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신 5:11)

날짜 : 2017-12-31
본문 : 신명기 5:11

 오늘은 제3계명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십계명 가운데 제1계명은 예배의 대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로힘이신 여호와만이 우리가 믿을 대상이시며 다른 신들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제2계명은 예배의 바른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바른 방법은 새긴 우상을 세워놓고 그것에 절하거나 경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3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배의 바른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태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얼굴의 태도도 중요하고 앉아있는 자세도 중요합니다. 삐딱하게 앉아 있거나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태도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태도로 드려야지 시비를 거는 태도로 예배를 드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바른 태도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1계명은 예배의 대상 제2계명은 예배의 방법 제3계명은 예배의 바른 태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3계명은 “Thou shall not..”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강력한 어법입니다. “내가 너희로 하여금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게 하겠다 만약 너희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면 내가 너희를 고쳐주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말하는 사람의 매우 강력한 의지가 들어있는 것이고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명령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발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히브리어 자음 네 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발음이 “여호와”인지 “야웨”인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발음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본래 의미는 ‘사용하지 말라’가 아니라 ‘잘못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3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오용이나 남용하지 말고 바르게 사용하라는 말씀이지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I. 하나님의 이름의 중요성 

  첫째 이름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그 사람의 주체성(identity)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의 주체성이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이름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민등록증을 Identity Card라고 합니다. 이처럼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 이름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두 사람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이름입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엉뚱한 사람이다’ 이렇게 그 사람의 이름과 성품이 연상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성품을 바꾸어 주실 때에도 이름을 바꾸어 주시는 경우가 성경에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야곱입니다. 야곱은 사기꾼, 찬탈자, 남의 것을 빼앗는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곱을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이 그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황태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것을 뺏는 찬탈자가 황태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름이 바뀌면 그 사람의 성품도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정체성의 기능이 있고 하나님이 어떤 속성을 가지신 분이신가를 알려 주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다른 여러가지 이름들을 가지고 계시지만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다른 어떤 존재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너는 어떤 하나님을 섬기냐고 물어보면 우리 성도들은 “여호와”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신명기 5장 6절에 십계명의 서문에서도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 신명기 5장 9절에도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도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에게 하나님은 누구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줘야 합니까”라고 하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이시라고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I AM”이 히브리어로 “여호와”입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존재인데 이 이름을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세 가지로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시작이 없으시고(No beginning), 또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에 끝이 없으시고(No end), 그리고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충족하시기 때문에 아무 부족이 없으십니다(No Need). 
  셋째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는데 망령되게 일컫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악한데(evil) 사용한다든지 혹은 거짓에(false) 사용한다든지 헛된 것에(empty) 사용되는 경우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악한 것이 아닌 선한 것으로 사용해야 하고 거짓된 것이 아닌 참된 것에 사용해야 하고 공허한 것이 아닌 실체가 있는 것으로 사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실제적인 경우는 어떤 경우들이 있는가? 

