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드디어 십계명 가운데에 마지막 계명인 제10계명에 도달을 했습니다. 이 열 가지 계명들은 모두다 인간의 피상적이고 외형적인 행동의 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넘어서서 인간의 내적인 동기와 마음의 문제까지 포함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10계명이 다른 계명과 비교해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다른 계명들은 먼저 행동을 규제하고 나아가서 마음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는 반면에 제10계명은 먼저 마음의 문제를 규제하고 나아가서 행동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에서 마음으로 가는 문제가 제10계명에서는 순서가 바뀌게 되었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회심하기 전 다소의 사울일 때 그는 자신이 깨끗한 줄 알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열 번째 계명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7장 7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다소의 사울은 부모 공경도 잘했고, 살인도 안 했고, 간음도 안 했고, 도적질도 안 했고, 거짓 증거도 안 했지만 제10계명 탐심을 하지 말라는 계명 앞에서는 ‘나는 아무 탐심도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도바울도 자기 마음 속에 탐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죄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면서 제10계명에 걸리게 되었다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제10계명을 가리켜서 나머지 계명들을 가장 깊은 주제로 이끌어 오는 계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제1계명과 제10계명을 가리켜서 영어로 bookend라고 했습니다. 이 단어는 책을 세울 때 넘어지지 않도록 세워주는 의미로서 우리 말로는 ‘책받침대’로 쓰입니다. 그래서 제1계명과 제10계명이 양쪽에 책받침대가 되어서 이것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5장 21절과 출애굽기 20장 17절은 동일한 계명이지만 세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순서의 차이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에서는 탐내지 말아야 할 순서가 집이 먼저 나오고 아내가 뒤에 나오지만 신명기 5장 21절에는 이웃의 아내가 먼저 나오고 이웃의 집이나 재물이 나중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냐면 각각 강조점이 다른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광야 40년 동안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웃의 집을 탐내는 것보다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40년 뒤에 모세는 이웃의 아내를 더 강조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탐내는 것이 수시로 바뀐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추가된 내용의 차이입니다. 신명기 5장 21절에는 ‘이웃의 밭’을 탐하지 말라는 내용이 추가가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20절에는 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탐내는 대상도 상황에 따라서 늘었다 줄었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압평야에서 모세의 신명기 강론이 끝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밭’을 분배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배받을 때에 남의 것을 탐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신명기 5장 21절에는 이웃의 밭을 탐하지 말라는 내용이 추가가 된 것입니다.
셋째, 어감의 차이입니다. 출애굽기 17장 20절에서 이웃의 집이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할 때에 두 경우 모두 동일한 동사 히브리어 חָמַד(하마드)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5장 21절에서는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할 때는 חָמַד(하마드)가 사용되었고 이웃의 집이나 밭이나 재물을 탐하지 말라 할 때는 אָרַה(아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마드로 쓰일 때는 영어로 covet로 강하게 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아라로 쓰일 때는 영어로 desire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비슷한 단어이지만 어감의 강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제10계명을 네 가지 주제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I. 제10계명의 내용
첫째,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탐낸다 또는 탐심을 가진다는 것은 영어로 covet 혹은 desire로서 부정적인 의미로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하마드나 아라와 같은 동사들은 부정적인 의미가 먼저가 아닙니다. 좋은 의미가 먼저 나오고 훨씬 더 많이 쓰였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19편 10절에서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다’라고 할 때에 히브리어 동사 하마드(covet)가 사용되었습니다. 또 아가서 5장 16절에서는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라고 했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고 사모할 때에도 하마드라는 동사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좋은 의미로 사용 되었습니다. 또 히브리어 동사 아라도 좋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신명기 12장 20절에 “네가 무릇 마음에 좋아하는 대로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니”라고 했고 신명기 14장 26절에도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네 마음에 좋아하는 대로,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할 때에 히브리어 동사 아라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아내를 탐한다든가 사람이 먹을 것을 탐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나쁜 것이 아니고 다 정상적인 것입니다.
