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하지 말찌니라 (신 5:17)

날짜 : 2018-01-28
본문 : 신명기 5:17

21세기는 이전 세대 보다도 훨씬 문명화 된 시대 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명은 그렇게 귀중히 여김을 받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소홀하게 취급당하고 있는 가운데 특별히 대한민국은 더 심한 상황가운데 있습니다. 2015년도 통계에 의하면 OECD 국가 34개국 가운데 한국이 살인율 6위, 강간 범죄율 13위에 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살인율도 계속 증가추세에 있고 살인의 방법 또한 더 다양해지고 대범해 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연쇄살인(serial killing)은 한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죽이는 것인데 이런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고 또 자기가 애를 낳아서 죽이는 유아살해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습니다. 또한 납치살해나 장기 적출과 같은 극도로 무자비한 살인사건도 개명 천지에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제6계명 살인하지 말찌니라를 더 중요한 계명으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더군다나 국가 간의 갈등이 테러형태로 발전하게 되면서 다수의 생명을 죽이려고 공공장소에서 테러를 하거나 자살폭탄이 자행되어지고 또 비행기를 납치해서 건물에 충돌해 버리는 흉흉한 소식들을 자주 듣게 됩니다. 또한 생화학 무기를 사용해서 일시에 수십만 수백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핵무기를 사용하면 결국 한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받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은 남의 동네 얘기나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제6계명 살인하지 말찌니라를 생각하고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이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데 첫째로 제6계명 살인하지 말찌니라는 도데체 무슨 내용인가? 둘째로 살인을 금지하는 신학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셋째로 제6계명에 내포되어서 금지하고 있는 다른 죄들은 무엇인가를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I. 제6계명은 무슨 내용인가? 

  제6계명 살인하지 말찌니라는 대단히 간단하고 직설적인 명령이고 영원히 타당한 규범이고 강력한 명령입니다. 첫째, 제6계명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면 ‘살인’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NIV성경에는 본문을 “You shall not murder”라고 했습니다. 번역하면 “너는 사람을 고의적으로 죽이지 말찌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KJV성경에서는 “Thou shalt not kill”라고 했습니다. 번역하면 “너는 사람을 죽이지 말찌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느 번역이 더 훌륭한 것인가를 고른다면 그것은 KJV성경의 번역이 더 훌륭하고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NIV성경에서 번역한 murder라는 단어는 고의적으로 살인하는 것만 포함하는 것이지만 KJV성경에서 번역한 Kill라는 단어는 고의적이든 아니든 과실치사든 사고사든 죽음에 관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이 훨씬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히브리어 성경에서 Kill을 의미하는 세 가지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말에 죽인다는 말의 의미가 많듯이 히브리어에도 죽인다라는 동사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맛 죽인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죽인다라는 의미가 꼭 사람의 생명을 살해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도 Kill란 뜻에 관하여 제일 많이 쓰인 단어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샤하트(שָׁחַט)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70~80번이나 사용되었고 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짐승을 죽일 때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2) 하라그(חָרַג)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158번이나 사용되었고 짐승이나 사람을 죽일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3) 라자흐(רָצַח)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바로 사람을 죽일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에 47번이나 나왔고 그중에 46번이 사람을 죽일 때에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쓰인 살인이라는 단어가 바로 라자흐입니다. 
