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개의 도피성 (민 35:9-15)

날짜 : 2017-09-03
본문 : 민수기 35:9-15

하나님은 민수기 3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업을 주시는데 애매모호하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으로 명백한 경계가 있는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요단 강을 건너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진정 우리에게 주실지, 주지 않으실지 고민하고 의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는 확실한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그 곳에 들어가 살면서 지켜야 할 세 가지 규례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민수기 35장에 두 가지, 36장에 마지막 한 가지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주의해야 할 세 가지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면서 주의사항을 일러주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민수기 35장에 기록된 두 가지 규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레위인들이 거할 성읍에 관한 규례(1~8절) 

민수기 35장 1~8절까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레위인들에게 성읍을 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8장 20~21절에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땅을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신 십일조를 줄 테니 농업에 종사하는 다른 백성들처럼 먹고 살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인들이 십일조만 받아서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레위인들도 자식이 있으면 집에 살아야 하고, 가축이 있는 경우 들도 있어야 합니다. 집도 있어야 하고 땅도 있어야 하고 들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땅을 주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 평의 땅도 허락지 않으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일절 아무 것도 주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레위지파에게 땅을 주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다른 지파들처럼 별도의 큰 땅을 허락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무 것도 주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대신 레위 지파 사람들은 다른 지파의 땅에 있는 성읍들에 들어가 섞여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이스라엘 땅 전역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이유는 레위 지파 사람들이 성격이 급하고 다소 난폭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장 7절에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각 지파를 향해 예언하며 레위를 향해 나누어 흩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이 살던 밧단아람에 20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을 때, 세겜이라는 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딸 디나가 그곳에서 세겜의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세겜은 야곱에게 디나와 결혼할 수 있도록 간청했지만, 어차피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야곱은 할례 받지 않은 족속에게 딸을 내어 줄 수 없다며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세겜의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3일 후,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와서 쩔쩔매고 있는 세겜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잔인한 것입니다. 
야곱이 볼 때 이들을 한 군데 붙여 놨다가는 큰 일이 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이것은 도리어 레위 지파에게 큰 복이 되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을 흩어져 살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갈등이 생겼을 때 재판도 해 주고 하나님이 백성들과 늘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물론 죄에 대한 심판 때문에 흩어져 살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은혜로 심판을 덮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총 12개 지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는 요셉에게 두 몫을 주었습니다.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에게 각각 땅을 분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13개 지파가 땅을 분배하는 꼴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분배할 때도 임의로 나누지 말고 지파 별로 대표를 선정하여 제비를 뽑는 방식으로 땅을 나누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을 차지한 12지파는 분배받은 땅 가운데 레위인들이 살 수 있도록 성읍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넓은 땅을 차지한 지파는 많은 성읍을 주고, 좁은 땅을 차지한 지파는 비교적 적은 성읍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레위인들의 성읍은 이스라엘 전역에 48개가 있었습니다. 
1개 성읍의 크기는 동서남북으로 이천 규빗이었습니다. 1규빗을 45cm로 환산하면 이천 규빗은 약 900m가 됩니다. 정사각형 모양의 성읍이었는데, 그 안에 집을 짓고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가축을 기를 공간도 필요했기에 성읍 바깥쪽으로 동서남북을 향해 이천 규빗씩 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성읍 내 집과 성읍 바깥쪽 들을 가지고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략 이 크기를 보면 우리나라 시골의 작은 동네를 연상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할 가나안 땅 전체 면적의 1%도 안 되는 작은 땅이었습니다. 약 10%정도 차지할 수 있는 것을 1%정도 주셨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레위인들은 이제 성읍에 흩어져 살면서 반차를 짜서 돌아가며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성전의 일이 끝나면 다시 성읍으로 돌아와 살고, 또 순서가 되면 성전에 올라가 일을 하다가 내려오는 방식으로 성전의 직무를 교대하며 수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주셨고, 땅도 주셨으며, 살 집도 마련해 주시고, 가축을 기를 수 있도록 들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전임 교역자들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레위인들이 받게 될 48개 성읍 중 6개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도피성’(City of Refuge)으로 지정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요단 강을 기준으로 동편에 3곳, 서편에 3곳, 도합 6개 성읍이었습니다. 