둘째, 제10계명은 사람이 아내나 집이나 재산이나 재물을 갖고자 열망하는 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단순히 열망하고 갈망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때가 되면 장가를 가야 하는 것이고 또 열심히 일해서 재물이나 집을 사는 것은 나쁜 탐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고 죄가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처럼 무소유를 주장하며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도 예전에 이와 비슷한 수도원 제도가 있었는데 나중에 보면 제일 재물이 많고 부유했던 곳이 수도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생각은 이방 종교의 사상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수도승을 만드는 종교가 아니고 무조건 배굶는 종교가 아니고 무조건 가난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갖고자 하는 열망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셋째, 탐심이 나쁜 의미로 사용된 경우입니다. 동일한 히브리어 동사인 하마드나 아라가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인가 하면 네 이웃의 아내나 네 이웃의 집이나 네 이웃의 소유와 같이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속한 것을 탐하는 탐심을 나쁘게 보시고 금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가진 것에 초점을 맞추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가진 것에 초점을 맞추고 탐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일해서 받는 것은 탐심이 아닙니다. 그런데 노력하지도 않고 일하지도 않았는데 남이 가진 것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 탐심이고 그런 탐심을 제10계명은 금지하고 정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이웃의 것에 대해서 탐심을 갖지 말라고 한 일곱 가지 대상이 있습니다. ‘아내, 집, 밭, 남종, 여종, 소, 나귀’입니다. 그러나 이 일곱 가지는 당시 농경사회라는 맥락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현대사회에서는 그 대상이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고 확대될 수가 있습니다.
다섯째, 제10계명은 하나님이 섭리가운데서 다른 사람에게 할당해 주신 것을 탐심을 갖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주신 것을 만족할 줄 알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이 탐심을 가질 수 있는 세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절대로 나에게 주시지 않는 것을 열망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여배우나 대통령의 딸을 부인으로 달라고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아마 살아도 며칠은 살겠지만 그 이상은 감당할 수 없어서 헤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허황된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결코 주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나중에 주실 것을 지금 열망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을 지금 당장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주셨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의 분량을 주시지 않은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30만원 밖에 주시지 않았는데 나는 300조원을 원한다면 더 많은 것을 열망하는 탐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II. 사람이 나쁜 탐심을 갖게 되는 두 가지 원인
첫째는 타락한 인간의 마음 속에는 탐심이라는 죄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의 모든 실과를 다 공짜로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먹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유혹하자 하와의 마음속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탐심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탐심을 가진 것은 제10계명 위반이고 탐심을 행동으로 옮겨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제8계명 위반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탐심의 죄가 먼저 시작되었고 도적질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죄인된 인류의 마음속에는 탐심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노아 홍수가 일어날 때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악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 홍수로 심판을 내리시고 쓸어 버리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5장 19절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살인은 제6계명의 위반이고, 간음은 제7계명의 위반이고, 도적질은 제8계명의 위반이고, 거짓 증거와 훼방은 제9계명의 위반이고 그리고 그 뿌리는 ‘악한 생각’ 즉 남의 것을 탐하는 제10계명 위반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악이 모두 인간의 타락한 마음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예수님을 예표하는 가장 훌륭한 인물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하여 충신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은 다윗 왕에게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크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3절에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손님이 오셨다고 이웃의 암양을 빼앗으면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 되냐고 나단이 다윗에게 물으니까 다윗 왕이 노하여 대답하기를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삼하 12:5)고 하자 나단이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바로 회개하고 반성문으로 시편 51편을 쓰고 엄한 벌을 받고 겨우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가장 훌륭한 인물도 이런 탐심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에게도 탐심이 없겠습니까 보통 인간들은 예를 들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의 상업과 광고는 모두 인간 내부의 탐심을 자극하고 조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남이 가진 것을 탐하여 도둑질하고, 취하지 못할지라도 빼앗고, 소용없는 것까지도 과다구매하게 하는 사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속에서 자기 마음을 지키고 탐심을 멀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영적인 전쟁인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지켜서 자기의 것을 즐거워하고 남의 것을 탐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III. 나쁜 탐심의 5가지 악한 결과