  첫째 신성모독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profanity).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어떤 경우에는 신성모독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이름에 “개”자를 갖다 붙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공격하려고 하는 악한 자들의 소행인 것입니다. 교회를 근본적으로 공격하는 가장 악한 자들은 북한입니다. 북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사람들이 좀비처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개”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 성도들은 속에서 열불을 느껴야 하고 영혼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열불이 안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또 “임마누엘”이란 이름은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인데 주님의 주자(主)를 가지고 술주자(酒)를 사용하여서 술집 이름으로 쓰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신성 모독을 장난으로 생각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 영화에서도 교회를 조롱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엉터리 목사가 나와서 교회를 조롱하고 놀리는 의미로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국의 경우에 코미디언들이 주제로 삼는 것이 첫 번째가 성적인 것이고 두 번째가 기독교를 조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정치가를 모독하거나 조롱하면 감옥에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독하면 사람들은 깔깔거리고 웃음의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가 병들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신성모독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습관적으로 무의미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Oxford living dictionary에 보면 ‘Jesus’라는 단어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 종교의 중심인물이다는 것과 또 하나는 분노, 실망, 놀람을 나타내는 감탄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분노하거나 실망하거나 좌절하게 되면 “Jesus” 혹은 “Jesus Christ”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말로 번역하면 “이런 제기랄”과 같은 아주 못된 욕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사람들 중에 “Jesus Christ”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소득이 낮거나 가난한 사람들이고 조금 소득이 있는 중산층들은 “Lord”나 아니면 “oh my Lord”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도 그 사람의 소득 수준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oh my God”이나 “oh my Gosh”라고 바꿔서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실망 분노 좌절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제3계명에 위배되는 망령된 행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습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쁜 습관은 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습관으로 사람을 죽여 놓고 습관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제3계명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지 않는 영혼의 경박성이 있는 습관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목사들도 사람들만 만나면 “할렐루야”나 또 “praise the Lord”를 아주 습관적으로 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영권이나 위상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면 안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좋은 의미이지만 그렇게 쓰는 것은 영혼의 경박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악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거짓 선서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 12절에 보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했습니다. 또 열왕기상 21장을 보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제일 악한 왕이었던 아합과 그의 왕비 이세벨이 나옵니다. 아합왕은 자기 백성이 가지고 있는 포도원을 뺏고 싶어했습니다. 그 포도원의 주인은 나봇이었습니다. 나봇이 이 포도원은 우리 조상 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하며 드릴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자 아합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버렸습니다. 그러자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 얘기를 듣고 아합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밖에 나가서 동네 양아치 둘을 돈을 주고 샀습니다. 성경에는 ‘비류’라고 되어있지만 우리말로 하면 양아치입니다. 그들은 열왕기상 21장 10절에 “비류 두 사람을 그 앞에 마주 앉히고 저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저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라 하였더라”라고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증인 둘이서 증거를 되면 그 증거를 인정하게끔 되어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나봇을 데려다가 돌로 쳐서 죽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세벨이 그 포도원을 빼앗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아합왕에게 주자 벌떡 일어나서 싱글벙글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악한 짓을 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까지 하도록 하게 한 이세벨의 피를 개가 핥아 먹고 성 밖에 던져져서 그 시체를 개가 먹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개를 먹는 경우는 있어도 개가 사람을 먹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아합과 이세벨의 신세는 개가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악하게 맹세하고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악하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2) 또 마음과 입이 일치되지 않게 “주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이사야 29장 13절 후반에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감정의 종교가 아닙니다. 또한 기독교는 지성적인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반지성주의로 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수십 년 믿어도 뭘 믿는지 모른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가 반지성주의로 갔기 때문입니다. 교리공부도 안하고 성경공부도 않고 감정적인 것이나 반지성주의로 나가니까 입과 마음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귀신도 쫓아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권능도 많이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에 예수님이 “나는 너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소위 신사도운동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도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사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인 신약성경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사도는 필요하지 않고 하나님이 임명도 안하시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말로 하나님이 안수해주셨다고 말하면서 이상한 예언과 이상한 은사로 인해 오늘날 교회가 병들게 된 것입니다. 신사도운동은 한마디로 말해서 ‘악령운동’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것에 너무 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 이끌려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지성적인 종교입니다. 반지성주의나 지나친 감성주의나 은사주의는 아주 불건전한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이런 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3계명을 위반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과 입이 일치되질 않습니다. “주여 주여”하는데 마음으로는 다른 것들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사람들과 상담을 할 때 “목사님 저는 불광동으로 이사 가려고 합니다.”라고 하면 가만히 있다가 “하나님이 거기는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불광동은 앞 자에 ‘불’자가 들어 있으니까 은혜동이나 ‘은’자가 들어가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박수무당이지 신령한 목사가 아닌 것입니다. 저는 여태까지 목회를 했어도 성령이 그런 방식으로 하시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바른 말씀과 우리 영혼 안에 진리를 따르는 순종으로 하시지 이러한 박수무당이나 뱀 같은 방법으로는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주의 이름을 거짓되고 망령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이름을 마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3-15절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마술의 도구로 망령되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성모독적인 경우도 많이 있고 공허하게 습관적으로 헛되게 쓰기도 하고 또 이렇게 악하게 쓰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이름을 “이단사설”을 옹호하는데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이단자가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합니다”라고 하는데 정작 들여다 보면 성경과 맞지 않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이단 사설을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교주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부인이 이제는 자기가 하나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정신이면 어떻게 그것을 믿고 따라다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악령의 역사입니다. 그 악령이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고 진실 되게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III.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Oath)를 할 수 있는가? 