Ⅱ. 도피성에 관한 규례(9~34절) 

첫 번째 규례는 레위인들에게 48개 성읍을 주라는 것이고, 두 번째 규례는 48개 성읍 가운데 6개 성읍을 도피성으로 지정하라는 규례입니다. 
민수기 35장 9~34절까지 도피성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는데, 먼저 하나님이 도피성을 지정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5장 34절에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피성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 땅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람의 어떤 행위가 땅을 더럽히는 일이었을까요? 사람의 여러 가지 죄악 된 행위가 땅을 더럽힙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되는 일은 ‘살인’입니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땅을 더럽히는 일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35장 33절에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은 돈으로 그 죄를 속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야 죽은 사람의 피가 쏟아진 그 땅이 깨끗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피만 쏟아지고 죽인 사람의 피가 쏟아지지 아니한 그 땅은 더러운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인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그 땅이 깨끗한 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권을 보호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살인자의 인권을 보호하시는 분이 아니라, 살인자의 손에 죽은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는 분이십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인권이 중요한 것이지, 죽인 사람의 인권은 보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권을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살인자를 살려주는 것도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죽인 사람의 인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인권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타인을 살해하는 것은 인간을 향해서도 중차대한 범죄이지만,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매우 심각한 범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짐승을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소나 개, 돼지, 양과 같은 동물들을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물론 다 잡아먹는 것이 꼭 옳은 일인 것은 아닙니다. 건강에 해롭거나 먹지 않는 것이 좋을 동물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을 잡아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잡아먹을 수 없습니다. 큰 일 납니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타인을 죽여서도 안 되고 피를 흘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업신여기고 땅을 더럽히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행위입니다. 가나안 땅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명확한 규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살인을 똑같이 취급하지 않으신다는 것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의로 살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살인 사건에 동일한 형벌을 부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35장에도 고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고살자’(Murderer)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살이라고도 하고 모살이라고도 하는데, 사람을 죽인 모살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 증인 두 사람의 증언이 일치하면 고살자는 반드시 그 생명을 빼앗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판결을 내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동네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이미 증언을 한 사람과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를 재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두 세 사람의 증언을 듣고 일치하는 경우에는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손에 철 연장이나 나무 연장을 들었거나 죽은 사람에 대한 미움이나 원한 때문에 죽였거나 어떤 물건을 던져서 죽였거나 밀었거나 해서 죽으면 그 사람은 고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살인이 고살인 것은 아닙니다. 살해할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과실로 인해 사람을 죽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과실치사라고 합니다. 민수기 35장 22~23절에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다 하자 이는 원한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를 찍다가 도끼날이 빠져 옆 사람을 향해 날아가 맞아 죽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자동차 운전을 하는데 급발진이 나서 앞에 있는 사람을 치어 죽인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 과실치사입니다. 이런 경우 도피성으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전케 하신 것입니다. 과실치사의 경우 도피하여 죽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입니까? 뭔가 무서운 존재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12절에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수할 자’로 번역된 영단어 ‘Avenger’는 ‘대신 복수해 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보수할 자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도 하는데,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이 ‘고엘’이라는 사람이 하는 네 가지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사람이 상속받은 땅을 가난에 못 이겨 다른 사람에게 매매한 경우, 가까운 친척(고엘)이 땅을 사간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면 그 땅을 도로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룻기에도 보면 이것이 ‘기업 무르기’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지금은 한 번 팔은 땅을 다시 찾아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고엘이 기업을 무르는 경우 땅을 되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고엘은 ‘기업 무를 자’라고 불렀습니다. 
둘째는 어떤 사람이 노예로 팔려간 경우가 있었습니다. 먹고 살 길이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팔 것이 없어지면 자기 몸을 팔아서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 고엘이 돈을 가지고 가서 노예로 들인 사람에게 돈을 주고 친족을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고엘을 ‘구속자’라고 불렀습니다. 
셋째로 어떤 사람의 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은 경우, 동생이 홀로 남은 형수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 첫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형의 아들로 호적에 올려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비록 동생과 낳은 아들이지만, 형의 아들이 되어 형이 받을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동생을 고엘이라고 했고, ‘계대 결혼자’라고 불렀습니다. 
넷째로 가까운 친족이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한 경우 억울하게 죽은 친족의 복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 35장 19절에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척이 남의 손에 죽은 경우 가까운 친척이 살인자를 처단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형법시스템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를 보수할 자(고엘)가 공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실치사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도망간 경우 보수할 자는 과실치사자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고살자는 도피성으로 피해도 소용이 없었지만, 과실치사자는 달랐습니다. 피를 보수할 자가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재판을 정당히 받을 때까지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실치사자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첫째, 가장 가까운 도피성으로 속히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도피성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나왔다가는 보수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회장 앞에서 판결을 받고 고의가 아니었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죽임을 당한 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원한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이 입증되면 보수자는 과실치사자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도피성 안에만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도피성 안으로 들어갈 때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던 사람이 죽게 되면 도피성 안에 있던 과실치사자도 해방되어 도피성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과실치사자도 살인죄에서 해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 곳을 나올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생명으로만 갚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것이 과실치사자의 죽음으로 간주되어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살인죄에서 벗어나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Ⅲ. 도피성 규례가 갖는 현대적 의미 

