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든 (민 30:1-9)

날짜 : 2017-07-30
본문 : 민수기 30:1-9

사도 바울은 말세가 되면 고통하는 때가 온다고 했는데, 언급한 말세의 특징 중 하나는 ‘배반하는 것’(Treacherous)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4절에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신하기를 밥 먹듯이 하고 약속한 것을 잘 어기며 신뢰할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젊은이들도 결혼할 때는 평생 함께 하기로 서약하지만 약속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정치가들도 선거할 때 내놓은 공약을 왜 지키지 못했느냐고 물으면 안 지킨 것이 아니라 못 지킨 것이라며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30장은 소위 ‘서원규례’를 다루고 있는 장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입으로 서원한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민수기 30장의 기본 메시지입니다. 
서원 또는 서약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겠다든지 혹은 하지 않겠다든지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엄숙한 구두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글로 써서 하는 것도 아니고 구두로 했기 때문에 효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서원 또는 서약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30장에는 두 가지 종류의 서약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에 “그 아비가 그의 서원이나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듣고도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모든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에도 “또 여자가 만일 어려서 그 아비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 서원한 일이나 스스로 제어하려 한 일이 있다 하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원하는 일과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이 서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원은 히브리어로 ‘네데르’라고 합니다. 영어로 ‘Vow’라고 하는데, 어떤 일을 하겠다고 구두로 언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약은 스스로 제어하려는 것으로, 히브리어 ‘아사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어떤 것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구두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서원은 해 보겠다고 하는 것이고, 서약은 하지 않겠다고 언약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는 서원에 관한 규정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는데, 레위기와 민수기에만 일곱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주로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제물을 드리겠다고 서원한 경우나 자기 몸을 일정 기간 동안 나실인으로 서원하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오늘 읽은 민수기 30장의 서원규례는 레위기와 민수기에 기록되어 있는 일곱 가지 서원에 관한 규례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규례입니다. 그러나 레위기와 민수기에만 그 서원에 관한 예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의 서원이 기록되어 있는데,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 중 막내였습니다. 형 에서가 있었는데 야곱이 사기꾼이라서 형이 받을 복을 모두 가로채서 달아나게 됩니다. 2~30대에 저지른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나이 70세가 넘었을 때 형의 복을 가로채서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도망을 가던 길에 벧엘이라는 지역에 이르렀을 때 뜰에 머물러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돌을 가져다가 베개를 삼고 잠이 들었는데 신령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땅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사닥다리가 놓였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장면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끝에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야곱은 꿈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자손의 복과 땅의 복, 그리고 보호해 주시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꿈에서 깨어나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서원을 했습니다. 나로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세 가지를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이 돌을 세운 이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기억하여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야곱은 이 벧엘에서의 서원을 일평생 기억하며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사사기 11장에 보면 잘못된 서원의 실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입다의 서원입니다. 입다는 기생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홍길동처럼 서자 출생이었던 입다는 어디서든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어려서부터 싸움꾼이 되었습니다. 학교도 안 다니고 하니 동네에서 싸움질만 하다가 싸움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 암몬 족속에게서 우리를 구원할 자가 입다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찾아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입다는 이 때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서원을 하게 되는데, 내게 암몬 족속을 붙여주셔서 승리하게 되면 돌아오는 길에 내 집 문 앞에서 나를 가장 먼저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경솔한 서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무남독녀 외딸이 그를 맞으러 나왔기 때문입니다. 입다는 서원을 지켜 딸을 번제로 하나님 앞에 드렸지만, 이는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법한 경솔한 서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서원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원하시지도 않은 서원을 한 것입니다. 아예 서원을 하고 지키지 않은 사람보다는 낫지만, 하지 않았으면 더욱 좋았을 법한 서원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도 한나의 서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가나라는 사람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브닌나와 한나였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을 많이 낳은 반면, 한나는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브닌나는 한나를 구박하기 시작했고, 구박을 당한 한나는 마음에 맺힌 게 많아서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는데 그저 입술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기도를 한 것입니다. 제사장 엘리는 “너는 왜 성전에 와서 술에 취해 기도를 하느냐?”며 한나를 나무랐지만, 한나의 마음에 원통함이 가득한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나는 이 날 하나님 앞에 서원을 드렸습니다. “만일 내게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평생에 여호와께 드리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아들을 주셨는데, 그가 바로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다는 의미의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평생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라를 섬기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바친 한나에게 3남 2녀를 주셔서 자손의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런 경우들을 보면 서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민수기 30장에 기록된 서원규례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요? 이 규례는 몇 가지 케이스로 분류됩니다. 