첫째, 탐심 자체는 마음에만 머무르지 않고 결국은 다른 죄악된 행동으로 반드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의 아내를 계속 탐하게 되면 결국 간음죄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웃의 집이나 토지를 탐하게 되면 사기죄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웃의 소나 양을 탐하면 도적질을 낳게 되고 이웃의 남종이나 여종을 탐하게 되면 약취유인죄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탐심은 마음에 머무르지 않고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행동이 아무리 의로운 것 같더라도 행동의 내면에 있는 동기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제10계명은 이러한 동기를 다루고 있는 계명인 것입니다. 역대상 28장 9절에서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훈계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라고 했고 시편 139편 2절에도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부터 잘 관리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둘째, 탐심은 가질수록 커지고 만족할 수 없어서 결국은 중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적질을 한다고 했을때 가성비가 노력에 비해서 엄청나게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해서 성공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한 번으로 끝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5장 10절에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람피는 사람은 한 여자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바꿉니다. 또 남에게 사기치는 사람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또 쾌락을 위해 허용되지 않는 약물을 복용해서 즐겼다면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마약 중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심은 결국 중독성이 있는 악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탐심을 가진자는 결코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남의 것을 갖고 싶으면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각사람 하만은 에스더서 5장 11절에 “자기의 부성한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방백이나 신복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가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고 자기에게 절하지 않은 것 하나 때문에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다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에 평안을 잃고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그의 민족까지 진멸하려는 미친 짓을 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간계를 역전시키셔서 하만도 죽고 그의 아들들뿐만 아니라 아말렉 민족이 페르시아에서 진멸하게 하셨습니다. 또 사무엘상 18장에서 왕인 사울은 다윗이 가진 인기를 시기하여 악신에게 조종되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두 번이나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탐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넷째, 탐심을 가진 사람은 결국은 이웃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의 아내를 빼앗고자 자기 충신 우리야를 죽인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21장에서는 나봇이 가진 포도원을 빼앗고자 거짓증인 둘을 내세워서 나봇을 죽인 사람이 아합과 그 아내 이세벨이었습니다. 또 탐심은 남을 해칠 뿐만 아니라 국가 간에 전쟁도 일으킵니다. 나라가 경계를 두었으면 그 안에서 잘 살면 되는데 탐심으로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면 결국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대전이 다 그렇게 일어난 것입니다.
다섯째, 탐심은 결국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탐하는 자는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남에게는 좋은 아내, 많은 재물을 주시면서 나에게는 나쁜 아내와 적은 재물을 주십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지도 않고 공의롭지도 않은 분이시요,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반역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탐심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섭리에 반역하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이 이렇게 악하고 해로운 것입니다.
IV. 악한 탐심을 이길 수 있는 방법
첫째로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우리 각자에게 주신 아내와 소유를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에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라고 했고 빌립보서 4장 11절에도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한테 주신 것을 분복으로 알고 그것에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둘째로 남의 것을 사모하는 열망을 좋은 것 거룩한 것을 사모하는 열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싸움 잘하는 사람이 방향을 바꾸면 좋은 격투기 선수가 될 수 있고 놀기 잘하는 사람이 방향을 바꾸면 좋은 예능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페루에서 집회를 하는데 페루 사람들이 가수 싸이의 히트곡인 오빤 강남스타일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잘 노는 것도 방향을 바꾸니까 세계적인 사람이 되고 돈도 많이 벌게 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탐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은 좋은 것을 탐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현세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작다라고 생각되면 하늘에 큰 것을 받으려는 삶을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현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세도 있습니다. 그래서 현세에 일시적이고 썩어질 것을 위해서만 쌓는 인생이 되지 마시고 영원히 썩지 않을 내세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헌신하시고 봉사하시길 바랍니다.
결론
어떤 유대인에게 7명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방에서 함께 살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사정 얘기를 했더니 랍비는 그 방에 돼지를 한번 집어놓고 지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돼지를 집 안에 들여다 놓고 사는데 온 가족이 돼지로 인해서 큰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유대인은 다시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다시 돼지를 돼지우리로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가족들이 이렇게 이 방이 행복하고 좋은지 몰랐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감사하고 누리고 만족하고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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