그러면 이러한 도피성에 관한 규례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도피성이 갖는 현대적 의미는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도피성을 통해 어떤 사람이라도 한 생명의 가치를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의 생명을 업신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죽인 사람은 하나님도 그의 생명을 업신여기시고 죽음의 형벌을 가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진화론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 인간의 가치를 벌레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진화론은 원숭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저는 원숭이가 사람을 낳았다는 말을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진화를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은 이런 가설들을 주장하는데, 결국 이들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나 벌레 한 마리 죽이는 일이나 똑같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생명의 가치를 벌레가 갖는 가치만큼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식해 보이지만 마귀에 홀린 사람들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화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사람 죽이는 것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소위 ‘신세계 질서’라는 것을 부르짖는 집단이 있는데 이들은 앞으로 인구를 5억으로 줄이기 위해 5억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다 죽여야 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사람의 생명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생명을 벌레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장기 밀매를 위해 사람을 납치해 간다는 것도 이미 뉴스나 신문지상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람의 몸을 장기 이식하는 부속품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부속품을 빼고나면 나머지는 갖다 버리는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혀 없는 일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외국 여행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잡히면 장기 적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사회인지 모릅니다. 모두 사람의 생명을 천시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사람 보기에 무식하고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두셨습니다. 
둘째, 사회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살인한 사람에게 사형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법 250조에 보면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지키지 않습니다. 살인을 해도 판사들이 징역 2년, 3년의 판결을 내립니다. 형벌이 가볍다보니 살인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을 나누는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부부싸움, 층간 소음 문제나 주차를 하다가도 이웃사촌 간에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는 살인죄에 대해 사형제도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엄격하게 집행된다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정통치국가인 이스라엘의 법을 대한민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만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입니다. 창세기 9장 6절에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9장의 기록은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태어나기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사회적인 관점에서 살인죄에 대해 사형제도가 적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신앙적인 관점에서 도피성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부르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살인죄를 범한 죄인들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죄로부터 완전히 무죄한 존재들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죄를 진 것이고, 사람을 미워만 해도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원리입니다. 
마태복음 5장 21~2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가’는 ‘멍텅구리’라는 의미입니다. 형제를 향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형제의 인격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막말과 욕설을 하는 사람은 살인죄의 형벌과 다름없는 지옥불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 이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문자적으로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이 죄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도피성으로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피성 안에 늘 거해야 할 존재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으로 간주되어 지옥불의 형벌에서 해방되었음에 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간주되어 우리는 모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이 되고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엘이십니다. 우리의 죗값을 심판하시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피의 보수자이십니다. 피의 보수자가 되시는 예수님이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죗값을 대신 다 갚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죽음으로 간주되어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민수기 35장은 언뜻 읽으면 얼른 와 닿지 않는 이상한 규례들 같아 보여도 명백한 복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내가 살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내가 복을 누리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리심으로 나는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은 피의 보수자이시면서 아울러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다는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도피성이시고 대제사장이십니다. 오늘 예배를 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겠다고 작정하시고 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예배를 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시겠지요. 그러나 결국 자기 손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속자요, 도피성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저주에서 해방되고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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