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겪은 중요한 경험 중 하나는 영적으로 최고점에 도달하면 곧바로 최저점으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가장 충만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31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쓰신 십계명의 두 돌비를 받았고, 성막에 관한 모든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기분 좋게 하산하는데, 산 아래에서는 대제사장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바로 여호와라고 선포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우상을 섬기게 했습니다. 30장까지의 내용이 시내산 꼭대기에서 은혜를 받은 최고조의 경험이었다고 한다면, 31장은 영적으로 최악의 순간의 모습들을 담고 있습니다.
레위기 8~9장에도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안수를 받고 첫 번째 사역을 시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제물을 다 태우고 아론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경험이 끝나고 레위기 10장에서는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은 아론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나답과 아비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7~10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사방의 적들을 파하고 왕국에 평안히 거하게 되었을 때, 11장에서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룬 바로 그 순간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진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2~24장까지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고용해서 이스라엘을 세 번이나 저주하려 했지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그 저주를 도리어 축복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저주할 자가 없고, 복술과 마술로도 이스라엘을 괴롭힐 수 없다는 위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건 뒤에 민수기 25장에서 그 유명한 싯딤 사건이 발발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높고 높은 것이지만, 그에 반해 인간의 죄성은 깊고도 깊은 것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민수기 25장의 사건을 네 가지 주제들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중적인 죄에 빠졌다
1절에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음행은 육체적인 죄, 성적인 죄를 일컫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육적인 죄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2~3절에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되었다는 것은 브올 지방에서 섬기는 바알 신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여자들과 음행을 저지르고, 여자들이 바알 신에게 바쳤던 음식들을 나눠먹으며 함께 우상 숭배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자들의 유혹에 빠져서 음행을 저지르고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는 영적인 범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즉 이중적인 죄의 올무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귀신을 숭배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바알 신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사실 바알 신 숭배와 음행은 떼려야 뗄 수 없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알 신은 일명 풍요의 신, 농업의 신이었는데, 바알을 섬기는 종교의 교리 구조가 땅에서 바알을 섬기는 백성들이 음행을 저지르면 하늘에서 바알 신의 음욕이 자극되고 그러면 바알이 연애를 해서 땅에 비를 내리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유치한 논리로 만들어진 교리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알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땅에서 저지르는 육체적인 음행은 단순히 쾌락을 위한 것을 넘어 바알 신을 자극하기 위한 일종의 예배 행위의 핵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음행과 바알 신 숭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이러한 이중적인 죄에 빠지게 되자 하나님의 큰 진노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3절 후반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에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질투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분노하게 되도 대수롭지 않은 이유라면 금방 화를 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외도로 말미암은 진노는 쉽게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 질투의 진노를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진노를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적인 죄,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불륜을 남들도 다 즐기는 로맨스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이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일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귀신에게 제사하고 우상 숭배하고 점치러 다니고 괴이한 행습에 빠져 이단들의 예배에 참석하고 이단들이 가르치는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것은 모두 성도의 삶 속에 귀신을 초대하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귀신이 한 번 들어오게 되면 삶의 갖가지 괴롭고 해로운 일들이 발생하게 되고 귀신들이 영적인 도적이 되어 아무런 권세도 없이 성도의 영혼을 죽이고 노략질하고 멸망시키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죄도 위험하고 우상 숭배, 귀신 숭배도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20~21절에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만 경배해야 합니다. 내게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 진리임을 믿는다는 태도로 신앙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Ⅱ. 이 사건의 배후에는 거짓 선지자 발람의 악한 계교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중적인 죄에 빠지게 된 싯딤 사건의 배후에는 거짓 선지자 발람의 사악한 계교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이 악한 계교를 꾸몄습니다. 민수기 31장 16절에 싯딤 사건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이스라엘을 세 번이나 저주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이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점쟁이가 고집도 엄청 셉니다. 악한 계교를 꾸며서 모압 왕 발락에게 제안한 것입니다. “왕이시여, 우리가 말로 저들을 저주하는 것이 어렵겠습니다. 그러니 미스 모압들을 골라서 싯딤에 모아 놓고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도록 하세요. 음행으로 유혹하면 그들이 바알을 신으로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모압 왕 발락을 부추겨서 싯딤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은 사악한 계교를 꾸미는 일에 아주 능숙한 선수였습니다.