  셋째, 제6계명은 네 가지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1) 식용으로 삼기 위해서 짐승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먹으려고 짐승을 잡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9장 3절에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했습니다. 살아있는 동물은 다 채소처럼 먹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소를 잡아서 먹을 수도 있고 돼지나 닭을 잡아서 먹을 수도 있고 살아있는 동물을 잡아서 먹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환경론자나 동물애호가들이 동물을 죽이는 것도 살인하지 말라에 해당되는 위반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가당치 않은 얘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일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라자흐이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은 우리가 잡아서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6계명은 짐승을 죽이지 말라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2) 정당한 전쟁이나 방어적인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전쟁이 나서 적군이 쳐들어 왔다면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두 나가서 전쟁을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먼저 공격 전쟁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당한 전쟁에서는 적군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6계명은 이것까지 금한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7장 2절에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물론 적군이 포로가 되었거나 항복을 했다면 살려줘야 하지만 그러나 적군이 총 들고 올 때는 우리도 다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적군에게까지 자비심을 베풀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3) 사형수를 죽이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사형 선고를 내려서 사형수를 죽이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장 12절에 보면 “사람을 쳐 죽인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라고 했습니다. 살인을 한 자를 인권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면 다른 사람의 인권이나 생명이 더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면 사형선고를 내리도록 국가가 공의를 집행하는 것은 제6계명 살인하지 말찌니라가 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 자기방어를 위해서 정당방어 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절에 보면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라고 했습니다. 해가 지고 밤이 되었을 때 도적이 들어와서 죽이는 것은 정당방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낮에는 훤히 다 보이기 때문에 사람을 무작정 쳐 죽인다면 그것은 정당방위가 아닌 과잉방위나 오상방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가 진 후에 들어오면 그것은 정당방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6계명은 식용으로 짐승을 죽이는 것이나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이나 또 사형수를 죽이는 것이나 정당방위를 위해서 강도범을 죽이는 것을 금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넷째, 제6계명이 금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고의적으로나 부주의하게나 아니면 사고로써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Thou shall not kill이라고 할 때 Kill은 세 가지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Murder). 이것은 미리 죽이려고 하는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고살(의도적 살인) 혹은 모살(계획적 살인) 이것을 분명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2) 고의가 없는 살인입니다(Manslaughter). 우리 말로는 과실치사로 번역이 됩니다. 고의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죽게 됐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냥을 하다가 짐승인 줄 알고 사람을 죽였다면 이것은 과실치사입니다. 또 운전을 하다가 과속을 해서 사람을 치어 죽게 했다면 이것도 과실치사입니다. 주의를 기울이거나 과속을 하지 않으면 사고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경우인 것입니다. 이것도 무죄는 아니고 다 벌을 받게 됩니다. 
  3) 사고사인 경우입니다(Accidental Killing). 전혀 살인의 의도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단순한 사고사인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산에서 나무를 베다가 도끼날이 빠져서 사람이 맞아 죽게 되었을 경우 이것이 고의적이지 않고 예측을 할 수 없는 불행한 사건인 경우에 어떻게 하는지 구약의 법에 나와 있습니다. 고의적이지 않거나 사고사인 경우 일단 6개의 도피성으로 도망을 가야 합니다. 이것도 생명을 해쳤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6개의 도피성은 요단강 동편에 세 개, 서편에 세 개가 있었습니다. 이 성으로 과실치사나 사고사를 한 사람이 도망을 가게 되면 도망가있는 동안 자신이 죄가 없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만약 무죄가 증명되면 그 사람은 도피성에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복수하는 자가 찾아와서 그 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도피성은 이렇게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성입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도피성에서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자기가 사고를 일으켰을 때에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고 피해를 입은 사람도 그를 죽일 수가 없거나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살인한 사람은 도피성이 아니라 제단의 뿔을 잡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은 끌어내서 그런 사람은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6계명은 고의적인 살인도 금하고 과실치사도 금하고 과실치사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또 사고사가 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다하라고 하는 계명인 것입니다. 

 II.  제6계명의 신학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 살인은 최종적이고 파괴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계명들은 최종적인 계명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도적질한 경우 다시 돌려주거나 물어주고 벌도 받으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또 남의 물건에 탐심을 가졌다면 탐심을 안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은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인 죄인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죽은 사람을 회복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살인은 최종적인 죄이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살인은 파괴적입니다. 죽은 사람도 생명이 파괴되었고 죽은 사람의 가족도 깊은 슬픔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또한 살인자 자신도 삶이 파괴되고 인격이 파괴되고 그의 가정도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미운 사람이 있다 할찌라도 살인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한 살인죄가 증가하게 되면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살인율이 올라갈수록 사회는 불안한 사회가 되고 사람이 살기에 좋지 않은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저녁에 여자와 아이들이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고 문을 열어놓고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불안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지금 살인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6계명의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살인은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짐승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타락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는 존재이고 짐승과는 다른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은 잡아먹어도 되지만 사람은 잡아먹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이고 또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속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성적인 분이시고 감정이 있으신 분이시고 하나님도 의지가 있으신 분이시고 악은 없으시고 선하신 분이시고 이러한 것들이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지식이 많거나 적거나 가방끈이 길거나 짧거나 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돈이 많거나 적거나 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피부색이나 인종과 관계없이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고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착하거나 착하지 않거나 다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어떤 종교는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나거나 짐승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윤회설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윤회가 아닙니다. 