Ⅰ. 민수기 30장에 기록된 ‘서원규례’의 내용 

2절에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남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2절은 남자가 서원을 한 경우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서원을 한 경우 서원의 내용을 이행해야 할 책임이 당사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남자 바로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여자는 모자를 쓰는 것이 가능하지만, 남자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서원이나 서약을 한 경우 그것을 이행할 직접적인 책임이 당사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는 다릅니다. 
3~16절은 여자가 서원이나 서약을 한 경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서원한 내용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세 가지 경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3~5절에 보면 여자가 어려서 결혼하기 전에 서원이나 서약을 한 경우 아버지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아버지께 서원의 내용을 말씀드렸지만, 듣는 날에 아버지께서 아무 말이 없으면 서원을 이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허락지 않으시는 경우에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둘째, 6~8절에 보면 여자가 결혼을 하는데 경솔한 마음으로 서원이나 서약한 것이 있는 경우 남편이 듣고 아무 말이 없으면 지켜야 하지만 듣는 날에 서원한 내용을 허락지 않으면 서원이나 서약 모두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신부가 남편에게 “첫 아들은 목회자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라고 이야기 한 경우 남편이 반대하면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듣는 날에는 가만히 있다가 1년 쯤 지난 후에 안 된다고 하면 그것은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건축헌금 1억 원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서원했더라도 남편이 듣는 날에 허락지 않으면 무효가 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허락지 않는다고 서원을 이행할 책임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듣고 아무 말이 없으면 지켜야 하지만, 듣고 허락지 않으면 무효가 됩니다. 
셋째, 10~12절에 보면 “부녀가 혹시 그 남편의 집에 있어 서원을 하였다든지 마음을 제어하려고 서약하였다 하자 그 남편이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고 금함이 없으면 그 서원은 무릇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은 무릇 지킬 것이니라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무효케 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던 일에 대하여 입술에서 낸 것을 무엇이든지 이루지 못하나니 그 남편이 그것을 무효케 하였은즉 여호와께서 그 부녀를 사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듣는 날에는 가만히 있다가 며칠이 지난 후에 서원이나 서약을 취소하려 하면 결혼한 아내에게 책임이 없고 남편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듣는 날에 안 된다고 하면 그 서원이나 서약은 모두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안 지켜도 됩니다. 
그런데 9절은 독특한 경우입니다.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의 서원이나 무릇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은 지킬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결혼했다가 혼자가 된 사람들을 속된 말로 ‘돌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경우 서원이나 서약을 했을 때, 남자의 서원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합 다섯 가지 경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규례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Ⅱ. 민수기 30장의 세 가지 영적인 의미 