성도는 이처럼 사단의 다양한 작전과 전략을 가지고 성도들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 가지 궤계에 실패했다고 해서 바로 물러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향해서도 세 번 시험하고 잠시 물러났던 사단입니다. 후일에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장본인입니다. 성도는 사단의 궤계를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귀신들의 궤계를 눈 여겨 살피고 사단의 전략과 작전에 무지해선 안 됩니다. 주로 우상 숭배하는 곳은 어둡고 음침한 곳입니다. 그런 곳에는 늘 귀신들이 서식합니다.
그렇게 어둡고 음침한 곳에 자주 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귀신의 역사에 잠식되는 것입니다. 귀신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1절에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단은 궤계를 가지고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가운데 사단이 사용한 주요한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치적인 세력을 통해서 교회를 협박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단과 귀신을 추종하는 세력들과 연합해서 세력을 형성한 후,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에 따르면 용이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을 이용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두목은 사단, 옛 뱀입니다. 사단이 짐승들을 이용해서 교회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 6절에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세기의 로마 황제들이 얼마나 기독교를 많이 핍박했습니까? 이들은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회사가 유세비우스가 쓴 방대한 분량의 『교회역사』라는 책은 기독교를 핍박하던 로마 황제 10명이 제명에 죽지 못하고 모두 단명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1세기도 그랬지만, 21세기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얼마든지 초대교회가 겪었던 핍박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자유가 없는 국가들은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용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협박하고 핍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단은 거짓된 종교 세력들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훼파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술사, 무당, 점쟁이, 박수, 이단 등 거짓된 종교 세력들을 이용해서 교회를 공격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이를 ‘땅에서 나온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1절에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에서 나온 짐승, 거짓된 종교 세력들은 겉으로 보기엔 양처럼 순하게 생겼지만 속으로는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것입니다. 귀신들은 허황된 교리도 얼마나 잘 만드는지 모릅니다. 말도 안 되는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거짓된 교리를 전파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집단에 가면 귀신의 역사가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사단은 성도들을 미혹해서 거짓된 기적을 행하고 인기를 끌어서 자기들 세력으로 형성시키는 방법으로 교회를 훼파합니다. 땅에서 나온 짐승들을 이용해서 성도들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이단 세력에 끌려가지 마시고, 점이나 사주팔자 같은 것 보러 다니지 마시고, 문어점 같은 것 절대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아무리 할 일이 없다고 문어를 가져다가 점을 봅니까? 축구 경기 결과를 맞추는데 왜 문어가 필요합니까? 푹 삶아서 초장에 찍어 먹으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거짓된 종교 세력으로 성도를 미혹합니다.
셋째, 사단은 세속적인 문화를 통해서 성도들을 범죄케 하는 것입니다. 세상 문화라고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것도 있습니다. 영화도 봐야 하고, 드라마도 봐야 하고 스포츠도 얼마든지 건전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이런 것들을 이용해서 성도를 범죄케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속 문화에 깊이 빠져 신앙을 떠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컴퓨터 게임이 그렇고, 락 음악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임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귀신 역사에 메여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지 않습니까? 락 음악에 빠져 사는 사람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납니다. 모두 귀신 들려서 나오는 현상들입니다. 요즘은 그런 세속 문화를 이용해서 성도를 넘어뜨리는 일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용어를 빌리면 이는 ‘바벨론’, ‘음녀’와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4~5절에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단이 정치, 종교, 문화적인 세력을 위시하여 우리의 신앙을 파괴하고 삶을 무너뜨리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귀신은 이 사회에 두루 퍼져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귀신이라는 도적이 우리를 노략질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진 이중적인 죄의 배후에는 사악한 계교를 부린 거짓 선지자 발람이 있었습니다.
Ⅲ.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징벌로 나타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진 이중적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에 상응하는 징벌이 없이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의 범죄에 상응하는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떠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하신 징벌의 내용은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해 목매어 달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공개처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두령들을 죽여야 했을까요? 두령들도 가서 음행을 저지르고 우상 숭배했기 때문에 이들을 처형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는 이런 죄에 빠지지 않도록 강력하게 경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실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않고 정확하게 집행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가 성질이 났기 때문인지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지만,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준행하지 않았습니다.