부활을 믿습니다.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영원히 부활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짓된 종교의 특징은 윤회이고 참된 종교의 특징은 부활인 것입니다. 윤회를 믿는 사람은 거짓된 종교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윤회를 믿는 사람은 내가 이 사람을 죽여도 사자도 될 수 있고 호랑이도 될 수 있고 소도 될 수 있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업수이 여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장애가 있는 어린아이들을 제거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제6계명을 위반하는 극도로 사악한 사상인 것입니다. 아무리 장애가 있어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고 아무리 공부를 안 하고 낫 놓고 ㄱ자를 모르거나 지게 놓고 A자를 모른다 할지라도 다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짓이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살인은 둘째 돌비를 위반하는 죄일 뿐 아니라 첫째 돌비도 위반하는 죄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형제나 사람을 죽이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인하는 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이고 결국 살인죄는 첫째 돌비도 위반하는 것이고 둘째 돌비도 위반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살인은 하나님의 목적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살인은 마귀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에게 육체의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영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영적인 존재는 하나님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있고 그 밑에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있습니다. 귀신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무당 굿하는 데 가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귀와 귀신들의 목적은 멸망시키고 죽이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들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마귀의 자식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생명을 주셔도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반면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성도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이 마귀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생명의 영이시고 마귀는 사망의 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을 대적하고 마귀의 편에 서서 살다가 마귀가 가는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옥은 영영한 불이 있고 구더기가 달라붙어서 영영히 떨어지지 아니하고 물이 한 방울도 없는 곳이고 그곳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써 빛도 없고 영원히 이를 가는 곳입니다. 사람을 살인하고 마귀의 편에 서고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결국 지옥에 떨어지게 되고 마귀의 졸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 생명을 존중하고 육성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6계명의 의미인 것입니다. 

 III. 제6계명에 내포되어 부수적으로 금지된 죄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째, 부주의의 죄입니다(Carelessness). 이것은 부주의해서 사람을 죽이는 죄입니다. 신명기 22장 8절에 보면 ‘난간 규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네가 새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집을 지을 때 옥상같이 높은 곳에 난간을 안 만들어서 이웃집 사람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으면 그것은 주인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 집주인이 살인죄를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간을 만들라는 규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을 볼 때 일본 사람이 지은 호텔이나 숙소에 가보면 뾰족뾰족한 것들이나 사람이 걸려 넘어질 만한 게 없고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다 부드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건물이나 가구들을 보면 뾰족하고 날카로워서 잘 다치기가 쉽습니다. 이런 것에 대한 주의가 없습니다. 목욕탕도 보면 아주 미끌미끌해서 어른들이 넘어지기 좋게 만들어 놓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은 이런 것들에 다 주의를 기울여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 사람들보다 이런것들이 압도적으로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대단히 세심하게 주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을 굉장히 보호해 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우리가 자동차 운전을 할 때도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서 남의 생명을 해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핸드폰 받거나 주의를 산만하게 해서 사고로 남을 죽이는 것도 부주의한 죄인 것입니다. 
  둘째, 탐심의 죄입니다(Greed). 출애굽기 21장 29절에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인하여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므로 남녀 간에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소가 평소에는 잘 들이받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소 주인에게 안전장치를 해서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해달라고 했는데 주인이 돈 들어간다고 안 해서 결국 그 소가 옆집 아이를 받아서 죽었다면 그 소 주인을 죽일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도 죽이고 그 임자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상시 소가 잘 들이받는 것 같으면 그 뿔에 안전망을 씌워서 다치지 않도록 만들어 놓든지 아니면 소를 훈련하는 학교에 보내서 교육을 하든지 해야지 그런 돈을 안 쓰고 아끼다가 남의 생명을 죽인 경우라면 그 주인도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실치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고의적인 살인인 것입니다. 이 소가 남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대로 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를 미필적 고의라고 합니다. 미필적 고의란 죽일 수도 있는데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개가 무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런데 입에 망을 씌우지 않아서 사람을 물어 죽였다면 결국 그 주인도 같이 죽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 법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일관 주인아주머니가 동네 개에게 물려 죽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주인은 죄가 없을까요 구약 이스라엘 같으면 그 주인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 무는 버릇이 있는 개인데 그냥 놔두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의 생명을 빼앗는 제6계명을 위반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학교에 다니는데 개떼들이 따라다녀서 어느 날에 아주 결심하고 몽둥이를 가지고 개 한 마리를 붙잡아다가 골목길로 몰아가지고 실컷 두들겨 팼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개가 실컷 맞고 돌아간 후부터 학교에 갈 때 개들이 자기를 다 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라고 글을 썼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 개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 일 년에만 수 십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고의적인 살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남의 생명을 해치는 악한 음식을 파는 악덕 업자들도 있습니다. 돈을 벌려고 남을 죽이는 음식을 파는 것입니다. 신학교 교수 시절 어떤 교수 한 분이 테니스를 한 게임 치면 항상 배가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공부만 해서 그런줄 알고 보신탕을 사주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장암이었습니다. 그래서 테니스를 한 게임만 하면 늘 허리를 굽히고 눕는 것입니다. 결국 수술을 잘 해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장암에 걸렸나 하니까 자기가 밤에 공부할 때 컵라면을 너무 많이 먹어서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원인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전매청에서 담배가 해로움에도 불구하고 간암이나 폐암 사진 등 경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사람의 생명을 보존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요즘 문제가 되는 훈증기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습도를 조절하는 훈증기에다가 화공 약품을 넣어서 수십 명을 죽게 했다면 이런 것도 다 탐심의 죄인 것입니다. 또 건물을 지을 때 돈이 든다고 스프링 쿨러를 하나도 안 되도록 한 것도 탐심의 죄인 것입니다. 결국 불이 나면 남의 생명을 해치게 되는 살인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직접 살인은 아니더라도 살인에 이르는 간접적인 죄인 것입니다. 
