니다. “우리 어머님같은 분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우리 어머님 같은 분이 어디에 있나. 우리 어머님을 떠나는 것은 참으로 마음이 아픈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입을 맞추고 다시 울었던 것입니다. 룻과 오르바의 차이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오르바는 인격적인 감화를 받는 것에 그쳤던 반면, 룻은 영적인 감화를 받는데 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오르바는 영적인 감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를 공경할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차원에까지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자녀들에게 많은 감화를 미칩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감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영적인 감화를 주어 자녀들이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참으로 혼란스럽고 시국이 어려운데, 자녀들이 유혹을 받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어려서부터 영적인 감화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영적인 감화를 받은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면 늙어도 떠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한 동안 헤맬 수는 있지만 나중에 다 돌아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인격적인 감화에 그치지 말고 영적인 감화까지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룻이 나오미로부터 영적인 감화를 받아서 참된 신앙인이 되었다는 네 가지 증거를 16~17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말씀입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첫째,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 백성의 일원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모압 지방에서 유다 땅으로 가려는 것은 어머님이 살아계시는 동안만 봉양하고 말 것이 아니라 다시 모압 지방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모압 지방으로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가 죽어 장사되시는 유다 땅에 나도 거기 죽어 장사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얼마나 확고한 결단입니까?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넷째,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목숨을 걸고 시어머니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목숨을 걸고 맺는 약속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룻은 하나님의 존전에서 거룩한 언약을 맺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감화에 머문 오르바는 결국 모압 지방과 모압의 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감화를 받은 룻은 유다 땅으로 거처를 옮기는 위대한 결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매우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결단을 내리고 거처를 옮길 것을 결정한 룻을 향해 어쩌다 이렇게 기구한 인생이 되었느냐고 손가락질했을 것입니다. 망한 인생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유대인에게 시집을 가더니 남편을 잃고 가정의 대가 끊어져 소망을 잃게 된 룻을 불쌍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룻의 위대한 결단을 기쁘게 여기시고 그에게 엄청난 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족보에 등재되었고, 유다 땅 최고의 부자였던 보아스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으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형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룻의 결단은 참으로 위대한 결단입니다. 그리고 이 결단이 있기까지 시어머니 나오미의 선한 영향력 역시 간과할 수 없이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룻은 같은 처지가 된 오르바와 거취를 놓고 상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서인 오르바와 상의하지 않고 시어머니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따른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결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어울려 살고 하나님의 백성과 육신적 가족으로 지내면서도 오르바처럼 피상적 차원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인격수양 정도의 차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왜 교회를 다니십니까?”라고 물어보면 “교회 나가야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면 승진하고, 출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독교를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익을 얻는 일에 실패하면 오르바처럼 다시 모압 지방으로 돌아갑니다. 재산을 증식시켜주고, 수명을 연장해 주는 존재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따르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모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중간에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오르바와 같이 인격적인 감화차원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모두 거짓된 신앙입니다.
그러나 룻은 “나는 이제 유다 땅으로 가면 모압 지방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어머니가 죽어 장사되는 곳에 나도 거기 죽어 장사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말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인들 중에는 나오미처럼 친절한 인격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초신자들에게 인격적인 감화를 주고 영적인 감화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초신자를 격려해서 허무한 우상숭배의 땅 모압 지방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복된 유다 땅으로 옮겨오도록 위대한 결단의 격려자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여정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위험천만한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통의 섭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과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바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쓰나미와 폭풍, 태풍 등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풍랑치듯 요동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짐승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치 세력입니다. 거짓된 선지자들이며, 성도들의 원수들입니다.
이 세상은 바다와 같아서 항상 요동치며 예상치 못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셔서 지금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파도 속에서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모압 지방에 남아 오르바처럼 사는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오미처럼 위대한 결단을 촉구하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룻처럼 과감하게 유다 땅을 향해 나아가는 참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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