5절에 “모세가 이스라엘 사사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관할하는 자 중에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는 레위인들이 흩어져서 재판장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로 하여금 바알브올에게 부속된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한 것입니다.
4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과 5절의 모세의 명령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것이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자세히 보면 징벌의 대상도 다르고 방법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령을 죽이라고 명하셨는데, 모세는 바알브올에 부속된 사람을 죽이라고 했고, 죽이는 방법도 태양을 향해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죽이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냥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제야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울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6절 전반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문에서 울 때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령들을 죽였으면 백성들이 울 일이 없는데, 부속된 사람들을 죽이라고 하니 백성들이 두려워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이 정확하게 시행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자 두 가지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는 더욱 대범한 범죄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6절 후반절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온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은 죽게 되어 울고 있는데, 한 남자가 모압 여자를 데리고 대낮에 모세와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자기 장막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 장막 안에는 부모와 형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남자는 지금 바알 신전에서 음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장막에서 음행을 저지르고자 모압 여인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세의 명령을 넘어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키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파렴치한 범죄입니까? 부모님과 자기 형제들이 근심하는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백성들이 진노를 당하게 될 것이 두려워 울고 있을 이 때에 남자와 여자가 음행을 저지르기 위해 장막에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14~15절에 보면 이 남자의 이름이 시므리요, 모압 여자의 이름이 고스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므리와 고스비는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대범하고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또 하나는 백성들에게 염병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24,000명이라는 사람이 삽시간에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일에 대한 징벌을 내리실 때는 정확하고 분명하게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 회중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Ⅳ. 비느하스의 용맹이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게 되었다
이 와중에 사람들은 “이 일을 어찌할꼬? 시므리와 고스비를 누가 척결할 것이냐? 네가 할 것이냐?”하며 서로 미루며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비느하스라는 용맹스러운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 대범한 범죄에 대해 책임 지려하지 않을 때, 비느하스가 회중 가운데 손에 창을 들고 일어나 시므리의 장막으로 쳐들어가 시므리와 고스비의 배를 한 창에 꿰뚫어 하나님의 진노를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비느하스, 그는 대제사장 아론의 손자이자 엘르아살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자 염병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그치게 되었습니다. 11절에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3절 후반절에도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비느하스가 한 일을 두고 ‘속죄’라고 했습니다. 속죄는 영어로 네 종류의 단어가 있는데, 첫째는 ‘Atonement’(속죄)고, 둘째는 ‘Redemption’(구속)이며, 셋째는 ‘Reconciliation’(화해), 넷째는 ‘Propitiation’(화목제물)입니다. 여기 13절 후반절에 기록된 ‘속죄’는 네 번째 의미인 ‘화목제물’로 쓰인 경우에 해당합니다. ‘Propitiation’이라는 것입니다. 즉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하는 화목제물로써 쓰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였고, 마귀에게서 해방시키기 위한 구속이셨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졌던 우리를 가깝게 한 화해였으며, 우리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불식시키는 화목제물이 되신 사건이었습니다.
비느하스가 창을 가지고 남녀의 배를 꿰뚫어 죽임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백성들로 염병에 죽게 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상을 주셨는데,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아론에게 아무리 손자가 많아도 비느하스의 후손에게 대제사장 직분을 계승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결론
그러면 이 말씀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모두 육적인 죄, 영적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에베소서 2장 3절에도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던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늘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노의 자녀로 살다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님은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거두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구절은 신약성경에 6번이나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로마서 3장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일서 2장 2절에도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일서 4장 10절에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지고,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 일이 없어집니다.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귀의 권세에서 모두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가깝게 동행하며 살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지금도 성도의 삶에 도적으로 찾아와 노략질하고 협박하고 훼파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개구멍으로 들어와서 성도의 삶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여 마귀를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성도의 명령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하게 악몽을 꾸고 남을 미워하고 분노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정상적인 성도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귀를 몰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향해 진노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진노를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와 귀신들이 성도의 삶에 붙어 있을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도적질입니다. 도적질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느하스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주었는데, 그는 예표적인 인물입니다. 실체는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실체로써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풀어주셨고,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향해 얼굴빛을 비춰주시고 미소를 지어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존재가 되었고, 복을 누리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응답해 주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갖게 된 권세는 엄청난 것이고, 축복 역시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큰 구원자가 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고 이 믿음으로 늘 승리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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