  첫째 이 문제가 제3계명과 관련하여 중요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신약성서에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이 두 군데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3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라고 했고 또 야고보서 5장 12절에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이 신약에 두 군데가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2) 또 다른 이유는 교회 역사상 맹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어떤 맹세도 거부한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아나뱁티스트들과 퀘이커 교도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어떤 맹세도 거부를 했습니다. ‘퀘이커’라는 집단은 17세기에 ‘조지 폭스’(George Fox)라는 사람이 세웠습니다. 폭스라는 이름은 ‘여우’라는 뜻입니다. 우리 침례교의 조상인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는 ‘이 여우를 구덩이에서 파내자’라는 책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은 침례교가 퀘이커 교도들과는 전혀 다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퀘이커 교도들은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모이면 한 사람이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나한테는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라고 하면서 자기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해버립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사도 운동주의자들이 하는 예언과 비슷합니다. 퀘이커가 그들의 조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퀘이커의 조상들은 아나뱁티스트 중에서도 신령주의자들의 후손들입니다. 무언가 자꾸 음성을 듣겠다고 하는 자들의 후손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맹세를 절대로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올바른 맹세는 죄악 된 것이 아니며 제3계명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올바른 맹세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도 언약을 맺으시고 다윗에게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깰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63절에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라고 하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Yes, it is as you say).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게 하노니...”라고 했고, 로마서 1장 9절에도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증인으로 삼아서 맹세를 했습니다. 
  셋째 올바른 맹세는 필요하기도 하고 유익하기도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 속에서 올바른 맹세가 필요한 경우가 ‘결혼 서약’이 있습니다. 결혼 서약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영원히 바람을 피우지 않고 같이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맹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자기가 바람을 피더라도 이 맹세를 기억하고 돌아오는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정절을 지키는데 혼인맹세는 절대적인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 하겠다는 사람은 언제든지 ‘나는 바람을 피우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맹세를 어기는 못된 사람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법원에서 ‘위증’하지 않겠다는 맹세입니다. 예를 들어 성추행 같은 죄는 90% 이상이 무고죄(誣告罪)라고 합니다. 자기가 좋아서 실컷 즐기다가 나중에 성추행했다고 고소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위증에 대한 맹세마저도 없으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법정에서 위증에 대해 맹세를 하게 함으로써 거짓을 몰아내는 유익한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또 ‘국기에 대한 맹세’가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 하겠습니다”라고 안 하는 사람은 빨갱이나 간첩과 같이 대한민국을 해치는 자들입니다. 민족주의라고 외치는데 목소리만 높이면 민족주의입니까? 사상이 같고 목표와 지향하는 게 같아야 민족이지 말도 안 되는 공산주의를 하는 게 어떻게 민족주의라고 합니까 또 휴머니즘 인간중심주의가 있습니다. 이것도 같은 생각 같은 목표를 가져야 존중하는 것이지 이상한 이념을 가진 사람을 무슨 존중을 해줍니까. 이런 사상들은 다 국기 앞에 맹세를 안 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우리는 국기 앞에 맹세를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라고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헛된 맹세, 거짓된 맹세, 악한 맹세와 같은 것들을 말라는 것이지 맹세를 무조건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악한 맹세를 했다가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헤롯대왕의 아들 안티파스라는 자가 그의 동생 분봉 왕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침례요한이 이런 헤롯 안티파스를 나쁜 놈이라고 하니까 그를 아주 미워하였고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도 침례 요한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이 헤로디아에게는 춤을 잘 추는 살로메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이 살로메가 잔치에서 춤을 매우 잘 추었는데 헤롯 안티파스가 술김에 살로메의 춤을 보더니 정신을 못 차리고 6장 23절에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살로메가 자기 어머니에게 가서 묻자 그 틈을 타서 헤로디아는 “침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해라”라고 하자 헤롯 안티파스는 할 수 없이 헛된 맹세 때문에 의인 침례 요한의 목을 쳐서 그 머리를 쟁반에 담기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헛된 맹세의 악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 가서 절대 볼 수 없는 사람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또 사도행전 23장 12절에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렇게 악한 맹세를 한 자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뒤로 오래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때까지 먹지도 않고 마시지지도 않았는지 한번 천국 가면 하나님께 물어보려고 합니다. 앞에서는 맹세하고 뒤에서는 실컷 먹고 그래서 40일 금식한다는 사람의 얼굴이 피둥피둥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요 사기인 것입니다. 카톨릭 사제들을 보면 독신 서원을 하는데 그런 서원은 성경에 없는 아주 쓸데없는 서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은 헛되거나 악하거나 거짓된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나 합법적이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맹세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필요한 경우나 다른 해결책이 없는 경우에는 맹세밖에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부부 사이에 남편이 의처증이 있습니다. 이것은 약으로도 고쳐지지가 않고 약도 오래 먹어야 하는 병이라고 합니다. 부인이 아무리 바람 안 폈다고 얘기해도 믿어주질 않습니다. 바람을 피웠으면 증거가 있어도 안 피웠으면 무슨 증거가 있겠습니까. 그런 경우에는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바람을 안 피웠다”라고 맹세하면 믿어줘야 합니다. 그런데도 “난 안 믿는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즉각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게 좋습니다. 

결론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명령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라는 것이 첫째 기도입니다. 디모데전서 6:1절에도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는 말씀은 많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은 하나님이 죄 없다고 인정하지 아니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죄인 중에 큰 죄인으로 여기시겠다는 강조법이라고 보면 됩니다. 열왕기상 2장에 보면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갈 때에 사울 집안에 시므이라는 자가 다윗에게 와서 저주하고 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나중에 압살롬을 물리치고 왕으로 복귀하니까 제일 처음으로 달려와서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왕위를 회복한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노년에 시므이가 자기를 욕되게 한 것을 마음에 두고 죽을 때 솔로몬을 불러서 유언을 남깁니다. 열왕기상 2장 9절에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죽이지 않겠다고 했기에 죽이지는 못해도 아들한테는 죽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시므이를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경계제한을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시므이는 이것을 무시하고 왔다 갔다 하다가 걸려서 솔로몬에게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 이름을 모욕해도 징계를 받고 죽게 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레위기 24장 16절에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레위기의 말씀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신정 통치 국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농담으로라도 예수 이름 앞에 ‘개’라는 말을 붙이지 말길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헛된 맹세를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고 진실 되고 참되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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