첫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삶속에 권위에 관한 질서를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갖는 권위가 있고, 아내들에게 남편으로서 갖는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과 조직 속에 질서를 세워두셨습니다. 남자의 서원이나 서약은 하나님께 직접적인 책임을 갖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는 결혼 전에는 아버지, 결혼한 후에는 남편을 거친 다음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고 남성이 여성보다 우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보다 우월한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사람이 된 경우,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부모님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일평생 농사를 지어 양육한 부모님을 향해 ‘무식한 부모’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주 배은망덕한 자녀들입니다. 권위의 질서도 모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또 남편보다 훌륭한 아내들도 아주 많습니다. 남자가 꼭 우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고 권위를 인정치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직장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사보다 탁월한 말단 사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사를 상사로써 대우하는 것은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봐도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똑같은 신성을 소유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 항상 순종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를 통해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적 존재라고 주장하는데 허무맹랑한 헛소리입니다. 권위의 차이를 능력의 차이와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목회자의 능력이 평신도들보다 떨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평신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평신도가 목회자의 능력을 무시해도 되는 걸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주신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도 권위의 질서를 세워 놓으셨습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학생들이 어학연수를 많이 다니다 보니 영어선생님들이 영어 가르치는 일이 참 어렵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발음을 지적하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발음이 더 좋다고 해서 학생이 선생님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학생이 선생님을 대신해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정당한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요즘 새벽기도회 시간에 ‘귀신론’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미국에 콘라드 뮤렐이라는 장로교 목사가 이 분야의 권위자입니다. 성경적이고 건강한 귀신론에 대해서 책을 저술해서 그 책을 참고로 해서 귀신론을 강해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뮤렐 목사님이 그 책에서 말하기를 귀신이 어디에서 많이 역사하는지에 대해 언급했는데, 권위를 무시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가정, 직장, 교회, 학교, 사회 어떤 조직이건 마찬가지입니다. 권위가 무시되는 곳에는 귀신이 역사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저 역시 이 말에 크게 동의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여성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시는 분임을 잘 보여줍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들어간 국가들은 모두 여성 인권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높은 곳이 뉴질랜드와 대한민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성부가 있는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여성 인권이랄 것이 있었겠습니까? 기독교가 들어오면서부터 여성 인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민수기 30장의 내용은 남자가 경솔한 서원을 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과 동시에 여자는 혹시 경솔한 서원을 했어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여성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민수기 30장 6절에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경솔히 그 입에서 발하였다 하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성을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15절에도 “그러나 그 남편이 들은 지 얼마 후에 그것을 무효케 하면 그가 아내의 죄를 담당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듣는 날에는 가만히 있다가 서원이나 서약을 무효화하게 되면 남편이 그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여성의 편에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권위를 주신 목적은 이를 오용하거나 남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권위를 가지고 아내와 여자를 보호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권위를 주시고 그 권위를 가지고 여성을 보호하는데 사용하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가정폭력이 많지 않습니까? 배우지 않은 사람이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까지 다 졸업한 사람들이 때리는 것입니다. 국가에 권위를 부여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해서 안기부에 잡아 때리고 괴롭히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이것이 민수기 30장에 기록된 서원규례가 갖고 있는 정신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말을 하고선 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말을 바꾸는 등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겐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천국에 갔는데 베드로가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왜 천국에 들여보내줘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을 갖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는데, 베드로가 “얘, 너는 농담도 못하니!”하면서 발뺌을 한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한 바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미쁘시고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언약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30장 이외에도 레위기와 민수기에는 6번이나 서원에 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성도를 향해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잘 보여줍니다. 
2절에도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고, 4절 후반절에도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동일한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34~37절에 보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나뱁티스트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해서 성도는 그 어떤 서원이나 서약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온당한 해석이 아닙니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아무런 서원이나 서약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위증하지 않겠다는 서약도 필요하고, 결혼할 때 서약해야 하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서원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증거력을 확보하려면 때론 맹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맹세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지킬 수 없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명하신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서원이나 서약은 겉보기엔 사람 앞에 했더라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그러면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서원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누차 강조한 것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이미 이들은 시내산 언약을 체결한 백성들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서원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이 서원한 내용을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기 직전 모압 평야에서 했던 설교 모음집이 신명기인데, 신명기 28장을 보면 이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과 이 언약을 어겼을 경우 담당해야 할 저주의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약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언약을 어기면 무엇을 해도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시내산 언약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언약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역사서와 예언서의 내용들은 시내산 언약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금방 이해가 되는 내용들입니다. 북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언약을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고,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된 것도 똑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어긴 것과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도 원래 약속을 어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음으로써 모두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허리 안에 있는 인류는 모두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아담 개인의 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를 대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깨어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는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위언약이 깨어진 이후의 인류의 역사는 한 마디로 저주의 역사입니다. 인류 안에 저주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고,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뱀의 머리를 깨뜨리고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류가 저주에서 벗어나 축복으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모든 저주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저주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멸망이 변하여 영생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언약’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저주에서 벗어날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뿐입니다. 그래서 행위언약은 깨어졌지만, 은혜언약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은혜언약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된 우리 모두도 하나님 앞에서 했던 모든 서원과 서약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결혼 서약, 직분자 서약, 개인 간의 거래, 약속 등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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