  셋째, 이기심입니다(Selfishness). 운전할 때 나 먼저 빨리 가겠다고 과속하다가 사고가 나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의 차 뒤에 바짝 쫓아가다가 충돌사고가 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심입니다. 새치기하다가 남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기심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운전습관도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과속해서 150킬로로 달리면 찬송가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부르게 되고 200킬로로 달리게 되면 천국에서 만나보자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남도 죽이고 자기도 죽이는 짓입니다. 저는 고속도로에서 트럭 뒤에 따라가는 게 제일 싫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트럭에서 떨어져 나온 부품 하나가 날아와서 유리창을 깨고 그 사람의 목에 박혀서 죽었습니다. 차를 운전해도 짐을 잘 실어야지 엉터리로 실으면 줄이 끊어져서 소중한 생명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형까지는 아니더라도 징역 20년형 정도는 내려져야 합니다. 
  넷째, 자기절제가 없는 죄입니다(lack of self Discipline). 남의 생명도 보호해야 하지만 자기 생명도 보호를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정 19절에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우리 몸 안에 거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이 거하는 궁전에다가 술을 집어 넣고 마약을 집어넣고 온갖 더러운 것들을 집어넣어서 썩게 한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남의 생명도 보호하고 자기 생명도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동도 적당히 해서 자기 생명을 잘 육성해야 합니다. 이처럼 제6계명은 자기절제가 없는 죄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교만의 죄입니다(Pride). 교만해서 남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죄입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남보다 공부를 더 했다고 덜 한 사람보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감정 살인하는 것입니다. 돈 좀 있다고 돈 없는 사람을 멸시하거나 능력이나 권세 좀 있다고 남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고 남을 감정적으로 살인한 사람입니다. 
  요새 학교 선생님들이나 은행원들과 같은 직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을 보면 감정노동자 같습니다. 어떤 초등학교에서는 한 학생이 교장실에 찾아와서는 담임 선생님을 바꿔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목회도 보면 일종의 감정 노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회자는 혼자이고 성도는 많은데 성도들이 목회자를 향해 감정적인 테러를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감정의 폭이 넓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감정적인 반응들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이고 잘 내보내지 않으면 목회를 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일종의 감정적인 살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하거나 조금 있다고 해서 남을 업신여기거나 학대하거나 경멸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섯째, 분노의 죄입니다(Anger). 요한일서 3장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인할 때에 처음부터 살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고 자기 제사는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심으로 아벨을 미워했던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그 시기심으로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화가 나더라도 해가 지면 풀라고 말씀합니다. 부부싸움을 안 하면 좋지만 하더라도 낮에만 하다가 저녁에 해가 지면 휴전을 해야 합니다. 해질 때까지 분을 품지 말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여러분 제6계명은 짧고 단순한 계명이지만 살인을 금하고 생명을 촉진하는 대단히 중요한 계명입니다. 우리는 모두 살인을 안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면에서 모두 다 살인죄를 저지르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살인에 이르는 부수적인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다 살인죄에 해당하는 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내 생명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따라 생명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남의 생명을 육성하고 내 생명도 육성해서 생명을 귀한 것으로 알고 그래서 하나님 편에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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